Rainbow Bible Class

양창삼: [윤회] 외 3 개

2012.01.05 23:41

류호준 조회 수:13347

한양대 경제학 은퇴교수이시며 목사이시기도 한 양창삼 박사님의 시론 단평입니다.

 

 

[윤회]

 

다시 태어나면 당신 나와 결혼할거야?” 가끔 부부들끼리 묻는 말이다. “, 다시 태어나도 당신이야.” 하면 집안이 평안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태풍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런 질문을 해도 되남?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윤회설을 믿는다는 건데. 질문 자체부터 틀린 것이 아닌가? 불교인이라면 몰라도.

 

윤회(輪廻)는 아시다시피 힌두교와 불교의 기본적인 인생관이다. 우리는 누구나 윤회한다고 생각하지만 인간 모두 윤회한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윤회는 해탈하지 못한 중생들에게 해당되지만 윤회의 업장을 해탈한 사람들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다. 열반으로 입적했기 때문이다. 불교에선 해탈한 존재를 부처라 한다. 문제는 부처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윤회란 생명이 있는 것, 곧 중생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사상이다. 윤회는 산스크리트의 삼사라(samsâra)’에서 나왔다. (sam)'함께'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사라(sara)'흘러가다', '움직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윤회는 함께 흘러감,’ ‘생의 변환을 의미한다. 전생(轉生), 재생(再生), 유전(流轉)이다. 이것은 BC 600년경 우파니샤드의 문헌에서 비롯되었다.

 

불교에서 윤회의 대상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무지한 중생이다.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은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다음 생애에 지옥, 아귀, 동물, 인간 등 육도(六道) 중 한가지로 태어난다. 과거에 인간이었던 자가 동물이나 벌레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벌레였던 것이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중생은 집착과 선업, 악업으로 해탈하지 못하고 번뇌와 업보에 따라 육도를 윤회하며 다시 태어나고 또다시 태어나게 된다.

 

윤회사상은 힌두교나 불교만의 사상은 아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사상가나 플라톤에서 윤회를 볼 수 있다. 니체도 그 영향을 받아 영겁회귀(永劫回歸)라 했다. 김형준의 연구에 따르면 기독교의 경우 유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오리게네스 등에서 윤회사상이 발견된다. 하지만 니케아 회의에서 이 사상은 거부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 5차 공의회는 플라톤 사상에 입각해 윤회사상을 가르쳤던 오리게네스의 이론을 이단으로 단죄했다. 그 후 기독교에서 윤회라는 관념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또한 영혼이 탄생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영혼의 선재론도 부정되면서 생은 오직 1회적인 것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죽어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데, 다시 무엇으로 태어나 다시 고뇌의 삶을 이어가야 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그러니 여보, 다시 태어날 생각은 아예 접고 둘이 손잡고 주님 앞으로 갑시다. 그런 질문하면 오리게네스가 되는 거야.”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하고 싶다면]

 

8시를 넘긴 시간, 그는 국도에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익숙한 길이 아닌 데다 커다란 탑차가 앞에서 운행 중이었다. 그런데 앞의 탑차가 갑자기 비상등을 켜는 것이었다. 순간 그는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음을 직감했고, 곧 커다란 웅덩이가 나왔지만 앞차의 신호 덕분에 장애물을 피해 안정운행을 할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그 차 뒤를 따르며 유심히 지켜보았다. 운전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트럭운전자는 난폭하다는 편견을 깨뜨리게 되었다. 신호등에서 급정거를 해야 할 때는 뒤차를 위해 비상등을 켜주고, 추월을 할 경우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내며 배려하는 운전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차 뒤에 있는 회사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다음 날 그 회사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고 그 사람을 칭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전화를 했노라 했다. 전화를 받던 사람은 차량 관리자로 직원이 그렇게 모범적이었던 것에 기뻐했다.

 

잔잔한 호수에 나뭇잎이 하나 떨어져도 그 물결은 호수 가에까지 다다른다. 아마 그 회사에서는 이 작은 이야기가 잔잔한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너무도 평범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보아주는 사람이 있고, 그것이 회사의 이미지로 연결된다는 가치도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관계와 갈등관리클래스. 그는 이 경험담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마무리했다. “주변을 돌아보면 내가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많습니다.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먼저 변화하십시오.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십시오.”

 

 

 

[아수라장]

 

사람들이 야단법석이더니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아수라장, 그런데 그 말은 결코 쉬운 말이 아니다. 힌두교의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불교가 채용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아수라장(阿修羅場)은 전란이나 그 밖의 일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진 상태를 뜻한다. 끔찍하게 흐트러진 현장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된다. 영어의 ‘turmoil, chaos, mess’ 등에 해당한다. 아수라장의 아수라(阿修羅)추악하다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 아수르(asur)’에서 나왔다. 아소라(阿素羅), 아소락(阿素洛), 아수륜(阿須倫) 등 여러 말로 표현되기도 하며 간단히 수라(修羅)라기도 한다. 아수르는 페르시아어의 아후라(ahura)와 같은 말로 아후라 마즈다처럼 신격을 뜻하며, 인도의 여러 신들 중 바루나나 미트라를 아수라라 했다.

 

힌두 신화에 따르면 아수라는 원래 선한 신이었다. 그런데 하늘과 싸우면서 악한 신으로 변했다. 아수라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인 흉칙하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수라는 선신들의 적을 총칭할 때 사용되기도 하고, 비천(非天) ·비류(非類) ·부단정(不端正)한 귀신의 한 동아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인도 아리아인이 신앙하는 신격 가운데 아수라의 일군과 데바[]의 일군이 있어 인드라를 비롯한 데바의 무리가 제사의 대상으로서 우세해짐에 따라 아수라가 마신으로 취급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에서는 다에바스가 마신이다.

 

아수라는 증오심이 가득한 가운데 싸우기를 좋아해 전쟁의 신으로 불린다. 하늘과 싸울 때 하늘이 이기면 풍요와 평화가 오고, 아수라가 이기면 빈곤과 재앙이 온다고 한다.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는 비슈누신의 원반에 맞아 피를 흘린 아수라들이 다시 공격을 당하여 시체가 산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하게 흐트러진 현장을 가리켜 아수라장이라 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불교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를 아수라장이라 한다. 아수라는 세 쌍의 손 가운데 하나는 합장을 하고 있으며 다른 둘은 각각 수정(水晶)과 도장(刀杖)을 든 모습을 하고 있다. 불교의 육도(六道) 가운데 하나로 아수라도(阿修羅道)가 있다.

 

불교는 힌두 신화 대부분을 재해석해 인도의 신들을 불교의 호법신장으로 만들었다. 인도의 신들이 부처의 설법에 감화하여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설정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제석천(帝釋天)으로 불리는 인드라다. 하지만 비슈누와 함께 절대적인 추앙을 받아 마하칼리로 불렸던 시바는 부처의 문지기로 강등된다. 힌두교와 불교의 보이지 않는 역학관계가 보인다.

 

불경가운데 잡아함경은 인드라와 아수라의 싸움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인드라가 아수라의 딸을 허락 없이 취하자 아수라가 싸움을 걸어왔고 인드라는 위기에 처한다. 전투에서 패해 도망가던 인드라는 전차 앞에 금시조의 둥지가 있는 것을 보고 알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전차를 돌려 아수라 쪽으로 향한다. 아수라는 이것이 인드라의 계략일 것이라 생각해 후퇴했다. 위기를 모면한 인드라는 결국 아수라에게 승리한다. 불교에서는 아수라가 제석천(인드라)과 싸운 마당을 가리켜 아수라장이라 한다.

 

이 신들의 싸움을 인간이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인간이 선행을 행하면 하늘의 힘이 강해져 이기게 되고, 악행을 행하면 불의가 만연하여 아수라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아수라를 물리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는 말이다. 인간이 선행을 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룰 때 악의 상징인 아수라는 발을 못 붙이게 되고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언제 선과 정의를 바로 세워 이 아수라장을 밀어낼 수 있을까.

 

 

 

[땅 속 보석과 사람 속 보석]

 

1976년 초 영일만 석유시추 발표 때 박정희 대통령은 아르헨티나가 나올 때까지라도 파 보라 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지구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지표면 아래의 연구는 미지에 가깝다. 인류가 수만 년 발을 딛고 살아왔는데 그 깊은 속은 아직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래서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지구의 층상 구조는 가장 바깥부분부터 지각, 맨틀, 핵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핵은 다시 외핵과 내핵으로 나뉜다.

 

지각은 우리가 딛고 선 지표면 아래의 두꺼운 층으로, 0에서 약 60km까지의 암석권과 약 60km에서 약 200km까지의 연약권으로 이뤄져 있다.지각평형설에 따르면, 대륙지각은 낮은 밀도를 보상하기 위해서 두꺼워야하고, 해양지각은 얇아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대륙지각의 두께는 30에서 70km에 달하는 반면, 해양지각의 두께는 10km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류가 땅 밑을 뚫고 들어간 것은 불과 몇km에 불과하다.

 

맨틀은 약 200km에서 2890km까지의 중간권으로, 상층부는 감람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각 작용으로 인해 맨틀이 지표면 위로 솟아나오기도 한다. 2890km에서 5100km은 외핵으로, 그 온도는 섭씨 3000~5500도에 달한다. 그리고 5100km에서 6378km까지는 내핵으로, 그 온도는 섭씨 5500도 이상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온도가 높아 사실 지구를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표에 따라 광물질의 종류나 속성도 다르다. 금보다 더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다이아몬드다. 화산폭발로 인해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다이아몬드가 지표면 위로 올라오기도 한다. 화산 폭발이 있는 곳에서 다이아몬드가 주로 발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탄소로만 구성된 이 광물은 자연산 물질 중 경도가 가장 높아 보석 중에 보석으로 꼽힌다. 더 깊은 땅 속엔 과연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좋은 것, 아니 우리가 채 생각지 못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땅 밑은 아직 미지의 세계다. 10층 깊이로 땅 속을 팠다 해도 1km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아래는 비밀로 남아있다. 그 밑이 바로 우리가 딛고 사는 땅이다. 창공으로는 우주선을 띄우는 이 시대에 우리는 아직도 몇km 밑의 땅속을 모른다. 그런데 더 모르는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속이다. 그토록 오래 함께 살았는데 오늘도 왜 그런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동안 위대한 발견을 했다. 그것은 바로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보석, 곧 사랑이다. 용서라는 보석, 감사라는 보석도 버릴 수 없는 아주 귀한 보석이다. 우리 속에 보석들이 많다. 그것을 캐며 살아도 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