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5]

“열매 없는 포도나무”

에스겔 15장; 요한 15:1-8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4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5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수풀 가운데에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한 것 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같이 할지라. 7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8 내가 그 땅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뒤집어진 은유

 

하나님은 아무 가치도 없고 소용도 없는 포도나무를 비유로 삼아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셨지만, 하나님은 에스겔이 처한 상황을 배경으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좋은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좋은 포도나무라 하더라도 건물을 짓는 재료로는 사용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불에 던지는 땔감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포도원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옛적부터 사용되어온 친숙한 은유입니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였습니다. 요셉은 담장너머까지 번성하는 포도나무가지에 비유되었습니다(창 49:22). 후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옮겨심긴 포도나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장소를 주신 것입니다(시 80:8,9) 포도나무 은유는 세상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품위와 고상함, 탁월함과 우수성, 아름다움과 빼어남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은유는 그 자체 안에 위험한 유혹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자신들의 중요성에 대한 부풀려진 이미지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은혜로우신 포도원 주인이신 창조주-구속자께 영광과 찬양을 돌려 드리는 대신에, 그들은 자신이 본래적으로 잘난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이 은유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그들의 뽐내고 허풍떠는 주장을 뒤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열매 없는 포도나무’를 꺾어 땔감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 비유는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포도나무는 숲의 어떤 다른 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별 볼일 없는 초라한 나무입니다. 단단하고 쭉 뻗은 나무들과는 달리 포도나무는 건축자재로도 사용될 수 없고 안락의자 재료도 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몇 분 정도만 따스하게 해주는 땔감밖에 안됩니다.

 

어떤 우람한 나무는 불에 태워도 가운데 토막은 남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가지의 양쪽 끝을 태우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 재로 변합니다. 양쪽 끝이 타버린 포도나무 가지는 북이스라엘이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게 된 일과, 597년 경 바벨론의 침공으로 남 유다의 예루살렘이 공략이 되고 에스겔을 포함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가게 된 사건을 가리킵니다. 잠시나마 살아남은 가운데 토막은 예루살렘의 남은 자와 남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에스겔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온 이후에 예루살렘의 형편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열매 없는 포도나무

 

우리는 이 비유로부터 좀 더 깊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포도나무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태생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다는 것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열매를 맺어야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포도나무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개간하시고 부드럽게 일구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변함이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 자체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포도원이 풍요롭고 열매로 가득한 농장이 되도록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포도열매는 보이지 않았습니다(사 5:2). 그분은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정의(째다카)가 있는지 찾았지만 보이는 것은 폭력적인 피흘림(째아카)뿐이었습니다. 혹시 공의로운 삶(미슈파트)이 있는가 하여 두루 살펴보았지만 그분의 귀에 들리는 것은 압제를 받는 사람들의 비명(마슈파하)뿐이었습니다(사 5:7).

 

열매를 맺는 섬김과 봉사를 물리침으로써 예루살렘은 명예로운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선택받은 이 백성들은 온 세상 나라들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위치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 영예로움에 수반하는 의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란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서 자신의 명예만큼 의무를 지켜야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은 가진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는 말도 있습니다.

 

성경에 포도나무 은유를 매우 중요하게 사용한 곳이 요한복음 15:1-8입니다.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강론 가운데 포함된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놀랍게도 에스겔이 말하고 있는 포도나무 비유와 너무 흡사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후에 포도나무의 가지들처럼 그들이 내게 연합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새로운 크리스천 사역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비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포도원 농부로,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자신들을 가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 공동체에 오셔 열매가 풍성하고 맺고 있는지를 살피실 것입니다.

 

 

가지치기를 해야 더 많은 열매가

 

열매가 풍성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약의 예언자들의 말씀 안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잘 나와 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포도나무에서 많은 열매를 기대하셨다는 것입니다(10:1). 그러나 이사야는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좀 더 분명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일명 ‘포도원의 노래’(사 5:1-2)에서 이스라엘은 오로지 먹지 못할 들포도를 맺었다고 탄식하였습니다.

 

포도원의 노래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이사야가 들포도라고 한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게 됩니다. 먼저 이사야는 탐욕스런 농부들과 마을의 술주정뱅이들 그리고 나라의 무책임한 지도자들을 향해 일련의 탄식과 저주를 쏟아냅니다. 그들은 모두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을 무시하거나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고 선을 악이라고 부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도덕적 가치들을 뒤집어 놓은 책임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법정에는 정의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억울함으로 가득한 평민들은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풍성한 열매란 ‘올바른’(짜디크) 행동이었습니다. 정의와 자비와 정직과 가난한 자들을 향한 긍휼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덕성들은 바울이 성령의 열매들이라고 부르는 아홉 가지 덕목들과 상통합니다(갈 5:22-23),

 

그런 열매를 맺는 비결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그런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을까? 첫 번째 비결은, ‘가지치기’입니다. 하나님은 날카로운 칼과 가위를 가지고 포도밭 위 아래로 다니시는 부지런한 농부이십니다. 가지 치는 작업은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먼저 뒤엉켜 버린 거친 잡초들을 걷어 내야하고, 그 다음에는 필요 없거나 시들한 가지들은 과감하게 잘라 내야합니다. 그래야 여름철 추수가 대풍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당의 이줄 저줄을 돌아다니시면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만일 그가 감미롭고 달콤한 포도열매를 찾지 못하신다면, 그는 우리의 삶을 고통스런 가지치기로 다듬어 가실 것입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의 문맥은 우리의 삶 속에 오는 시련들과 유혹들에 대해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가지치기를 해도 좋은 열매를 생산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은 아예 그 가지를 꺾어 버리겠다고 하십니다(요한 15:2; 마태 15:13). 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시민들을 향해 한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포도나무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는 또 다른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거주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 거주해야합니다. 그러면 그분도 그들 안에 거주하실 것입니다(요한 15:4-5).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어떤 교리들에 대해 동의하거나 어떤 윤리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진정한 경험은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분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와 친밀한 관계를 가질 때 열매 맺는 것은 보장됩니다. 가지가 늙거나 오래되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면 버려집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열매들은 우리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계 14:13).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선택하시는 것은 그분의 은총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까? 즉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경배를 받기 위한 공동체로만 선택하셨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달하는 통로로 사용하기 위해서 선택하셨습니까? 두 곳을 자세히 읽고 답변해 보십시오. (창 12:1-3; 엡 2:8-10).

 

2. 크리스천들은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거나 조작하여 자신을 위한 우상이나 종교로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까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선교사역을 하면서 이런 일들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요?

 

3. 마태 21:33-46에 잇는 예수님의 비유를 살펴보십시오. 이 비유가 오늘 에스겔 본문과 어떤 점에서 대조가 됩니까? 마태는 포도나무에 관한 가르침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있습니까?

 

4. 오늘 본문 공부를 통해서 제시된 가이드라인을 따른다면, 오늘날 열매를 맺는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5.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를 어떤 식으로 가지치기를 하시는가요?

 

6. “그리스도 안에 거하다”는 말이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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