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버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얼마 전 화창한 어느 여름의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아침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가는 길에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물류 창고가 있는 창고지역을 지나가던 중이었습니다. 오른편을 우연히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한적한 주일 아침에 물류 창고에 앞에 주차되어 있는 대형트럭의 컨테이너가 보였습니다. 컨테이너 옆면에는 다음과 같은 대형 문구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Earned. Never Given.”

문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버는 것임,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님!” 아마 회사에 출근하는 직장인들에게, 아니면 공짜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경고성 잠언처럼 보였습니다. 다시 쉽게 통역하자면 “일을 하려면 부지런히 하시오. 노력하는 만큼 버는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일의 대가는 노력의 열매이지, 결코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일하러 오는 고용인들에게 책임감을 일깨워주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책임성있게 일하라는 고용주의 무언의 채찍처럼 들렸습니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문구와 함께 떠오르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이란 없다”(there is no free lunch!).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인 동시에 공짜 뒤에는 반드시 뭔가 요구하는 것이 있으니 덮어놓고 공짜를 좋아하지 말라는 말도 될 것입니다. 덥석 집어먹다가는 반드시 뒤탈이 날지도 모른다는 처세술의 경구일지도 모릅니다.  


이 문구(“버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는 지금 주일 아침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교회에 가는 나에게 교회에 가는 의미와 신앙의 기초를 새롭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 문구는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문구는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핵심 문구 중의 하나인 “오직 은혜로”(Sola Gratia)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는 100% 공짜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 있어야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의 눈에 들려면 좋은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의 호의와 사랑을 벌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온갖 종교적 일에 헌신하는 일, 순례를 하는 일, 구제하는 일에 힘쓰는 일, 성자의 유물을 참배하는 일, 명상하는 일 등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말로 번역하자면, 빠지지 않고 교회의 모든 집회에 출석하기, 헌금은 차후세계를 위한 보험과 같은 것이므로 많이 내면 낼수록 나중에 좋음, 기도 시간을 늘리되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 정도는 되어야 함, 신앙은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과 동의어다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어쨌건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관행은 당시 로마교회의 외형적 권위와 생존을 위한 존속을 위해서 지속되었고, 그런 방식으로 교인들의 우매성은 강화되기 까지 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운동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운동의 중심에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지 인간의 노력의 대가는 아니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주제문구로 표현하자면 “Earned. Never Given”이 아니라 “Given. Never Earned”이었을 것입니다. 즉 [구원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노력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엡 2: 8-9). 우리가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은 "구원은 공짜입니다,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기본적 신앙의 핵심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말로는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지 버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정반대의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상당한 경우 이런 현상의 책임은 목회자들에게 돌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교인들이 부지런히 교회 일을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교회 일들이 마치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를 버는 수단인 듯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종교적 일들과 교회의 일들에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와 복을 보상으로 주신다는 생각을 은연중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교인들은 각종 교회 일들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지름길인줄 잘못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위 “종교적 달리기”를 은연중 강요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마리아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 마르다 군단을 이루기를 바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참조, 눅 10:38-42)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가속화 시키는 이유는 교회 밖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은 우리에게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주어진다는 책임성의 윤리를 가르칩니다.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잠언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외우고 익혀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잠언이 신앙의 영역에 적용될 때 얼마나 세속적인 경구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가 노력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신앙의 영역에도 무의식적으로 잠입해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런 잠언이 신앙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마치 날개 부러진 새에게는 날고 싶은 의지는 있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 날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온전한 치료를 통해서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야만 다시 날 수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점은 “하나님만이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만이 구원하신다”, “하나님만이 속량하실 수 있다”는 고백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금전출납부를 기록하시는 회계사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계장부 기록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도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쏟아 부으시는 분이십니다.

때때로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낭비하시는 분처럼 보일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은혜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도저히 받을 수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에게 숨이 차도록 은혜를 쏟아 부어 그 은혜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그 은혜 속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비싼 값을 지불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궁정음악가 살리에리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저렇게 더럽고 추하고 저질적인 인간 모차르트에게 오로지 신들 만이 소유할 수 있는 재능을 무차별적으로 쏟아 부으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낭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은혜는 그것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힘쓰고 노력하고 애쓰고, 좀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자에게 은혜가 주어져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멈춰 생각해보면 이 말은 어불성설( 語不成說) 입니다. 은혜는 주어지는 것(given)이지 벌어들이는 것(earned)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은혜는 받는 것(received)이지 버는 것(earned)이 아닙니다. 살리에리가 마태 20장의 포도원의 품꾼 비유를 덮어놓고 읽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상(像, image)은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2천년 이상 가장 오해되고, 실천되지 않는 복음의 핵심이 있다면 “은혜의 교리”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실제 삶속에서 은혜를 살아간다면 바로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다스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분당’(分堂, 죄와 그 오염으로 인해 깨어지고 일그러진 세상)에서 사는 우리 모두가 애타게 갈망하는 샬롬의 나라 말입니다. 아멘.

2008년 8월 11일 (Grand Rapids, Michigan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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