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예언자들의 소명과 우리의 소명”


류호준 목사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길거리를 걷다가 누군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이 낯선 거리에서 나를 부를 사람이 없을 텐데 하고 미심쩍어하면서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두리번거린다. 누가 부르는 것일까? 직감적으로 귀에 익숙한 목소린지 처음 듣는 생소한 목소린지 구분하려든다. 물론 헷갈리는 경우도 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목소리인데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다. 어쨌건 누군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면 그에게 대답을 한다. 그에게로 간다. 그리고 부르는 자와 부름을 받은 자 사이에 대화가 시작된다. 누군가 나를 불렀을 땐 분명히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부름에도 여러 가지다. 군대에서 상급자가 하급자를 불렀을 경우,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을 불렀을 경우, 사업관계에 있는 사람이 호출했을 경우, 아니면 부모가 자녀를 불렀을 경우, 친구끼리 혹은 연인끼리 불렀을 경우 등 부름도 다양하다. 부르는 방식도 다양할 것이다. 전화로, 이메일로, 편지로, 혹은 전갈을 보내서 혹은 직접 불러내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누군가 부르면 대답하고 그를 만나게 된다. 예기된 만남도 있지만 예기치 못한 만남도 있을 것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면서 부름에 응답하는 경우도 있지만 껄끄럽고 불안한 마음으로 부름에 응하는 경우도 있다.


교회에서, 설교에서, 대화에서 ‘소명’(부르심)이란 단어보다 더 자주 더 흔하게 사용되는 용어가 또 있을까? 사실 우리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가장 큰 울림이 되어 돌아오는 단어가 있다면 ‘소명’이란 단어일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일기에는 삶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격정적으로 써놓은 글이 있다. “[인생의 진정한 존재목적]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이념을 찾는 것이다.”1) 소명에 관한 울림 있는 성찰이다. 오스 기니스는 그의 한 책에서 소명을 이렇게 정의한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결정적으로 부르셨기에, 그분의 소환과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가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다.”2)


하나님의 부르심


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불러내다’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부름 받은 존재’라고 한다. 일명 개혁파의 “구원의 순서와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하나님의 택정함이 있고(선택), 그 다음에 부르시고(소명), 부르신 자를 “너는 이제 괜찮아” 하시며(칭의), 그를 깨끗하고 거룩한 그릇으로 만들어 가시며(성화), 궁극적으로 흠이 없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영화)(롬 8:30). 처음과 끝인 선택과 영화가 영원에 잇대어 있다면, 소명과 칭의와 성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즉 역사 안에 닻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역사 안에서 이뤄지는 첫 번째 사건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부르심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부르심에 응답할 뿐이다. 어둠에 있던 자들을 불러내어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골 1:13).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다. 저명한 구약신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이 어떻게 이 혼란스럽고 헷갈리는 세상에서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계속될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바 있다.3) 죄악이 창궐한 세대에 살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불러내시고, 외견상 삶의 안전지대였던 갈대아 우르에서 서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을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 세상 현실 세계에서 수많은 도전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부르심은 언제나 강력하여 궁극적으로 누구도 저항하거나 거절할 수 없다. 일단 하나님의 부르심이 시작되면 어떤 세력도 어떤 왕도 그것을 막아낼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결정적(decisive) 부르심이다. 주권적이며 강권적인 부르심이다.


“야웨의 소드”


구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심판과 구원하는 일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가 그의 종들을 부르실 때 심심해서 그냥 부르시는 일은 없다.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한잔 하기 위해 그의 종들을 부르시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가 그의 종들을 불러내실 때는 사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사명 없는 소명은 없다. 이 사실을 잘 표현하는 고전적 구절이 아모스 3:7에 나온다. “주 야웨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여기서 예언자(선지자)를 하나님의 ‘종’이라 부른다. 종이란 노예와 같이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일한다는 뜻이 아니라, ‘심복’(心腹)이란 단어가 그 뜻에 더욱 가깝다. 주인의 마음과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뜻을 실행에 옮기는 충실한 부하를 가리킨다. 또한 “야웨의 비밀”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소드 야웨”로서, 히브리어 단어 ‘소드’는 예언자의 소명을 이해하는 열쇠 용어이다. 이 용어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회의를 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일종의 비밀회의라 할 수 있는데, 그 회의에 참석한 자들만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안건이 상정되었는지, 어떤 결정들이 내려졌는지를 알게 된다.4) 성서학에서는 종종 이 장면을 천상의 어전회의(divine council)라 불리는데, 야웨 하나님께서 천상의 왕궁에서 그의 신실한 종들(천사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하는 장면이다. 바로 이런 회의에 참석해서 그 회의에게 내려진 야웨의 칙령을 받아 지상에 선포하는 사람이 예언자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열왕기상 22장에 기록된 예언자 미가야에 관한 이야기다.


참 예언자와 가짜 예언자


미가야 내러티브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차이가 뭔지를 잘 보여주는 고전적 에피소드다. 미가야와 대척점에 있었던 시드기야와 그의 일당 400명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길르앗 라못 정벌 전쟁에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적극적 지지를 표현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계시나 징조를 받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전쟁의 승리를 확신한다고 한 것이다.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6절);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였습니다.”(11절),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실 것입니다!”(12절). 아무리 확신 있게 전쟁의 승리를 선포하였어도 그들의 말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였다. “야웨의 소드(סוד)”, 달리 말해 “야웨의 어전회의”에 참석해 본 일이 없는 자들의 허황된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언자 미가야는 천상에서 열리는 야웨의 어전회의에 참석하여 그것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야웨 하나님의 결정 사항들을 친히 듣고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미가야가 아합 왕 앞에서 한 말 중에 “내가 보니”라는 문구가 있다(17,19절). 그는 시드기야와 그의 일당들과는 달리 친히 천상의 어전회의(야웨의 소드)에 참석했던 주의 종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경륜과 의지를 경험한 주의 종이었다. 그리고 그가 거기서 받은 천상 왕 야웨의 뜻을 남김없이 그대로 전달하였다. 아합이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합은 전쟁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거짓 예언자들은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용납되는 직업적 단체에 속한 자들이었다. 호구지책으로 예언자 그룹에 들어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요즘 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부르심이 없이, 아니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석해 본 경험이 없이 그야말로 먹고 살기 위해서 예언자 학교에 입학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다. 이것은 지금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 이스라엘 사회에도 이런 일이 많았다. 아모스서에서 목축업자이며 뽕나무 재배업을 하던 아모스가 어느 날 하나님의 강권적 부르심에 압도되어 예언자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남쪽 유대 출신인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끌려 북쪽 이스라엘로 가게 된다. 그는 예언자의 사명, 즉 하나님이 북 이스라엘에 대해 갖고 계신 비밀스런 계획을 유감없이 선포하게 된다. 그 때 그는 그 땅의 대표적인 ‘종교인’인 아마샤에게 저지를 당한다. 그는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 성소인 벧엘 성소의 대제사장으로서 아모스의 예언자 사역을 방해한다. 그리고 유대 당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일하고 먹고 살라고 종용한다. 그러자 아모스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선지자도 아니요 선지자의 아들도 아닙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직업적 선지자도 아니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선지자 학교의 생도도 아니란 말이요!”라고 한 것이다. 당시 선지자 학교가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신학교라 할까? 그런데 문제는 상당수 학생들이 진정한 소명감도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일도 없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도화 되어버린 신학교육과 그 기관에서 대량 배출되어 이리저리 잡(Job)을 찾아 헤매는 신학생들의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현실인 것은 웬일일까? 문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출되느냐, 얼마나 탁월한 학생들을 배출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에 충실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다. 소명감이 없는 사람은 장차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대형교회든, 자신의 프로젝트를 실현시킬 수 있는 마당이 되던, 자신의 생계를 위한 비밀스런 계획이든, 자아실현장이든 상관없다.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모두 가짜이며 위선이며 신성모독이다. 소명! 다시금 생각해야할 중심주제이다.


예언자들의 소명 이야기  


예언자들의 사명과 임무들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선지자 혹은 예언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비’로, 그 뜻은 일차적으로 ‘부름을 받은 자’이다. 그는 자기의 말을 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이다. 영어에 예언자에 해당하는 단어인 prophet은 헬라어 pro-phates에서 유래했는데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란 뜻이다. 한자어인 예언자도 흔히 豫言者(예언자)로 잘못 쓰지만 아마 좀 더 정확한 한자어는 預言者(예언자)일 것이다. 앞의 한자어는 마치 점쟁이가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맡겨진 말을 말하는 자란 뜻이다. 성경에서 참 예언자라 할 경우는 후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중들은 전자의 의미로 알아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자기의 전령, 자기를 대신하여 말할 대변인 혹은 하나님 나라를 대신 할 대사로 부르실 경우, 우리는 그를 가리켜 ‘예언자’라 한다. 하나님이 부르신다 하여도 그 부르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일어날 때 무슨 현상이 동반되는지 등, 부르심의 세부내역에 대해서는 아직도 신비로운 부분이 많다. 그러나 학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불러 예언자로 세우실 때 다음과 같은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알려준다.5)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다(Divine confrontation). 일종의 ‘신의 현현’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자기를 위해 일할 사람을 불러내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직접 대면하신다. 모세의 소명 이야기가 좋은 예이다(출 3:1-3). 야웨의 천사가 불타고 있는 가시덤불 가운데서 모세를 만난다. 아무런 생각 없이, 달리 말해 모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아래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아니 만남의 이니셔티브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게 된 결정적 주도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말이다. 소명에 있어서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의 예기치 못한 출현에 모세는 당황하였으며 그는 ‘이 이상한 광경’을 보기 위해 돌이켰다. 여기서 “돌이키다”는 용어는 물리적으로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시려는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둘째로, 하나님이 사람들 불러 자기의 예언자로 삼으실 때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리시고 왜 그에게 나타나셨는지 그 이유를 말한다(Introductory word). 모세의 경우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기가 모세의 조상들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밝히신다. 그리고 자기의 언약백성을 애굽의 폭정에서 구출하시려는 의도가 있다고 모세에게 알리신다.(출 3:10) 예레미야의 경우 “하나님은 너를 여러 나라를 위한 선지자로 세웠노라”(1:5);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1:10) 


소명 내러티브의 셋째 요소로는 공식적인 사명위임이 있다(Commission). 예언자로 부르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사명이 부과되지 않는 소명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주어지는 특수한 임무가 공적으로 부여된다. 종종 “가라” “내가 너를 보내노라”와 같은 용어가 사용된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 이제 가거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노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라.” 예레미야의 경우,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1:17)


소명 이야기의 패턴 요소가운데 네 번째는 부름을 받은 예언자가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며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Objection from the prophet). 소극적 반응을 넘어서 “저는 아닙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그런 막중한 임무를 감당할 자격이 안 됩니다.” 등과 같은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해할 만하다. 어떻게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부름을 받은 자는 자신의 부적격함, 자질이 없음, 중요한 덕성들과 품성이 잘 준비 않았음을 고백하면서 소명에서 물러나려한다. 모세의 경우 역시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저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저는 대중 연설을 잘못합니다.”(출 3:11) 등과 같은 변명을 댔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이유들이다. 아마 우리들의 경우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교만하거나 자기의 자격을 은근히 내세우는 사람일지 모른다. 이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저는 망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입술이 더럽고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감히 만군의 왕이신 야웨를 뵈었습니다.”(사 1:6) 모세를 닮아서인지 예레미야 역시 하나님께서 그를 열방의 예언자로 삼겠다고 하시지만 그는 이렇게 한 발을 뒤로 뺀다. “아이고, 무슨 소리 하십니까? 주님, 저는 아이입니다. 말을 할 줄 모릅니다.”(렘 1:6).6)


소명 내러티브의 다섯 번째 요소는 사명에 대한 확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이다(Reassurance from God). 앞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뒤로 움츠리며 물러갔던 사람, 즉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자격이 없어. 나는 안 돼. 내게는 특별한 재능도 없고 기술도 없고 언변도 안 되고, 그렇다고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니고 연고도 없고… 나는 별 볼일 없는 존재야”라며 뒤로 물러선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다가오셔서 확신을 심어주시고 용기를 주신다. 고마우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면서 걸어가게 되는 매 순간마다, 매 발걸음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연약한 예언자 후보자에게 맹세하신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무슨 일을 당해도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라는 말씀으로 확신시켜 주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소명을 받은 자에게 어떤 징표를 보여주신다(Signs from God). 하나님은 말씀으로뿐 아니라 가시적 징표로 소명 받은 자를 격려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신다. 모세의 경우, 불타고 있으나 불타버리지 않는 가시덤불이 일종의 징표 역할을 한다. 애굽의 환난의 풀무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죽지도 사그라지지도 타버리지 않는다는 징표로서 불타는 가시덤불 형상이다. 마치 신약시대의 크리스천들이 십자가를 바라 볼 때도 역시 그러하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위대한 확신의 징표다. 로마의 군인은 그를 나무에 달아 칼과 창으로 그들 찔렀다. 세상을 그를 죽였다. 그러나 그가 달린 십자가의 나무에서 생명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 나무는 우주적인 큰 나무가 되어 세상 모든 민족과 나라와 언어들이 그 밑에 나와 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마 11;28). 사람들이 불질러댔던 그 고통과 죽음의 불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비천한 떨기나무를 결코 태워 버리지 못했다. 그분 가운데 하나님이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7)


이상의 여섯 가지 요소가 구약의 예언자 소명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공통점들이다. 물론 모든 예언자 소명 내러티브에서 이상의 여섯 가지 요소가 모두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종합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에게는  많은 의문점들이 남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각 예언자들에게 임했을 때 어떤 현상이 있었을까? 부르심이란 것이 내면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초자연적 현상을 수반하는 소명인가? 예언자의 의식세계를 상대로 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무의식 세계를 향한 것일까? 황홀경에 빠지는 현상은 없었는가? 그들이 보았다고 하는 ‘환상’은 어떤 상태인가? 어떤 상태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는가? 소명과 함께 사명을 받게 되는데, 왜 어떤 예언자는 이상한 짓을 하는가? 이러한 아직도 풀어야할 많은 신비에도 불구하고 예언자의 소명과 사명은 분명하다. 천상의 왕이신 야웨 하나님의 메시지를 온전하게 충실하게 전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남자와 여자가 예언자였다는 사실이다. 예언자의 직에 있어서 성차별은 없었다. 모두 하나님의 메시지를 분명하고도 역동적으로 선포한 주님의 종들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양 날개가 다 필요하셨을 것이다.


소명에 충실했던 예언자들?


하나님께서 자기의 전령(傳令)을 선발하실 때 이상과 같은 선발 과정을 거쳤다. 아마 우리에게도 그와 동일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그에 대한 최종 합격자를 발표하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일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설득과 자신의 망설임 사이에서 갈등하던 사람이 마침내 하나님의 끈질긴 설득에 응답한다. 일단 응답한 예언자들은 사명의 전선에 투입된 후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맞지 하게 된다. 전선(戰線)이 따로 없었다. 사역의 현장에선 전방과 후방이란 개념이 없다. 사방이 전선이기 때문이다. 핍박과 박해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마찬가지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아모스는 적지에 투입된 특수부대원 같았다. 여로보암 왕의 살해 위협과 벧엘 제사장인 아마샤의 회유와 협박을 당한다(암 7:10-17). 개인적인 갈등은 깊어지고, 가정적인 요인과 사회적인 요인 등 수많은 변수 가운데 아무런 도움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모든 소명과 사명은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선포하고 외쳐도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그들의 귀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쉽게 넘어가는 연약한 청중들이다.


“평화. 평화, 평화”를 삼창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발흥할 때, 예레미야의 사역은 점점 힘들어지고 심지어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심각한 의심마저 들기도 한다.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마저 외면하시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예레미야의 고백록의 대부분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있다.8) 하나님께 배신당한 마음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주님은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 시냇물(와디)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렘 15:18). 이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만만치 않은 임무였다. 아무리 부르짖고 외쳐대도 사람들은 귀가 먹어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니 이럴 수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잘 듣고 회개하고 그래야 교회도 부흥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사 6:9-10). 이 정도면 가히 절망적이 아닌가? 이것이 당대의 참 예언자들이 직면했던 문제들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철저하게 자기만을 위한 세대에게 복음이 잘 전파되기는 힘들다. 개인적 상한 감정의 치료를 우선시 하는 치료세대, 찬양과 경배를 통해 때론 정서 순화를 은연 중 바라는 감성세대, 건강과 복음이 가장 잘 팔리는 세대, 언제라도 찾으면 있어야만 하는 ‘편의점 하나님’, 그리스도(Christ)가 아니라 소비자(Consumer)가 이끌어가는 교회들, ‘관용’이라는 민주적 미덕아래 종교다원주의를 옹호하는 신학자들과 평신도들, 이러한 척박한 환경 아래서 ‘소명 받은 자’들은 고민하고 고뇌한다. 때론 자신의 소명에 대해조차 의심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모든 예언자들이 언제나 충실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길로 간 것은 아니었다. 소명을 받고도 삐뚤 빼뚤거리며 걸었다. 아마 대표적인 인물이 요나였다. 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이는데 엄청난 값을 지불해야했다. 개인적인 희생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의 소명 회피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재산에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가라고 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정반대편인 다시스로 향했을 때, 성경은 “그가 야웨의 낯을 피하였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싫었다는 히브리 사람들의 표현 문구다. 우리도 누군가 싫으면 그 얼굴(꼴)도 보기 싫다고 하는 것처럼 요나는 자기의 신학적 입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요하게 그를 자신의 부르심 안으로 이끌어 들이신다. 일단 자신의 사역자로 삼으시려 한다면 그를 어떻게 해서라도 잡아들이신다. 하나님 편에서도 값을 많이 지불하신다. 하기야 한 사람의 사역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지불해야하는 비용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사역자뿐 아니라 한 영혼은 불러내시어 그를 자기의 온전한 사람으로 삼기 위해 하나님이 지불하신 값은 엄청났다. 십자가였다. 그리므로 그분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뿌리 깊은 확신이며 위로이다. 사도 바울께서도 이 사실을 매우 웅장한 스케일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소명에 충실하게 사는 일은 언제나 고난과 핍박과 저항과 유혹과 자기회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을 각오해야한다. 소명에 따라 사는 일은 언제나 십자가의 길이며 이것이 제자도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


우리는 주로 구약에서 예언서를 중심으로 예언자들의 소명에 관해 말했다. 그렇다면 소명은 성직자들에게만 국한 되는 이슈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아니오!’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디 목사나 신학생들에게만 국한되리오. 물론 그들에게 철저한 소명감이 없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개인에게만 불행이 아니라 그를 맞아들이게 될 교회 역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소명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시고 계시다는 말이다. 물론 구원에로의 부르심이며 새로운 나라 안으로의 부르심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책임성 있는 에이전트로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한다.


그리스도인들로서 한평생 우리가 매일같이 직면하게 되는 유혹이 있다. 그것은 인생을 구경꾼처럼 사는 일이다. 즉 자신이 어떻게 크리스천의 삶을 살 것인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인처럼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관찰하며 지켜보는 자가 되려는 유혹이다. 어느 신학자가 잘 지적하였듯이, 우리 시대는 점점 더 ‘구경꾼들의 시대’, ‘방관자들의 세대’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팔짱을 낀 채, “어디 얼마나 잘하나 한번 보자” 혹은 “아하, 저렇게 사는군!” 하며 때로는 냉소적인 태도로, 때로는 방관자적인 모습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그런 시대 말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를 따랐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로 그러했다. 그들은 예수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다. 그렇다! 이와 동일한 일들이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방송을 통해 신앙을 중계하기도 하고, 신앙에 대한 책을 읽기도 하고, 신앙에 대해 노래하기도 하고, 또한 재정적으로 신앙을 후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들은 신앙을 ‘행(行)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신앙의 길로 ‘걸어가지’(行) 않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은 그러한 길을 걸어가도록 ‘부르심’(召命)을 받은 실질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부르심을 그들의 삶 가운데서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그 부르심의 길(道)로 걸어가야 할 것이다. 소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우리 각각의 교회들을 태어나게 하셨을까?


실제적 질문: 소명(召命)이란?9)


많은 사람들은, ‘소명’(부르심)이란 오로지 목사들만이 받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정육점 주인이나 제과점 주인이나 양초를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가? 간호사나 의사들, 전기기술자들, 자동차 수리공들, 선생님들이나 사무직 근로자들은 어떤가? 이들 모두는 자기들의 뜻과 결정에 따라 그들의 직업에 들어간 것일까? 그들 중 아무도 소명을 받지 않았다는 것인가? 왜 목사만이 소명을 받는다고 말하는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특별히 예언자의 원조인 모세의 소명 이야기는10)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관해 우리의 이해를 도울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소명 이야기는 매우 친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이야기일까?


대답은 분명하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는 그 장소에 대해 우리 마음대로 통제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누가 꿈에서라도 그런 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그의 사역자를 부르시는 곳은 사람들의 예측과 기대를 벗어나는 장소이다. 하나님은 사각(死角)을 통해서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사각(死角)을 통해 들어오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예기치 않게 만나는 장소가 어디였던가? 중환자실에서, 파산선고를 받은 법정에서, 깨져 가는 가정의 벼랑 끝에서, 절규하며 기도하던 기도원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닦던 부엌에서, 혹은 영적 사막과 광야에서가 아닌가? 하나님은 ‘폐허의 산’, ‘황폐의 산’이란 뜻을 지닌 호렙 산 밑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고 계신다. 마찬가지다! 우리들이 사는 일상적인 장소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평범한 장소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을 위해서 말이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는 독재자처럼 강압적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하나님과 의논하거나 논쟁할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하나님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앞서 하나님과 논쟁을 한다. 먼저 모세는 하나님께, “내가 누구기에 애굽 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한다. 모세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질문을 퍼붓는다.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어눌하고 언변(言辯)이 변변치 못합니다. 내가 어찌 날카로운 언변과 민첩한 정신을 소유한 애굽의 현자(賢者)들을 당해낼 수 있단 말입니까?”


모세는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들과 변명들을 다 생각해 본다. 그러자 하나님은 조용히 그의 말을 들으시고 정중하고도 예의바르게 그의 논점들에 조목조목 대답해 주신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모세는 바로에게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모세가 하나님과 이러한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무슨 이유냐고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려면 많은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이주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종종 우리가 현재 자리 잡고 있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라고 요청한다는 말이다. 한 곳에 정착하여 편안하게 살고 있는 사람에게 다른 곳, 그것도 수많은 도전과 장애물이 놓여 있는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고민스런 밤들과 어려움들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있는 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부르심은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두 번째 의미다. 소명은 우리를 떠나도록 할 것이다.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 아래에서 살면서 전적으로 그분만을 신뢰하도록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모세의 소명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는 우리의 소명의 시간에 대해 아무런 통제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게 되는 ‘시간’이 우리가 계획하고 정해놓은 시간표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 그를 부르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인 동시에 의아심이 생기는 사건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오랜 기간 기다리셨는가? 하나님은 왜 모세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를 부르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왜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곧 그의 전성기에 그를 부르지 않으셨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르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외형적으로 볼 때 모세가 가장 강하고 열정적이었던 때에 그를 부르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독특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일이 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선택(選擇)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선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의 삶의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애를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일 강에서 구출되었던 일, 바로의 궁정에서 교육받은 일 등이 그것들이었다. 모세는 이런 일들이 결코 우연한 일들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즉각적인 행동들로 나타내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의 계획과 그것의 실행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떼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철저한 낭비처럼 보이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사역과 임무를 모세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를 준비시키기 위해서는 이 모든 세월들, 무료하고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모든 세월들은 필수적이었다. 그는 ‘광야의 학교’에서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필수과목을 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다림’과 ‘인내’라는 과목이었다. 이 모든 세월은 그에게 인내를 가르쳤다. 그리고 이 모든 세월은 그에게 광야의 길들, 광야의 방식들을 가르쳤다. 그렇다! 광야의 비밀들을 알기 위해서, 광야가 주는 놀라운 자원들, 광야에 숨겨져 있는 물줄기들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세월동안, 정말로 수많은 세월동안 그곳에 살았어야만 한다. 따라서 40년 생활은 결코 낭비된 세월이 아니었다. 오히려 광야 40년의 생활은 ‘발견’과 ‘훈련’의 기간들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본문의 세 번째 의미이다.


모세 소명 이야기가 주는 영적 교훈의 네 번째이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는지,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사명과 임무를 맡겨 보내시기 위해서다. 무슨 사명인가? 어떤 임무가 우리에게 맡겨졌다는 말인가? 사람이 좀 더 ‘인간적’이 되도록 하는 사명이다. 달리 말해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사람처럼 살도록 만드는 사명이다. 사람의 삶을 명예롭고 귀하게 여기도록 만들라는 사명이다. 사람의 삶을 품위 있게 만드는 사명이다. 사람을 온갖 종류의 압제와 억눌림의 상황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이것이다. “나는 애굽에 있는 나의 백성들의 비참함을 두 눈으로 보았다.” “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나는 그들의 고난과 고통들을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구출하려고 내려왔다.” “자,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이제 왜 그런지 알 것이다. 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다.”


모세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고통의 절규’라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모세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러한 고통을 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소명(召命)들은 인간의 고통을 완화하고 덜어주라는 부르심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소명(召命)들은, 인간 이하의 삶을 인간적인 삶이 되게 하라는 부르심이고, 깨진 마음들을 다시 추스르고 묶으라는 부르심이고, 얻어맞아 쓰러진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부르심이고, 비참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구출해 내라는 부르심이다.


하늘에는, 공중에는, 우리의 주위에는 그러한 부르심으로 가득 차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고통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고통들로 가득 차 있는 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러한 ‘해방’에로의 부르심은 더욱 큰 소리로 우리의 귓가를 울리고 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통의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 찬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귀(耳)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완화하고 통증을 가라앉혀 주는 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고통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고통들에 대해 응답할 때 비로소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그러한 부르심에 부응(副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고통들에 대해 응답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유용(有用)하게 사용되는 도구들이다.


“만일 어려운 가운데 있는 형제나 자매를 보고, 또한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형편이나 처지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등을 돌려대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산다. 우리는 일한다. 우리는 직업을 갖는다. 왜 직업을 갖는가? 다른 사람들의 삶의 질을 한층 높이기 위해서(upgrade)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궁핍한 사람과 함께 나누어 갖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높이고, 존귀하게 하며, 그들을 품위 있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들을 축복하는 사람들이다. 아니 우리는 복(福) 그 자체인 것이다. 공중에는 ‘부르심’(召命)들로 가득 차있다. 이 세상 안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모두가 대답해야 할 질문이 하나 남아 있다. 우리들 중 누가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시옵소서!”(사 6:8) 라고 대답할 것인가?

 

 

 


1) 오스 기니스,『소명: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길』(서울: IVP, 2006), p. 19에서 재인용.


2) 오스 기니스,『소명: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길』(서울: IVP, 2006), p. 21.


3) 월터 브루그만,『창세기: 목회자와 설교자를 위한 주석』강성열 역 (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2000).


4) 참조, 류호준,『아모스 주석: 시온에서 사자가 부르짖을 때』(서울: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01), pp. 211-12.


5)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N. Habel, "The Form and Significance of the Call Narratives," ZAW 77 (1965), pp. 297-323.


6) 예레미야의 선택과 소명에 관해서는, 류호준,『인간의 죄에 고뇌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서 묵상』(서울: 이레서원, 2006), pp. 35-49.


7) 류호준,『옛적 말씀에 닻을 내리고』(서울: 크리스천다이제스트, 1998), pp. 127-138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8) 예레미야의 고백에 관해서는 류호준,『인간의 죄에 고뇌하시는 하나님』pp. 85-98을 참조하시오.


9) 아래의 글은 필자의『뒤돌아서서 바라본 하나님』(서울: 이레서원, 2005), pp. 111-127(“공중에는 부르심이 가득 차 있습니다.”)에서 발췌 축소하여 실었다.


10) 반 게메렌,『예언서 연구』김의원 이명철 공역 (서울: 엠마오, 1993), pp. 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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