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저는 괜찮은 죄인인데요!”


누가 18:9-14



[성경본문]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설교전문]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바리새인 하면 신약성경에서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다른 쪽, 즉 잘못된 쪽에 서 있는 결과가 되어서 그렇지, 실제로 그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입니다. 달리 말해 좋은 의도로 시작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추한 사람들로 전락하게 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일세기 유대교의 여러 종파들 가운데 가장 신실하고 성실하게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이며, 무엇보다 기도의 꽃을 피웠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천추에 남는 수치스런 오명을 쓰게 된 것일까요? 오늘날 교회에서 누군가 ‘바리새인 같다’는 말을 하는 경우, 결코 찬사나 영예로운 칭찬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런 일이 오늘날에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어떻게 착한 사람들, 괜찮은 사람들이 끝에 가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등을 돌리고 그와 갈등을 빚게 됩니까? 오늘의 말씀은 복음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

 

일세기 예루살렘 지역에 집 한 채를 구입한다면, 아마 부동산 중개업자는 여러분에게 바리새인 가족이 사는 동네를 권할 것입니다. 그 동네에 집을 구입한다면 여러분도 틀림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범죄율은 아주 낮고, 큰 소리가 나는 일도 없을 뿐 더러, 학군도 꽤나 좋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주민들의 생활도 중상층 정도이니 살기에 좋은 동네입니다. 일요일이 되면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고 거리는 한산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장을 하고 교회당으로 가는 매우 종교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었고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신앙적인 문제에 헌신적이고 경건했으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언제나 법과 규칙을 잘 지켰습니다. 사실 그들이 싫어하는 법은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항상 법을 잘 지켜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법 준수에 관한한 너무도 성실하고 열정적이라서 남을 좀 판단하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정도야 어느 사회에서건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쨌거나 여러분이 바리새인을 이웃으로 삼아 집을 산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아마 창문에 커튼을 먼저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보기에 여러분의 집안 사정이 별로 내 놓을 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가정 예배를 드리는 대신에 늘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다던가, 부부간에 거룩한 대화를 나누는 대신에 소리를 지르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삶을 조명해보겠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따랐을 뿐 아니라 그에 덧붙여 여러 세대에 걸쳐 전수되어온 수많은 불문율들과 전통들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일명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신앙과 삶을 위한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권위들을 가리켜 ‘이중 토라’(Dual Torah)라고 불렀습니다. 즉 하나는 모세의 율법(토라, 가르침)이고 다른 하나는 예부터 내려온 전통과 인습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중 토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율법(토라)이 있고, 또한 상당한 분량의 성경바깥(extra biblical)의 율법들과 권고사항들(예, 탈무드)을 통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말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문구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되는 사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격언은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오래된 전통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법규들이나 격언들이나 권고들은 우리의 부모들이나 선생님들, 친구들이나 경제학 교수, 혹은 우리 시대의 사회적 규범에서 온 전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가르침과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나 가문이나 인습과 풍습에서 배워온 가르침을 함께 수용해서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이중 토라’(Dual Torah)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과 함께 좋은 사람이 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규율들이나 법규들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산다는 말입니다. 신앙적 구호로는 ‘오직 성경’이라고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성경외적’인 것을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흔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함께 우리들에게 지적하시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 말고 인간의 전통과 규범들은 성경을 귀담아 들으려는 노력에 중대한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예수님은 오늘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세금 징수 관리)였습니다. 단순히 개인 기도를 하러 간 것이 아니라 공(公) 예배를 드리러 갔단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혼자 꼿꼿하게 서있었습니다. 이 모습 하나가 실제로는 어떤 사실을 은연 중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착하고 올바른 사람 옆에 누가 감히 설 수 있겠습니까?

 

 

그가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아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한번 세상을 둘러보세요. 도둑놈들, 악을 행하는 인간들, 간음한 자들, 심지어 제 옆에 앉아 있는 이 추잡한 세리 같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인간들과 같이 않다는 사실에 대해 정말 감사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들을 경멸하고 무시했던 유일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리들은 모든 유대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료들과 동족들과 이웃들을 배신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땅을 식민지 통치를 하고 있던 로마인들과 내통하여 그러지 않아도 이미 지나친 세금에 덧 붙여 돈을 착취하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금이 과중하다고 불평이라고 하면 세무사찰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요즈음 말로 저인망식으로 평민들의 계좌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과도한 세금 부과로 평민들의 등을 휘게 한 장본인들이 당시의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원성은 하늘까지 닿았고 그들의 악명은 자자했습니다. 그들은 ‘토라’(율법)와 ‘장로들의 유전’(전통)을 모두를 범해가면서 자기 백성들을 탈취하고 착취하였습니다. 아주 뻔뻔스럽고 나쁜 인간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지금 성전에서 꼿꼿하게 서서 자기의 삶이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 같지 않았다는 것을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바리새인에 대해 좀 더 말하기 전에 먼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감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그나마도 똑바로 올바르게 살려고 애쓴 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 짓을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이 점에서 우리도 바리새인을 닮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실수를 합니다.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행을 일삼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언제 원수나 적들과 동조한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비열하고 치사한 인간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이런 점에 대해 깊이 감사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세리처럼 끔찍한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대로 ‘괜찮은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할 정도로 마음에 통증을 느끼지 않는 ‘괜찮은 죄인’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몹쓸 죄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차례 금식합니다. 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빠짐없이 드립니다.” 좋습니다. 여기서부터 상대방과 비교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도 여러분 역시 바리새인처럼 잘 해왔을 것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은 아니더라도 간혹 금식을 했을 것이고, 십일조도 잘 드렸지요? 마음에 뜨끔한 분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이런 일들은 잘 해왔다고 믿습니다. 종종 친절한 말과 격려의 말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행동도 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신실하게 응답하는 마음에서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생활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대놓고 자랑하거나 뽐내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마음의 장부’에는 다 기록하고 있을 것입니다. 핵심은 소극적으로 말해서 일주일 동안 끔직한 일을 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말해서는 여러분의 ‘이중 토라’에 따라 최선을 다해 일주일을 성실하게 보냈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준에 견주어 볼 때 여러분은 꽤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바리새인과 막상막하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괜찮은 사람입니다. 설령 기도할때마다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자신을 몹쓸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지는 않겠지요. 죄인이라는 명칭을 자신에게 붙여야한다면 ‘괜찮은 죄인’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세리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저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긍휼)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구차스런 변명은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가해자가 아니라 사실상 희생자였다는 식의 낡아빠진 변명도 읊조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보다 더 못된 세리들이 있다는 식의 무의미한 비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자신의 비유를 해석해 주셨습니다. “너는 옳아”, “너는 괜찮아” 라는 소리를 들은 것은 세리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눈에 보기에 옳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다.” “자기를 낮춘 사람은 높임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리새인에게 문제였단 말입니까? 예수님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신앙과 종교의 본질은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얼마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기독교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들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는 누구보다 더 도덕적이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과 종교의 근원에는 죄의 용서와 구원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도덕적 개선과 개량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장의사’(葬儀社)로 오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우리에게 염습(殮襲)을 하시고 장례식을 거행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낫다고 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해 감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오로지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감사합니다. 겸손하지 않고서는 자비를 구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 없을 만큼 괜찮은 죄인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노력을 통한 도덕적 개선뿐입니다. 오로지 ‘몹쓸 죄인’만이 하나님이 필요할 것이고, 구원자가 필요할 것이고, 죄의 용서가 절실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종교의 핵심입니다.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는데 왜 교회에 나옵니까?

 

 

     ․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이 세리처럼 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을

       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간청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 당신이 탕자일 때 하나님의 긍휼을 간청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삶이 엉망진창이 되고 형편없이 지저분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말고 달리 구할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죄가 그리 돋보이는 것이 아니고, 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교묘할 경우, 또 주위에 여러 사람들이 당신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신사적이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야 라고 믿을 때,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할 절실한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큰 죄인이 아닐 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한다는 것은 산을 옮겨 바다에 빠뜨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 종종 사람들이 마음이 얹잖아하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아마 내가 그분들을 아직 ‘덜된 죄인’이라 부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심한 죄인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 덜된 죄인, 좋게 말해서 괜찮은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좀 마음에 얹잖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분 나빠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몹쓸 죄인’들이라는 것은 나타냅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죄들에 대해서마저도 높은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중 토라’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의 요점이 바리새인이 세리들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거니와 상대적으로 말해, 바리새인들은 자비가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꽤나 괜찮은 사람들, 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롭다 칭함을 받는 관계, ‘괜찮아’ 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듣는 관계)에 서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적으로 괜찮은 사람이, 즉 교인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괜찮은 죄인’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로 해야 하는 일은 ‘이중 토라들’(이중 잣대)에 대해 잊으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찾는 일에 있어서 두 개의 권위들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수받은 규칙들의 전통들은 결코 규칙 준행자를 하나님의 자비에게로 인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삶으로는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는 세련된 삶을 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생명의 주님, 구원의 주님이신 하나님께로 인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만이 우리를 그의 아버지에게로, 우리의 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받는다는 사실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몹쓸 죄인’이 ‘용서받은 죄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행한 그 모든 놀라운 일들이 있은 후에도, 여러분이 드린 모든 희생들과 수고들과 열심히 산 노력들이 있은 후에도, 여러분이 한 모든 좋은 선택들과 결정들이 있은 후에도, 그런 것들은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만이 할 수 있는 것, 즉 죄의 용서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죄들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에게 착함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그들은 십의 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늙으신 부모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 그렇습니다. 그들은 간음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으로 향락과

      탐색을 품었습니다.

    ․ 그렇습니다. 그들은 친절은 보여주었지만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

      없는 친절은 그들을 위선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마음 속 갚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근심과 고민을 터치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규칙들과 율법들은 잘 따라 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언제라도 우리는 율법들과 규율들을 깨뜨린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범하고 율법의 정신도 짓밟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심하게 판단하는 심판자이면서도 자신에게는 가장 혹독한 심판을 항상 유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의 유보 행위가 결국 우리 자신들을 위한 가장 혹독한 심판과 판단을 쌓아놓고 있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용서하심,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즉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괜찮아!’하는 위대한 구원을 선물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는 것이지 결코 버는 것이 아닙니다. 거지처럼 그분의 자비 앞에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선함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지금 즈음이면 다 배우지 않았습니까?

 

 

구약의 예언자 가운데 미가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노래하는 ‘하나님의 은혜 송가’를 들어보십시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미가 7:18-20)

 

 

정말로 충분히 좋은 생명을 찾는 유일한 길은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찬의 식탁으로 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세리로 바리새인으로, 탕자로 혹은 큰 형으로, 혹은 숨겨진 죄와 교묘한 죄를 짓는 사람으로 이 식탁으로 나옵니다. 어떤 모습과 어떤 상태로 오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식탁에 오는 유일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찾기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그분의 유일한 참 좋은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삼기 위해 이 식탁에 나옵니다. 요한 칼빈이 말씀했듯이 ‘기적적인 교환’이 이 식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죄들을 가져 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그분의 ‘괜찮아!’를 선물로 받습니다. 우리는 낮아져서 왔습니다만 떠날 때는 높이 들림을 받고 갑니다.

 

 

성찬의 트레이가 돌려지면 여러분은 빵 조각 하나를 집어 듭니다. 여러분의 손이 거의 떨리지 않는다면, 아직 여러분은 얼마나 절실하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필요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식탁에서 여러분에게 주려고 하는 것 모두입니다. 아멘.

 

설교 후 찬송: ‘인애하신 구세주여“(279장)

 

[2009년 6월 14일, 무지개 교회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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