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하찮은 것을 추구하는 삶”
마태 6:25-34


[성경본문]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설교전문]

[오늘은 성찰(省察)의 기간인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면을 돌아보고 진정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하는지, 순례의 길에서 어떤 것들을 떨쳐 버리고 가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10절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구절에 속합니다. 원래 이 구절은 시(詩)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시적 향기가 한글 번역 성경에도 물씬 풍깁니다.


이 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시적 감수성과 사물의 현상을 넘어서 그 뒤에 있는 실체를 내다 볼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우리의 가장 취약적인 부분을 어떻게 터치하실 줄 아는 분이십니다.


예수는 소박하고 단순한 어조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를 돌보고 계신다.
   · 걱정하지 말고 여유를 갖고 지내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태 6:25)


걱정 없는 삶이 가능한가?

그런데 걱정 근심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글쎄요.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죄짐 맡은 우리 구주”(369장)가 있습니다. 그 찬송은 두 번에 걸쳐 질문을 던집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이 누군가?”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대답은 “없습니다!” 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걱정 없는 삶이 가능할까요? 걱정 근심 없는 삶을 상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삶입니까? 아직도 이곳은 꽃 샘 추위와 침울한 경제 한파로 움츠리고 있는데 태양으로 가득한 남국의 멋진 섬에서 한없이 휴가를 즐긴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걱정하고 염려한지가 최근에 언제였던가? 5분전이었습니까? 10분전이었습니까? 아니면 오늘 아침 교회 오시기 전이었습니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설교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너무 모르고 하시는 말씀같이 들립니다.


예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던가요?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다”, “꽃들보다 더 우리를 보살피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어 보십시오.


“들의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안 하고 길쌈도 안 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찬란함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오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는 두 가지 생각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한 생각은, “정말 그랬으면 오죽 좋겠어!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서는, “틀림없이 맞는 말일거야. 사실일 것이야.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잖아!”라고 합니다. 두 가지 음성 사이에서 우리는 갈팡질팡합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헷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금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삶을 하나님의 손안에 맡기라. 그분 발아래 내려놓으라. 그러면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질병이나 죽음도 하나님께서 통제하신다는 확신만 있다면 두려움 없이 직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씀’을 신뢰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분을 진짜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질적 문제입니다.


영국의 소설가 애니 시지윅(Anne Douglas Sedgwick, 1873-1935)이 나이 60대가 되었을 때 그녀의 한 친구에게 이런 글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설상가상으로 몸이 너무 야위고 힘들어졌어. 눕지 않는 이상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어. 앉았다 일어서려고 하면 갈비뼈가 무너지는 것 같아. 그런데 앉아야만 죽 같은 음식을 삼킬 수 있으니, 정말 고통이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산다는 것이 투쟁이고 고통의 연속이야.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삶은 결국 내 삶이고, 살아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지. 삶은 아름다운 것이야. 하나님의 손안에 의지하여 기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내 속에 한없는 기쁨이 있어.”


그녀는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걱정과 염려로 고통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염려와 걱정은 우리의 삶을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 내어맡기지 않을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처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라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만이 걱정과 근심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진심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실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하나님께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항복하거나 복종하면, 그 다음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실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우리를 다루실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진심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대로 실행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하고 약속하는 전적 헌신과 복종이 종종 절반만의 성공으로 끝납니다. 전적으로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 “주님, 나의 심장을 주님께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라고 밥 먹듯이 되 뇌이면서도 실제로는 심장은 말할 것도 없고, 시간도 드리지 못하는 형편이 아닙니까?


‘반쪽짜리 마음’, ‘갈라진 헌신’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것입니다. 마음 한쪽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라고 기도하지만, 다른 한쪽 마음은 내일과 모레와 장래를 걱정하고, “나의 뜻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치 그네를 타듯이 뒤로 갔다 앞으로 갔다 합니다. 신뢰와 두려움 사이를, 신뢰와 걱정 사이를 오가는 것입니다.


걱정 없는 삶의 비밀

그렇다면 걱정 없는 삶의 비밀은 무엇일까? 비밀의 열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신 목적에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상한 목적 안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義)를 추구하고 찾는 일입니다. 일단 이렇게 하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를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 일번에 놓으면, 필요한 모든 것들이 덧붙여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신경을 쓰지 말라”는 명구(!) 말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것을 가리켜 “무관심의 원리” “무신경의 원리”(the principle of inattention)라 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일들이나 어떤 것들은 오히려 신경을 쓰지 않을 때 부수적으로 따라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것들을 얻으려고 온통 신경을 다 쏟다보면 오히려 그것들이 오다가도 떠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 창조적이 되려고 무던히 애를 써 보십시오. 그러나 그런 사람치고 
     창조적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 그러나 창조적이 되겠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그저 최선을 다하다보면 
     당신이 얼마나 창조적이고 오리지널하다는 사실에 놀라기까지 합니다. 
     “어, 내가 이렇게 오리지널했던가?” “오, 나도 괜찮은데!” 하고 
     놀랍니다. 이것이 ‘무신경의 원리’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한번 행복해지려고 애써 보십시오. “행복해져야지” 하고 행복에 대해 집중하면 할수록, 내가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사실을 발견할 뿐입니다. 행복을 생각하면 할수록 비참한 것만 더욱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비참해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해보십시오. 아내든지 자녀든지 누구든지 사랑해보십시오. 그러면 행복은 어느새 조용히 찾아와 여러분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경험해본 일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온통 집중하다보면 놀랍게도 뿌듯함과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기치 않은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찾고 추구하지도 않았던 기쁨이 하나님의 선물처럼, 은혜의 선물처럼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 “잘못된 것에 집중해 보라 그러면 걱정하다 병들게 될 것이다.”
   · “옳은 것에 집중해 보라. 그러면 예상치 않게 다른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뒤따라 올 것이다.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의 뜻에 올인 해보라. 그러면 다른 것들이 보너스처럼 더해져 
     여러분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 이것이 ‘예상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이라는 것입니다.


하찮은 것을 추구하는 시대

1. “시시 꼴꼴 게임”

미국에서 가족끼리 하는 게임가운데 ‘하찮은 것을 찾아서’(Trivial Pursuit)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시시 꼴꼴 게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질문 게임입니다. 카드를 한 장을 집어 들면 그 안에 질문이 있습니다. 정답을 대면 그 상으로 또 다른 질문을 풀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해 답을 맞히면 판을 한 바퀴 돌아 이기는 게임입니다. 마치 윷판에 말을 두고 질문에 답을 맞히면 최종점까지 가서 이기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질문은 하나같이 다 대수롭지 않은 시시 꼴꼴한 문제들입니다. 지리나 역사, 연예계 역사 예술 문학, 과학 자연 스포츠 등에 관한 하찮은 질문들입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대통령이 좋아했던 노래는? (첫사랑)
   ․한국 프로야구 원년의 우승팀은? (OB 베어스, 1982년)
   ․여우(女優) 김지미와 결혼했던 남자 가수 이름은? (나훈아)
   ․꽃 이름 중 목단을 다른 말로는? (모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아랍에미리트의 버즈 두바이)
   ․히틀러가 좋아했던 음료수는? (코카콜라)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 5가지 중 하나라도 대라.
        하늘의 별 따기 / 불교승려 머리에 삔 꽂기 / 60대 남편 사랑하기
        결혼한 아들 아들로 찾아오기


이런 게임은 우리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사인(sign)입니다. 가볍고 사소하고 하찮은 것을 추구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추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목하여 말씀하고 있는 사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마치 ‘시시 꼴꼴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사소하고, 하찮은 것, 궁극적으로 허무한 것, 의미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 있는 유일한 추구가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2. “꽈이 강의 다리”

혹시 "꽈이 강의 다리"(Bridge Over the River Kwai)라는 영화를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실제로 꽈이 강의 다리는 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다리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 1만 6000여 명과 아시아인 강제 노동자 4만 9000여 명을 투입해 건설한 철교(鐵橋)입니다. 열악한 환경과 고된 노동, 영양실조, 구타 등으로 엄청난 수의 사망자가 발생해 ‘죽음의 다리’라고도 불립니다. 이 영화에서 알렉 기네스(Alec Guinness)가 일본의 전쟁포로로 잡혀 있는 영국군 장교로 출연합니다. 함께 잡혀 있는 부하 사병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그는 철교를 놓는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적국인 일본군을 위해 철도 다리를 꽈이 강에 건설하는 일입니다. 그는 그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려고 했던 이유는 미래가 없는 포로들이 되어 있는 자기의 부하들에게 ‘목적의식’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영국 군인들은 다리를 놓는 공사를 통해 목적의식을 갖고 되고 연대감과 사기도 유지하게 됩니다. 그들은 매우 튼튼한 철교를 짓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그 다리를 폭파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투입하게 됩니다. 그 영국 장교는 자기와 그의 부하들이 그렇게도 애써서 만든 다리를 연합군 특수부대가 파괴하려고 하자 분노했습니다. 영화 가운데 마침내 긴박하고 냉정한 순간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 영국 장교가 지금까지 그가 해온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마침내 인식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그때 그가 이렇게 외칩니다. “맙소사, 오 하나님,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까?”


그는 하찮은 것을 추구하느라 너무 바빴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 가치 있는 것에 대해 눈이 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적군을 위해 다리를 놓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튼튼한 철교를 말입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항상 이런 일을 합니다. 우리들도 항상 이런 일을 합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을 추구하느라 너무 바쁩니다. 그러다보니 삶에 있어서 의미 있는 것, 가치 있는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원수와 적군을 위해 일하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아아 슬프고 원통하도다!


3. “파우스투스 박사”

영국 작가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 1564-1593)의 대표적인 희곡인 ‘파우스투스 박사의 비극적 이야기’(Dr. Faustus)가 있습니다. 파우스투스는 신학박사로서 연구와 학문 성취에 몰입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늘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마침내 마법을 구하여 사탄과 협상하여 계약을 맺습니다. 계약 내용은 이렇습니다. 파우스투스는 25년간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허락받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 자기의 영혼을 사탄에게 내어주어야 하는 계약이었습니다.


모든 권력을 다 받아 쥔 파우스투스가 한일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 세계 각지를 여행합니다.
   · 철이 아닌데도 포도를 만들어 먹습니다.
   · 당시 최상의 권력을 누리던 교황을 마음대로 갖고 놉니다.
   · 트로이의 절세미녀 헬렌과 잠자리에 듭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다 합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 그는 자기의 영혼을 사탄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계약기간이 경과하여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자기의 실패를 깨닫고, 사탄의 손 안에 있는 목숨의 종언을 비통하게 부르짖으면서 자취를 감춥니다. 자신의 영혼을 사소하고 하찮은 것과 바꾼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파우스투스가 권력과 힘을 가지고 한 것입니다. 그는 ‘하찮은 것을 추구하는’ 게임을 한 것입니다.


4. “아브라함과 롯”

요한 파우스투스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성경의 인물이 있습니다. 롯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 간에 다툼과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 갈라서기로 결심합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합니다. “네가 왼쪽을 선택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 성경의 화자(話者)는 그 다음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롯이 둘러보니 요단강 초원은 사방에 물이 풍부하여 마치 여호와의 정원과 같았다. … 그래서 롯은 자신을 위해 요단 강 평원 지대를 선택하였다”(창 13:9이하)


아브라함도 요단강 평야 지대가 여호와의 정원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롯에서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물론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함으로써, 아브라함은 이렇게 큰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 요단 강 평야 지대에 사느니 네게브 사막에서 목자로 있겠다. 
   ․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 전체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다리지 당장을 위해서 그 땅의 제일 좋은 일부분만을 
      움켜잡지는 않겠다.
   ․ 요단 평야 계곡과 같은 하찮은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인도, 통치)를 추구하겠다.


마태 6장의 예수님의 말씀들 안에는 쓰디쓴 유머가 들어있습니다. 쓰디쓴 유머란 우리의 삶속에 어떤 일들은 그것을 잡으려고 따라간다고 해도 결코 잡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겸손해지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겸손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겸손을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겸손을 꿈꾸고 명상하는 일은 자만과 교만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진짜 겸손한 사람들은 절대로 겸손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신없이 바쁩니다.


여러분이 따라가서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잡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에서 점점 멀리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나 입을 의복은 잡으려고 찾아나서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얻으려고 나서면 나설수록 더 많은 근심과 걱정이 따라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라

추구해야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근심 걱정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하늘의 새처럼 거침없이 창공을 비상하면서 살기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될 수 있는 단 한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유일한 왕이시고, 그 안에서 그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삶,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분의 다스림을 우리의 삶 속에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운 것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하나님의 생각에 밀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인도와 다스림)를 덜 찾으시면

   ․ 여러분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더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이며, 
   ․ 여러분의 삶은 중심부에서 더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이며
   ․ 여러분의 추구는 더욱더 하찮고 시시 꼴꼴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길이 무엇인가? 어떻게 찾고 어떻게 추구한단 말인가? 설교를 통해서, 설교를 듣는 일을 통해서, 성경을 읽는 일을 통해서, 찬송하는 일을 통해서, 묵상과 명상을 통해서 마음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의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말씀(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기초이시며 머릿돌이시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가장 효과적인 유혹이 무엇입니까? 그 어느 것 보다 여러분의 힘을 빼어놓은 유혹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마귀의 불가사의하고 기분 나쁜 능력입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삶의 진짜 목표를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는 불가사의하고 기분 나쁜 능력입니다.
   ․하찮고 시시한 것들을 뒤쫓게 하는 불가사의하고 기분 나쁜 능력입니다.


이런 유혹에 빠져들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다. 하나님 나라 먼저! 먼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다스림에 우리의 삶을 내어 맡기십시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걱정하고 염려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놀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예기치 않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선물로 주어지는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입니다. 이런 경험들이 선물로 여러분에게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2009년 3월 29일, 5번째 사순절 주일, 무지개 교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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