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비 내리는 오늘 오후 동네 의원에 갔다. 3개월마다 처방 받는 약을 타러 가기 위해서였다. 의원에는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중년의 아주머니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들, 콜록대는 십대 소녀, 칭얼거리는 어린애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 등이 무심한 얼굴로 대기자 모니터를 보고 있다. 내 옆 아주머니는 아마 링거를 맞으려는 모양이다. 그 가운데 나도 자리를 잡고 벽면에 걸려 있는 모니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진료실 문이 열리더니 중후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진료를 마치고 나오신다. 나오시더니 내 앞쪽 긴 의자에 털썩 앉으신다. 거기엔 비슷한 연배의 다른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보아하니 서로 알지는 못하는 사이 같았다. 그러나 나이 들면 누구하고도 말을 쉽게 건네지 않는가. 급속히 만든 즉석 친구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신다. 즉석 친구 할아버지는 초췌해 보였고 말도 어눌하신 듯 했다. 한편 진료실에서 나온 할아버지는 얼굴을 보아하니 배움이 있고 좀 괜찮게 사시는 어르신 같았다. 바지 차림에 티셔츠를 입으셨고 중절모에 지팡이까지 옆에 끼고 계신 것으로 봐서 한때는 잘 나가셨던 분 같았다. 어깨 너머로 나는 그 노인이 즉석 친구 할아버지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큰 병원에 가야하는데 의사 소견서가 필요하다고해서 이곳 의원에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푸념 섞인 어투로 신세 한탄을 하신다. “여보슈, 지금 내 나이가 90이 다 되어 가는데..”라며. 약간은 부풀린 나이 같았다. 그 연세는 아닌 것 같고 80대 중반 정도 같았다. 어쨌든 자기 푸념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힘을 얻은 할아버지가 즉석 친구 노인에게 “그런데 말이요. 우리 마누라가 몸이 불편해서 침대에 누워 있은 지 여러 해 되.” “그래서 내가 부엌살림을 다해야 해. 마누라 세끼 식사를 매일 다 준비해야하는데 여간 힘든 일이 아니야.” 얼굴을 보니 지금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 여간 고단한 듯 보였다. 잠시 벽면의 모니터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 쉰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러자 즉석 친구 할아버지가 말씀한다. “아니, 그러지 말고 요양보호사를 불러요. 요즘 그거 잘되어 있던데” “그것을 왜 안 해 봤겠소. 돈을 주고 요양보호사를 썼었지. 근데 너무 불편한 거야.” “뭐가요?” “생각해 보슈, 요양보호사 아주머니가 집에 오면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 내 나이가 90이 다 되었는데도. 내 집인데도 좌불안석이야. 편하게 난닝구 바람으로도 못 있겠고, 그렇다고 아주머니가 있는데 거실에 앉아 있을 수도 없고, 너무 불편해서 더 이상 오지 말라 했지.” 한숨을 내쉬신다. 다시 벽면에 걸려 있는 대기자 명단을 쳐다보신다. 사실 쳐다보는 게 아니었다. 다시 말씀하신다. “누워 있는 할망구 수발을 하려니 여간 힘이 달리는 것이 아냐.” 그 사이 즉석 친구는 진료순서라고 해서 이미 진료실에 들어간 후였다. 대화가 아니라 독백하신 셈이다. 상대가 없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뚫어지게 바라본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어둔 그림자가 그 얼굴의 주름만큼이나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둠 컴컴한 부엌에서 난감해 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내 눈 앞에 유령처럼 오락가락 하는 이 밤이다. 길의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삶의 색조가 오늘따라 어둡게 다가온다. 할머니 옆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 부부의 연. 깊은 밤. 그래도 어김없이 내일은 또 오겠지. 공무도하(公無渡河),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Sunset at Lake Michigan, Credit Joe Simmons

Joe Simmon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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