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구약에서 말하는 정의란?”

-아모스서의 열방심판신탁(1:2-2:16)을 중심으로-

 

류호준 목사(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장, 구약학)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이 있다면 뭘까? 여러 후보 덕목들 가운데 최다 득표의 영광을 누릴 덕이 있다면 정의”(justice)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최근까지도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책이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었다. 아마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한국사회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정치계를 비롯하여 사법계와 문화계와 교육계와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부정과 부패를 근심하는 탄성들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사실을 말하자면 에덴의 동편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류는 늘 부정과 부패와 폭력과 압제와 학대와 착취의 악순환이라는 불의의 늪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피조세계는 인간의 죄의 폭력성으로 인해 더러워졌다. 에덴동산은 거룩한 성소였다. 아담과 하와는 제사장적 커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성소를 더럽혔다. 거룩한 것을 더럽힘(不淨)으로써 그들 역시 부정하게 되었고 성소, 곧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추방당한 것이다.

 

불안정한 떠돌이 생활하기 시작함으로부터 인류는 역설적으로 인간(아담)의 본질인 땅(아다마)에 정착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왔다. 특별히 자기들만 땅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자기만의 삶의 공간”(lebensraum)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영토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영토 확장이란 땅따먹기에 몰입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에서 정의는 실종하게 된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정의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토대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가 있어야할 곳에 있도록 하셨다. 바다는 바다에, 땅은 땅에, 하늘은 하늘에, 별과 달과 태양은 하늘에, 눈과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도록 하였고, 시내와 강은 그들이 있어야할 자리에 있도록 하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서로 간의 사이가 좋은 상태에 있게 된다. 모든 것들에 제자리에 있을 때만이 사이가 좋은 것이고 이렇게 될 때만이 진정한 샬롬의 상태이다. 역으로 이야기 하자면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지키면서 서로의 사이가 좋은 상태를 가리켜 정의로운 상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정의는 창조세계의 근간이며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유지되는 근본적 토대이다.

 

 

정의(正義)의 다양한 측면들

 

 

정의가 구현되고 실현되는 장으로서 창조세계 안에는 다양한 삶의 정황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사법부에서의 정의, 가정에서의 정의, 직장과 일터에서의 정의, 학교에서의 정의, 결혼에서의 정의, 상업적 거래에서의 정의, 교통법규에서의 정의, 종교생활에서의 정의, 예배에서의 정의, 인간관계에서의 정의, 국가들 사이의 정의, 인종간의 정의, 생태계 안에서의 정의 등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인간 삶의 영역을 염두에 둘 때 정의의 의미론(semantics of Justice)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따라서 정의라는 단어는 의로움”, “확실함”, “신실함”, “올바름”, “공평함”, “온전함”, “완전함”, “”, “규례등과 같은 용어들과 의미의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물론 정의의 반대개념으로 불의를 들 수 있으며 이 용어 역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의미로 서로 다르게 이해될 것이다.

 

사실상 정의는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개념으로 도처에 사용되고 있다. 역사서, 율법, 예언서, 지혜문헌, 시편 등에서 정의는 중심주제어이기도 하다. 물론 히브리인들은 정의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이 말은 그들이 정의에 대한 일정한 개념정립을 하지 못하는 열등한 사람들이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 삶의 다양한 측면들 안에서 정의가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 그리고 정의가 어떻게 파괴되는가를 이야기함으로써 정의에 대해 말한다. 크니림 교수는 정의가 위치하고 있는 구체적 삶의 정황들을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구약성서의 정의(justice)에 대한 해석은 본문들 안에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다양한 측면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그러한 사실적인 묘사들이나 적용들이 의존하고 있는 개념상의 전제 조건들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서, 율법, 예언서, 지혜문헌, 시편 등과 같은 구약의 모든 문헌들이 정의의 문제를 중심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정의가 인간의 삶의 다양한 국면들과 측면들을 묶어주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다양성은 이스라엘의 삶의 어떠한 영역도 정의에 대한 관심사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으며, 야웨께서는 그 모든 삶의 영역들에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 마디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통치권)을 강조하고 있다는 말이며, 이 사실은 정의가 하나님의 선한 피조세계의 골격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정의는 피조세계가 서 있는 기초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세상을 다스리는 핵심도구이다. 정의가 없으면 이 세상은 무너지고 붕괴된다.

 

존 스택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만들어가야 할, 도덕적으로 훈련된 정의로운 사회질서에 대해 강조하면서 언약규정들의 요구사항들을 14가지로 요약한다. (1) 모든 사람과 사람의 재산을 보호되어야한다. (2) 누구든지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 (3) 누구든지 중상(中傷)과 거짓된 고소로부터 보호되어야한다. (4) 누구든지 자유롭게 법정을 이용할 수 있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한이 있다. (5) 모든 사람은 땅의 소산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6) 모든 사람, 아주 하찮은 사람이나 객이나 나그네라 할지라도 야웨의 안식일에 함께 쉼을 나누어야 한다. (7) 모든 이스라엘인의 존엄성 그리고 하나님의 자유인과 종으로서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하고 보호되어야 한다. (8)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인들의 모든 유산들은 보호되어야 한다. (9) 어떤 여자도 사회에서 종속적 신분으로서 불이익을 당할 수 없다. (10) 어떠한 불구자, 가난한 자, 연약한 자라도 억압받거나 착취당할 수 없다. (11) 그 누구도 심지어 왕일지라도 법 위에 존재할 수 없다. (12) 모든 사람은 사회 구조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리를 존중해야 한다. (13) 잘못한 죄의 벌은 범죄자의 인간성을 박탈할 정도로 과해서는 안 된다. (14) 다른 창조물의 보호에 대한 관심은 동물 세계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한편 롤프 크니림은 구약성서의 지평에서 보는 정의의 다양한 측면들을 16가지로 말한다. (1) 행복의 근거로서의 정의로운 삶; (2) 이스라엘의 약한 자들을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으로서의 정의; (3)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다른 이들에 의한 압제로부터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행동으로서의 정의와 다른 이들에 대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압제 행동으로서의 정의; (4)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공격하는 민족들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정의; (5) 해방된 자들의 정신세계와 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의; (6) 이스라엘의 반역과 압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정의; (7) 하나님의 죄 용서를 통한 정치적인 해방으로서의 정의; (8)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정의; (9) 전쟁과 평화로서의 정의; (10) 계층화된 사회에서의 사회 정의; (11) 혈통이나 족보의 연결을 통한 정의와 개개인의 책임성에 기초한 정의; (12) 심판으로서의 정의와 사면으로서의 정의; (13) 죄 용서로서의 정의; (14) 세계질서와 생태학적인 질서로서의 정의; (15) 경험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정의와 감추어진 정의; (16) 종말론적인 정의.

 

 

열방심판신탁

 

 

예측하다시피 구약의 문헌들 가운데 정의를 긴급한 신학적 문제로 다루고 있는 문헌이 예언서이다. 예언서는 이상에서 크니림이 열거한 정의의 다양한 측면들(Sitz im Leben)을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지만, 구약의 다른 문헌들과는 달리 정의의 독특한 정황을 담고 있다. 위에서 여덟 번째로 열거한 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일명 열방심판신탁(Oracles against the Nations = OAN)이다.

 

열방심판신탁이라는 독특한 장르는 거의 대부분의 예언서들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대표적인 본문이 아모스서의 열국심판신탁이다. 다른 예언서와는 달리 아모스서에는 열국심판신탁으로 서두를 열고 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먼저 표호 하는 사자 야웨로 표상된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을 향해 선언된다. 모두 8개 나라가 거명되는데 (1) 시리아신탁; (2) 블레셋 신탁; (3) 두로 신탁; (4) 에돔 신탁; (5) 모압 신탁; (6) 암몬 신탁; (7) 유다 신탁; (8) 이스라엘 신탁이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 마지막 이스라엘을 표적 삼아 서서히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나간다.

 

우리의 관심사는 세상의 통치자인 야웨 하나님께서 세상의 민족들을 어떤 정의(正義)의 척도로 다스리시는가 하는 질문이다. 열국심판신탁은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다루시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유다와 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머지 이방 나라들의 죄의 목록에서도 분명히 보여 주듯이, 그들의 죄들은 소위 이스라엘과 유다가 알고 있는 언약 파기의 죄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정죄하고 있는 기준과 잣대는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준 언약 규정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언약의 하나님 야웨로 관계를 맺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행위가 범죄라는 것을 규정할 근거나 판단 기준은 무엇이겠는가? 이 질문은 아모스서의 전체적 주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좀 더 나아가서 구약 신학의 중심주제와도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주제란 다름 아닌 정의에 관한 것이다.

 

열국심판신탁에 등장하는 이방 나라들의 죄악들은 단순히 유다와 이스라엘을 위한 언약의 책에 규정된 언약 파기의 범죄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좁은 의미에서의 종교적인 죄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 안에서 규정된 언약들을 파기한 죄들이 아니었다. 열국심판신탁 속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방 나라들의 범죄들은 보편적인 인간 역사나 국가 간의 관계 안에서 발생한 일반적 범죄들이다.

 

그들의 범죄행위들은 정상적인 인간 사회의 규범에 비추어 볼 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약한 국가를 압제하고 폭력으로 그 국토를 탈취하는 비열한 행위들, 전쟁포로들을 다른 국가에 매매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들, 전쟁에서도 일정한 규범과 법칙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인하게 살상하는 야만적인 행위, 전쟁 시에 무고한 여인들을 살상하고 유린하는 잔혹한 행위, 죽은 자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적인 행위 등이 그것들이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

 

 

왜 아모스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질타하는 그의 선포 속에 이방 나라들의 죄악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일까? 유다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죄를 질타하고 심판을 선언하는 하나님이(2:4-9:10) 이방 나라들을 질책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과(1:3-2:3)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정의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시려는 강한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피조물로 지음 받은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비인간적인 취급의 대상이 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며, 하나님의 법칙인 정의에 의해 인간사의 놀이가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조질서의 입법자이시며 진행자이시며 인간사의 판단자인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정의라고 불리는 세계질서 규범으로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이 법칙에서 제외될 특권층이나 나라들은 없을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서 공평하고도 정당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모스서에서 말하는 정의는 무엇인가? 단순히 인간사회에서 발생하는 부정과 부패에 대한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풍성하고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를 사회학적 의미의 정의로 축소시키는 것이거나 아니면 정의의 한 단면으로 환원시키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정의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질서를 운영하시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정의는 창조질서의 근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모스서가 제시하려는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과 유다에만 속해 있는 민족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구원자이기 이전에 우주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관자라는 선언이다.

정의라고 불리는 창조의 규범 속에는 모든 나라들이 - 언약 백성과 비 언약 백성 사이의 차별은 없어진다.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응답해야 할 존재론적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의 눈길 속에서 제외될 영역들은 아무것도 없다. 소위 세속의 역사라고 불리는 일들마저도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림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이 예언자의 가르침이며, 하나님은 그의 우주 통치의 원리인 정의로 이 세상을 다스리실 것이라는 것이 아모스의 선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통치와 정의

 

 

적어도 지금까지 아모스는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을 하나씩 거명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전형적 범죄들을 지적하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선언하였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열국 심판 신탁의 신학적 중요성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열국 심판 신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왜 하나님은 이방나라들의 행동들에 관심을 가지시는가? 지적한 죄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언급된 죄들을 포괄할 수 있는 범주가 있는가? 그런 범죄들은 종교적 죄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어떤 특정한 종류의 죄들은 다른 종류의 죄들보다 더욱 심각하게 취급되는가? 나라들 간의 국제법 파기와 하나님은 무슨 관계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상당한 양의 또 다른 지면을 할애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다음과 같이 문제를 종합하여 그에 대한 잠정적인 대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전 세계적 통치사상이다. 열국 심판 신탁,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알려진 유다와 이스라엘을 제외한 열국 심판 신탁(여섯 나라: 시리아, 블레셋, 페니키아, 에돔, 암몬, 모압)의 저변에는 만국의 주권자로서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 나라들의 역사를 점검하시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신학적 선언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백성들에게만 주권자가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그분이 천지만물의 창조자라면 그분의 다스리심과 통치의 영역은 전 세계적이며 우주적이다.

 

()과 속()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별하는 일에 대해 성경은 하는 바가 없다. 세상의 그 어떤 신들이나 강력한 나라들도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 앞에 견딜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신앙이 강력하게 보여주는 메시지가 아니던가! 열국의 신들, 그것이 메소포타미아든, 이집트든, 혹은 가나안의 신들이든, 그 어떤 신들보다 위대하고 장엄한 신이 없다는 선언이 구약성서의 중심적 사상이지 않은가! 말씀 한 마디로 온 세상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 메소포타미아의 신들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하나님, 애굽의 신들을 무력화시키고 그곳의 잔혹한 권력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던 하나님,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를 부끄럽게 하셨던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토에만 국한되어 있는 민족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선지자 요나는 이 사실을 얼마나 힘들여 값비싸게 배웠던가!).

 

역사의 주재이시며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정의와 공의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운행해 나가신다. 그분에게는 사사로운 민족주의나, 배타적 인종주의나, 편협한 선택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오직 그분의 정의(justice)와 의로움(righteousness)만이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원리요, 인간 삶의 질을 구성하는 기본적 규범이다. 하나님의 창조규범으로서 이러한 공의와 정의가 실현될 때 하나님의 창조세계에는 - 인류역사와 민족과 개인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 - 비로소 하나님의 샬롬이 찾아들 것이다.

 

둘째로, 악이란 단순히 좁은 의미에서 종교적이거나 개인적인 성격을 지닌 것만이 아니다. 열국 심판 신탁이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 개인만이 악을 저지르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들의 정책과 기관들도 악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소위 구조악”(構造惡, structural evil)이라 불리는 것들은 우리가 타락한 세계 안에 살고 있다는 가현적인 증거물이다. 악의 세력은 단순히 한 개인의 성향, 예를 들어 미묘할 뿐만 아니라, 분별해 내기 어려울 정도의 위장(僞裝)을 통하여 인간 삶 속에, 사회의 구조와 국가의 기관들 속에 깊이 침투하여 들어와 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향한 조직적인 학대나 비인간적인 처우, 부정과 부패로 찌든 국가 기관들, 선진국 안에 편만한 황금만능주의, 독재 권력의 횡포, 성도덕의 타락, 집단적 이기주의의 발흥, 인간의 맹목적인 이익추구에 황폐화되어가는 자연생태계, 우리 사회에 편만한 계급주의나 성차별주의, 국가 간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주의, 인간 삶을 오직 경제적인 측면으로만 환원시키려는 시장 경제주의의 단견, 인간을 오직 노동력을 착취하는 잔인성, 정신적 신체적 고문과 같은 인권 유린, 정신적 폭력,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인종말살 정책, 매스미디어에 의한 인격살해,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주권침해와 경제적 유린, 한 문화의 다른 문화에 대한 문화적 우월주의와 가치관의 강요 등등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띤 채 하나님의 통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우리는 이미 인류역사의 관찰을 통해 이러한 악들이 잔인한 순환을 계속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좁은 의미에서 종교적 문제로만 - 예를 들어, 성수주일, 십일조와 같은 문제 - 국한시키거나 축소시키려는 신학적 사시(斜視)라는 병으로부터 치유 받아야 할 것이다. 아직은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이 세상이 보여주는 세계관, 죄로 오염되어 있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은연중 강요하는 도덕관에 대항하여 우리는 성서의 세계관, 도덕과 가치를 담대하게 선포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는 무리들이다. 이 세상 나라들을 항해 제사장의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던가! 이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하는 자들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우주적 다스림을 종교적 측면으로만 환원시키려는 것은,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면 무지에서 기인된 것이든 상관없이, 성서의 하나님을 정당하게 취급하는 일이 아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은 임의적이거나 일시적이지 않다는 것이 열국 심판 신탁이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열국이 범한 첫 번째 죄악에 대해 아무런 인내나 기다림 없이 심판을 집행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죄악이 충만하게 성숙할 때까지, 아니 역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그러한 죄악들로부터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열국심판이 보여주는 바는, 그들이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면서 반복적으로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들의 세 가지, 네 가지 죄들을 인하여라는 문구가 암시하듯이, 반복되는 죄의 습관과 행위들에 대해 하나님은 더 이상 인내하거나 기다리실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의 정원”(Garden,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 전체)이 부정한 행위들로 더럽혀지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마지막으로, 인간 삶의 모든 측면과 차원에 깊은 관심을 지니신 하나님은 특별히 약한 자, 압제받는 자, 억눌린 자, 소외된 자 - 그들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 들을 위한 마지막 보호자요 최후의 변호자이시다. 그들의 눈물과 고통의 소리는 결코 하나님의 귀를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약자의 하나님”(God of the weak)으로 남기를 원하시고, 그러하시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것이다. 그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된 자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원한과 눈물과 비통함을 귀담아 들을 것이고, 그분의 정의의 책속에 기록하실 것이며, 그들을 위해 우주적 법정에 서서 최후의 변호와 심판을 선고하실 것이다. 성경이 주어지지 아니했던 이방 백성들, 명문화된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들을 소유하지 않았던 열국들도 국제간의 관습과 도덕법, 자연 속에 담겨져 있는 정의의 법에 의해 검증되고 처벌되었다면, 하물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큰 책임이 주어지겠는가! 타락한 세상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윤리적 규범 아래 살고 있다는 탁월한 도덕성과 세계관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정의로운 삶을 향하여

 

 

만일 언젠가 그분이 주재할 최후의 법정에 우리가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 안에서 우리의 행동양식과 삶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리라. 우리는 이 시점에서 최후 심판에 관한 묵시론적 환상을 담고 있는 예수님의 강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양과 염소를 통한 비유적 강론이다(마태 25:31-16). “종말론적 재판장”(eschatological Judge)으로서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아 두 부류로 분류하여 한쪽은 오른 편에, 다른 한쪽은 왼편에 세우게 될 것이다.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을 두 부류로 나눈다는 선언이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어떤 기준으로 민족들을 양분한단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재판장의 엄숙한 선고 이유 안에 잘 드러나 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노라”(35-36)

 

[왼편에 있는 자들을 향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42-43)

 

이들을 향한 최후의 선고를 들어 보라! 전자를 향하여서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34). 그러나 후자를 향해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하나는 영생에, 다른 한 부류는 영벌에 들어가도록 운명 지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심이라”(12:29).

 

정의로운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동료인간을 향한 관계들과 피조세계에 대한 관계 안에서 실현되어야할 신앙적 당위이며 도덕적 의무이다. 정의로운 삶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영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그리스도를 통해 일그러진 형상의 회복을 선물로 받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정의로우신 통치를 삶의 다양한 측면들에서 반영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감사하고 사는 일이다. 하나님의 가르침의 결정체인 십계명에 대한 자발적 순종은 정의로운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관계들 안에서도 풍성하게 드러나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말씀] 2012년 7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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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 로마서 묵상(20): “강력한 확신” 류호준 2010.02.01 9204
686 아버지를 만나기 위한 요셉의 계획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9.28 9181
685 베냐민을 떠나보내는 아버지 야곱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6 9169
684 베냐민을 애굽에 보내야할 것인가?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6 9157
683 칠년을 며칠같이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3 9127
682 신앙교육(5): "왜 불행이 당신에게 일어납니까?" 류호준 2008.11.30 9113
681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6 9110
680 (13) 창파에 배를 띄운 노아 (창 7:1-24) 류호준 2007.10.20 9100
679 로마서 묵상 (18): “인동초 희망” file 류호준 2010.01.30 9092
678 에서의 족보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6 9091
» 신학에세이: “구약에서 말하는 정의란?” 류호준 2012.05.23 9085
676 설교: “하찮은 것을 추구하는 삶” 류호준 2009.03.29 9073
675 신앙교육(53): "성만찬 (II)" file 류호준 2010.06.12 9068
674 2년 만에 출옥한 요셉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6 9068
673 에스겔서 강론(3): "영적 간음" 류호준 2010.03.21 9050
672 요셉은 복덩어리!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6 9030
671 창세기 큐티(2): "현대판 에서들" 류호준 2008.05.13 9025
670 에스겔서 강론(6): “만물을 새롭게 하는 소낙비” 류호준 2010.04.12 9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