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설교: "하나님의 날개"

2009.11.22 14:17

류호준 조회 수:9476

“하나님의 날개”
시편 91장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He will cover you with his feathers,
and under his wings you will find refuge”



이제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어른들은 어린 시절에 느꼈던 감정들을 새롭게 떠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적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느낍니다. 슬프게도, 어른이 되어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 중 하나가 ‘둥지 안에서 느끼는 포근함과 안전함’입니다. ‘보금자리의 따스함’입니다. 사랑받고 있고 보호받고 있고 완전하게 안전하다는 감정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누군가가 모든 것을 책임을 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어린이들은 종종 이런 느낌을 갖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어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수년전 미국 몰래 카메라(Candid Camera) 방송 프로그램에 덩치가 무척 크고 매우 거칠고 무섭게 보이는 트럭 운전사가 등장한 일이 있었는데 나이는 대략 50대 정도로 보였습니다. 인터뷰하는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나이든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나이, 어느 시절로 가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뒤돌아가도 되고 앞으로 가도 되고 상관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지막지하게 보이는 이 트럭운전사가 가만히 있었습니다. 심각하게 대답을 생각하는지 얼마간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가 몇 살을 생각했을 것 같습니까? 65세 은퇴한 후 평안한 노후를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18살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아니면 지금 와서 후회하였던 시절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길로 걷고 싶었을까?

 

여러분이라면 언제입니까? 열렬하게 연애하지 못했던 그 시절인가요, 다시 공부할 기회가 돌아오는 그 시절인가요, 그 때 내렸던 그 결정 말고 다른 결정을 했었더라면 하는 그 순간인가요, 언제입니까? 여러분이라면 가장 돌아가고 싶은 때가 언제입니까?

 

그 트럭운전사는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나이라? 마침내 그가 기자에게 대답합니다. 자기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세 살이기를 바란다고. “세 살이라뇨? 왜 세 살입니까?”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트럭운전자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쎄요, 세 살이라면 아무런 책임도 없지 않겠어요?”


왜 세 살로?

처음에는 그가 그냥 재미로 이야기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는 마음으로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그 무엇을 말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세 살이라면 여러분이 짊어져야할 짐은 상대적으로 아주 적습니다. 근심걱정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잠자리에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 세 살짜리 아이가 “아이고, 왜 인생이 이렇게 힘든 것이야? 산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라고 말하는 것 보셨습니까?
․ 세 살이라면 “아이고 허리 쑤시네, 왜 온몸이 이렇게 천근만근이야!” 하면서 침대에
  눕지는 않을 것입니다.
․ 감기가 들어 기침을 하면서 “혹시 이게 신종 풀루가 아닌가? 내 인생 이러다가 끝나는
  것 아냐?” 하면서 뜨거운 욕조 물에 몸을 담그지는
않을 것입니다.
․ “오늘 내게 모욕을 준 그 인간을 어떻게 처리하지?”하고 부글부글 끓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는 그러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즐겁게 뛰놀아서 그런지 어른들의 대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게슴츠레 거리다가 곧 잠이 들어버립니다. 침을 흘리면서 곤하게 잠을 잡니다. 엄마에 팔에 안겨 새큰새큰 잠자는 숨소리마저 정겹게 들립니다. 걱정근심 하나도 없이 편안하게 쉽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편안히 쉬리로다.(1절)

 

어린아이가 이렇게 곤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내일 아침에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100% 기대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담대하고 편안하게 잠에 곯아떨어질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의 날개 아래서 잠을 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완전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고 강하고 경험이 있는 그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알고 있기로, 부모님들은 밤늦도록 주무시지 않고, 문단속도 하고 창문도 닫고, 실내온도도 적정수준에 맞추어 놓고 침입자가 오면 두려움 없이 무찔러 내어 쫓아버리는 분들입니다. 부모들은 언제나 경계근무를 서고 있으며, 어둠이 깔리거나 귀신들이 출몰하거나 폭풍우와 천둥번개가 몰아쳐도 아빠엄마들은 능히 잘 해결하실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잠을 잘 자는 것입니다. 그들의 “둥지가 날개깃으로 덮여” 보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4절)


어른들의 그리움

 

어른들도 얼마나 이런 보호감과 안전감을 갈망하는지를 어린아이들이 알면 놀랄 것입니다. 아니 왜 그렇게 불안해하고 걱정이 태산 같은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어른들도 보호되어야 하고 그들에게도 따스한 얼싸안음이 필요하고 누군가에 의해 감싸 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버림을 받거나 배신을 당했습니다. 어떤 어른들은 늙어갑니다만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별로 즐겁지 않습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어떤 작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은 눈으로 양로원의 창문 바깥세상을 물끄러미 쳐다 볼 때까지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지? 그 때 양로원의 직원이 내 이름을 부르고는 푹 삶은 닭고기 한 점과 잘 익혀 씹기 좋게 만든 당근 하나를 내 입에 넣을 때까지 살아야만 하나?”

 

배신을 당하거나 버림을 받거나 늙거나 병들거나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들이 바랐던 대로 인생이 되어가지 않은 일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실망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조직 검사한 결과를 듣고서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앞이 깜깜해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들이 그렇게도 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깊은 시름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피아노 줄처럼 항상 팽팽하여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태로 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 모두에게 시편의 시인은 위로의 말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가장 위대하고 큰 주제들 중에 하나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십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4절)


날개를 펼친 독수리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이미지는 독수리의 모습입니다. 아니면 암탉의 모습입니다. 어느 경우든 위험을 느끼자 즉시 날개를 펴서 그 새끼를 덮는 새의 모습입니다. 조류 전문가에 의하면 이런 움직임은 아주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새들은 약탈자들이 오고 있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위험이 오고 있다 싶으면 마치 차양을 펼치듯이 즉시 날개를 활짝 펴 어린 새끼들을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햇병아리 새들이 허둥지둥 거리며 날개 밑으로 피합니다. 이런 움직임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본능적이기 때문에 새끼 새들이 없을 때도 위험이 온다 싶으면 날개를 활짝 펴서 누군가를 보호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감동적이고 사랑스런 장면을 분명히 보았을 이 시편의 시인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4절)

 

이 말씀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 바람들이 세차게 불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대피소다!
․ 하나님의 섭리 밑에서 우리는 보호되고 방어되고 완전히 안전하다!
․ 누군가 책임을 지고 있다!
․ 크고 강하고 경험이 많은 누군가 책임을 지고 있다!
․ 그는 24시간 근무 중이다!


팀머 가족 이야기

존 팀머(John Timmer) 목사님이 쓰신 책 가운데 자기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 나옵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났고 이차세계대전이 일어나던 때는 소년이었습니다. 독일 군대가 네덜란드를 침공한지 며칠 되었을 때였습니다. 아무도 일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몰랐습니다. 그저 두려움으로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1940년 5월 둘째 주일에 팀머 가족은 할렘의 자기 집에 저녁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때 갑작스레 독일군의 비행기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피할 겨를도 없이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색이 되었습니다. “자, 어서 모두 복도에 서있어!” 존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복도래!” 복도에서 다시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자, 기도하자구나!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야!”

 

존 팀머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뭐라고 기도했는지 정확하게 되 뇌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구절만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히틀러의 무차별 융단폭격에서 가족을 보호해달라고 기도하시던 모습과 그 기도 가운데 어딘가 이렇게 기도한 것을 기억합니다. ‘오 하나님 우리가 당신의 날개 아래로 피합니다.’”

 

우리 위로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하나님, 모든 유대인들과 크리스천들이 대대로 암송하고 가슴깊이 귀하게 품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구절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구절은 둥지 안에서 안전을 느끼던 어린 시절을 재발견시키는 초청문구이기도 합니다. 이런 느낌과 감상은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아마 덤덤하고 무감각한 크리스천들은 전혀 감동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날개를 펼친 하나님, 정말일까?

 

그런데 이 구절과 그림을 생각하면 할수록 한 가지 풀어야할 질문이 남습니다. 피난처이신 하나님, 대피소이신 하나님의 그림이 ‘정말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짜일까? 그리고 둥지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안전할까 하는 질문이 계속 남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정말로 피난처와 대피소가 되셨던 적이 있었던가? 그 때 1940년 5월 둘째 주일에 다른 네덜란드 가족들도 하나님께서 그들 집 위로 하나님의 날개를 펼쳐 주십사 하고 기도했겠지 하고 생각해봅니다. 또한 그 때 독일 공군의 폭탄들이 하나님의 날개를 꿰뚫고 그 집을 다 날려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이 시편 91장을 읽으면서 궁금해 하고 의문이 드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은 우리에게 100%를 커버하는 완전 보험을 제공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이 말씀에 따르면 “여러분은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이런 모든 것들을 정말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까? 위험한 지역에서 아파트 대문을 열어놓고 잠을 잘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밤의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까? 어린 자녀의 열이 솟아오르고 백혈구 수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는데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말입니까? 본문이 시라서 좀 과장해서 말했다 하더라고,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정직한 믿음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현실을 바라보면

 

자, 현실을 직시합시다. 대피소를 차양처럼 우리 위로 치시는 하나님의 보호의 날개를 믿는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육체적 위험이나 물리적 해를 제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위험지역을 가면서 시편 91장을 외우면서 씩씩하게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담배를 피워대면서 하나님께서 시편 91장의 약속처럼 나를 폐암에서 보호해주실 거라고 말하는 것도 신앙이 아닙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시험을 통과하게 하실 것이야 라고 말하는 것도 신앙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어리석은 신자들이고 시편 91장을 어리석게 이해하고 읽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마태복음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시험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번 몸을 던져 떨어져 봐라” 사탄이 말합니다. 그러면 시편 91장에 기록된 것처럼 “괜찮을 거야.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야. 천사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안 괜찮거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어떤 특정한 사건들에만 적용이 되고, 그럴 경우라도 제한이나 규정들이 적용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보같이 어리석게 행동하고는 구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대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신자들은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았는데도 다치기도 하고 상처를 입습니다. 음주운전자가 여러분의 차를 들이 박았다고 합시다. 이라크에 있는 어떤 크리스천이나 어린아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죽었습니다. 그를 죽인 사람이 미국 장로교인 공군전투기 조종사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가 작전 중에 투하한 폭탄에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장 정확하다고 하는 미국인의 폭탄투하도 양민을 추려내는 일에 있어서는 나귀처럼 멍청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혹은 여러분이 서울에 사는 신실한 중년의 크리스천 여성이라고 합시다. 10월부터 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하고 전문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검진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여러분의 주치의를 만났습니다. “여사님, 아무래도 이 문제에 집중하셔야할 것 같네요.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다는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의사는 이런 저런 치료방식에 대해 한참 설명을 하고 지금까지 발전해온 연구 결과들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여러분을 가능한 한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역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생각해보십니다. 이제 나이 46살인데 부모보다 먼저 가게 한다는 사실, 그리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녀들을 뒤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갑니다. 주변을 정리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날개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날개 아래 악성 뇌종양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몇 년 전 경기도 화성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어떤 중년 여성이 새벽기도 갔다 오다가 납치되어 살해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날개 아래 이런 일어난단 말입니까? 집안에서도 여러분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이것도 하나님의 보호의 날개 아래서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이 날개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의 고민거리는 신자들이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고난을 당한다는 분명한 사실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C.S. 루이스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노아와 그의 식구들처럼 항상 홍수에서 구원을 받는다면, 어떤 강도가 크리스천에게 총구를 들이댈 때마다 그 총이 소시지로 변한다면, 테러리스트들의 증오와 잔인한 행위들에 대해 항상 그들이 반드시 철저하게 응징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교회의 성장에 대해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목격하는데 누가 교회에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교회들은 교회를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험을 원하는 사람들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안전과 안보를 위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강력한 군대를 원할 것입니다. 부자가 되거나 행복해지기 위해 혹은 마음에 평안을 위해 크리스천이 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신자가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가난과 사고나 죄의 값에서 완전 면제나 보호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면, 사람들의 신앙적 순결성이 정말로 지켜질 수 있을까요?

 

모든 일을 다 들어보면, 성경의 나머지 가르침과 우리의 경험은 우리에게 역경과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기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편 91장은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기를,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이기에는 너무도 좋은 달콤한 광고문구입니다. 시인은 말하기를, “네가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았음으로 어떤 해와 악도 너에게 임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 고민거리입니다. 바울은 어떠한가요? 스데반을 어떠했는가요? 우리 주님은 어떠하셨던가요? 주님은 예루살렘의 시민들을 마치 암탉이 새끼들을 모음 같이 그렇게 잘 모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민들 가운데 얼마간의 사람들이 그를 잡아 예루살렘 성 바깥으로 끌고 가 그의 날개에 대못 질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91장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너무도 터무니없이 황홀한 것은 아닙니까?


뿌리 깊은 확신, 신앙의 신비

 

시편 91장은 신앙의 여러 가지 마음가짐(무드, 기분)들 중 하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오래 추억에 남을 무드입니다. 이 마음가짐은 피난처가 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솟구쳐 오르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마치 대피소나 피난처와 같다는 뿌리 깊은 확신입니다. 이런 확신에서부터 그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난처를 발견하리로다.” 물론 다른 날, 다른 기분에 있었을 때, 어둡고 캄캄한 계절이었을 때 동일한 시인은 절망과 버림받음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가 우리의 하나님께 시편 22장을 인용하면서 부르짖던 외침을 기억해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섭리 아래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절망하거나 깊은 충격을 받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또한 성경적이기도 합니다.

 

시편 91장은 우리에게 큰 그림의 한 면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즉 신앙의 무드 가운데 한쪽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상당히 기쁘고 확신에 찬 어조로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나쁜 일들이 나쁜 사람들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그림을 보기 원한다면 아마 여러분에게는 다른 시편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즉 동일한 날개 아래서 어째서 나쁜 일들이 종종 착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느냐고 부르짖는 탄식 시들 말입니다.

 

시편 91장은, 재앙이 우리에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의 말씀과 함께 성경의 다른 곳을 함께 고려해본다면 결론은 분명하다고 나는 믿습니다. 즉 궁극적으로 그 어떤 재앙과 악도 우리에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종적 악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그 마음이 깨어지고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압니다. 자녀를 잃었을 경우, 배우자가 외도를 하는 경우, 치명적 질병으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깊은 상처를 입고 좌절하고 괴로워합니다. 아마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도 마음으로 “맞아요, 그렇습니다!” 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에 이르기 까지 대대로 상처입고 부셔지고 으스러진 성도들은 그것 이상의 것을 알고 있고, 그 이상의 것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 즉 신앙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 위에 놓인 손을 발견하게 된다는 신비로운
  사실입니다.
․ 우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 아무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순수하고 순결한 확신입니다.
․ 물론 우리는 두려워 떨기도 하고 삶이 온통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을 때에라도 우리는 “모든 것이 괜찮다는 것을,
  마음이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으스러진 날개와 십자가

 

우리는 부모의 날개아래서 뒤뚱거리며 걷는 햇병아리 새들입니다. 악의 세력들이 모든 힘을 다해 이 날개들을 내리칩니다. 악마는 삼지창을 들고 무자비하게 날개를 칩니다. 마치 폭풍에 찢겨진 나무 가지들처럼, 혹독하게 내리는 무자비한 폭우와 강풍처럼, 모든 힘을 다해 이 날개를 칩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악이 그 최상의 공격을 마쳤을 때, 날개는 온통 피로 물들었고 날갯죽지들은 서로 엇갈렸고 부셔졌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런 소란과 소요 가운데 우리는 상당한 충격을 받고 이리저리 구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괜찮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다시피 이 날개는 한 번도 접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활짝 펼쳐진 날개들은 우리의 죄들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날개들은 우리의 죄악들로 인해 으스러지기 위해 활짝 펼쳐진 것입니다. 날개가 더 이상 펄럭거리지 않게 될 때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평탄하지 않는 곳에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리저리 부딪히고 상처를 입었고 깨어졌고 다쳤습니다. 때론 아주 심하게 다쳤습니다. 마지막 길이란 죽는 것 밖에 없었을 때였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포옹하심(감싸심)을 내치는 순간 말입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우리가 이러한 날개 아래에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전율하는 몸짓을, 떨리는 몸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날개 아래에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도 사랑했던 분의 신음소리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이것은 단순한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입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에 말씀의 식탁으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진리입니다. 아멘.


[무지개교회 주일 설교 전문, 2009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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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 큐티를 위한 스가랴서 해설 (17) 류호준 2009.11.04 9366
691 설교 : "물에서 태어난 사람들" file 류호준 2007.04.16 9343
690 (15) 무지개를 바라볼 때마다 (창 9:1-29) 류호준 2007.11.09 9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