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성만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고전 11:23-25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고전11: 23-25, 개역개정)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잡히시던 그 밤에 그가 떡을 가지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후에 떡을 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어진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식후에도 이와 같이 그가 잔을 가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죄를 용서하기 위해 너희를 위해 쏟는 나의 피다.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고전11: 23-25, 사역)



개혁교회의 전통에, ‘은혜의 방편(方便)’이란 신학적 용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그 은혜를 담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 방식으로 통해 하나님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일에 교회에 오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이른바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을 먹이십니다. 길고 고단한 순례의 길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일정하게 매일의 양식이 주어진다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항상 그 일용할 양식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아먹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여주는 태도나 행동 양식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변함없이 매 주일마다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역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었더라면 우리는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양식을 공급하여 주신다면, 그것이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둘째, 세례 예식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특별히 유아세례의 경우가 더욱 그렇습니다. 자기 머리위에 뿌려지는 물방물이 무엇인지,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 어린 아이에게 목사는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입양된 것을 확증하고 도장을 찍습니다. 이 예식이 유아세례라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은혜의 선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 선물이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는 세례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세 번째 통로와 방편은 성만찬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성찬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고 합니다. 단순히 느낌으로서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온몸과 마음으로 경험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경험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성만찬이 도대체 무엇이며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면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용어에 관한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만찬(聖晩餐) 혹은 성찬식(聖餐式)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거룩한 만찬’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기독교회는 각자의 전통에 따라 서너 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장로교 개혁교회에서는 ‘주의 만찬’(Lord's Supper)으로, 성공회에서는 ‘유카리스트’(Eucharist)로, 로마가톨릭에서는 ‘미사’(Mass)라고 부릅니다. 이것들을 묶어 공통적으로 부른다면, Holy Communion이라 합니다. 문자적 뜻은 “거룩한 교제와 교통”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거룩한 연대감’이 형성되는 예식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런 깊고 거룩한 연대가 이루어지게 되는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적 죽으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자녀들 사이의 모든 차별과 구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한 가족으로 묶어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가 되는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념하고 회상하는 예식이 성찬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주님의 만찬’에 참석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Holy Communion’이라 부르는 성만찬에 참예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왜 우리는 성찬예식을 시행하는 것일까? 아무리 보아도 잘게 자른 빵 조각들과 아주 적은 양의 포도주 정도인데 왜 우리는 ‘만찬’(晩餐)이라고 부릅니까? 그것도 왜 ‘거룩한 만찬’(聖晩餐)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물론 피상적으로 보면 차려진 것은 왜소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빵조각과 포도주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초라하게 차려진 식탁을 제 3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광야의 고단한 길을 걸어가는 외로운 여행자에게 한줌의 떡과 포도주는 새로운 힘을 공급해주는 원동력이며,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 그 나그네에게 저 멀리 뵈는 목적지를 뚜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력을 회복시켜 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는 정기적으로 광야와 사막을 지나는 대상(隊商, caravan)들을 위하여 떡과 포도주를 제공하여 주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순례의 길 위에 있는 하늘 나그네들에게 힘과 쉼, 쉼과 힘을 제공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성찬예식이 종종 ‘슬픈 대담’(sad colloquy)으로 여겨진 것은 웬일일까? 우리 주님이 로마 군인들에 사로잡히게 된 그 날 밤에 그의 제자들에게 비애(悲哀)에 찬 어조로 말씀하시고 있는 광경을 연상하게 됨은 어찐 일입니까? 성찬예식에 관한 한 한국교회의 오랜 풍습은 이런 ‘슬픈 대담’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러해야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의 불행한 운명을 슬퍼하고 비통해야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가 가슴을 치고 비통해야하고 울어야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 울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성찬식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요?


성찬식을 잘 이해하려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격적인 실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사로잡는 성만찬의 근본 뜻을 이해하려면 여러 가지 길이 있겠지만 오늘은 몇 가지만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위험 가운데서도 즐거운 공동식사를


첫째로, 성만찬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로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식입니다. 특별히 성만찬 예식은 위태로운 세상 안에서 즐거운 공동식사를 하는 것을 상징하는 예식입니다. 성만찬에 참예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는 행위를 보여주는 예식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무서운 세상인지를 절감하실 것입니다. 사방에 위험과 위협이 숨어있고 언제 어디서라도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평온해 보이기까지 하는 대지 밑에는 무시무시한 마그마가 끓어오르고 있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위험천만한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모여 즐거운 공동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런 위험천만한 놀이를 하게 만든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무엇에 이끌려 죽음과 위험이 편만한 이 땅 한 가운데서 마냥 즐거워하며 공동식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압니다. 그들은 믿습니다. 그들의 모든 것이 - 삶과 죽음,영혼과 육체 - 그들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실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하이델베르그 신앙교육서 제 1문항과 대답)


마치 홍수로 인해 온 세상이 죽음의 비명 속에서 익사하고 있을 때, 노아의 방주 안에서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안온함과 평안 가운데서 ‘피조물들의 시끄럽지만 즐거운 식탁의 교제’가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창조주시며 마침내 그들을 구원해 주실 구원자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위태로운 세상 안에서 즐거운 공동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과 파멸의 대홍수 한 복판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정말 멋진 성찬식이 방주 안에서 거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하는 것 아닙니까! 


유월절 만찬과 주님의 만찬


성찬식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성찬예식에 참예할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알기 원한다면 “잡히시던 날 그 밤에”라는 문구를 곰씹어 보십시오.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에 체포되는 그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Passover meal)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자신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월절은 어떤 절기입니까? 유대인들로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어떤 생각으로 유월절을 기념하고 있었을까요? 유월절 식사는 외부로부터의 심각한 위험 속에서 내부의 연대감과 하나 됨을 기억하는 식사입니다. 바로의 폭정과 압제, 비인간적인 착취와 고단한 노예생활 등은 모두 외부로부터의 위험들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런 위험들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을 기념하는 예식이었고, 특별히 유월절 식사가 그러했습니다.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사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이라고 후대 사람들은 그렇게 이름을 붙였지만, 이 유월절 식사는 마침내 예수님의 식사, 주님의 식사(Lord's Supper), 최초의 성만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최초의 성만찬은 단순히 종교적 규례에 따른 또 다른 유월절 식사는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규적으로 기념하고 시행하는 성만찬은 무엇입니까? 성만찬이 시행될 때 무슨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까? 유월절 식사와는 달리 주님의 만찬은  외부로부터만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위험을 기억하는 식사자리입니다. 최초의 만찬 자리에는 예수님에 대한 온갖 위협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팽팽한 긴장감들, 뿌리 깊은 불신과 의심들, 가시 돋친 말들과 안절부절못함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동시에 배반과 배신으로 점철될 슬픔의 식사를 기념하는 예식이 성만찬입니다.


예수의 만찬을 받아든 최초의 사람들은 누구인가를 기억하신다면 우리가 때론 의미 없이 참석하는 성만찬은 우리 가슴 깊이 저려올 것입니다. 예수의 만찬을 받아든 최초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들이 누구던가요?

   ․ 유다: 예수를 배반한 비열한 인간입니다.
   ․ 베드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치사한 인간입니다.
   ․ 제자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한 비열한 인간들입니다.


우리가 성만찬 테이블에 나올 때 마다, 우리는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불신과 배신, 비열과 변덕을 기억해야 하는 자리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 테이블로 나올 때마다, 우리같이 비열하고 속물근성으로 가득한 인간들에게 자기 생명을 기꺼이 바쳐 은혜의 상을 차려 주시려는 하나님의 식탁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주시는 그 아버지의 식탁 말입니다.


차별 없이 주어지는 은혜


셋째로, 최초의 성찬식에서 “예수는 떡을 가지시고, 감사하시고, 찢으시고,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는 떡을 가지시고 먼저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예수의 이런 행동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가 지금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는 빵과 포도주는 창조의 선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은 우리의 노력과 애씀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코헬렛이라 불리는 설교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 2:24) 양식과 음료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박한 선물’(simple gift)입니다. 그 선물을 성찬식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나눠주고 계신 것입니다. 나눠 주시되 모두에게 차별 없이 나눠주심으로써 그들 모두가 동일하게 사랑받는 ‘하나’라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우리가 서로를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합니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다른 동료 크리스천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펼쳐진 손과 팔을 기억하시고 우리 역시 이런 저런 일로 우리와 간격이 생긴 동료 크리스천과 교우들을 향해 아무런 조건 없이 손과 팔을 내밀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즉 내게 정말로 잘못을 했거나 그래서 내가 미워하게 된 그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고 받아들여 품에 안기 전까지는 성찬식의 식탁에서 빵과 잔을 헛되이 받게 될 것입니다.


임재와 현존의 약속


넷째로, 최초의 성만찬에서 예수님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요 나의 피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자녀들 가운데 현존하시고 임재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바깥으로부터의 위험뿐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위험에 직면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임재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들은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의 때일 것입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증표보다는 그의 오랜 침묵과 부재의 그림자가 더욱 짓게 드리운 현실입니다. 개인의 경우뿐 아니라 인류 역사와 피조세계를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600만 명의 무고한 인명이 사탄적인 한 인간에 의해  무참히도 독 가스실에서 혹독한 포로수용소에서 죽어갈 때, 하나님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요?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재해로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죽어 갈 때, 하나님의 부재와 외면은 감당하기 어려운 질고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처한 한계상황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성찬의 식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안에 너희 가운데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찬식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을 기리고 소망하는 예식입니다. 자, 어서 식탁으로 나와 영원한 생명의 떡과 포도주를 마십시오.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질 것입니다. 아멘.1)



[무지개 교회 주일 설교전문]



1) 본 설교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된 책으로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신학자인 Michael Welker, What Happens in Holy Communion, trans., by John F. Hoffmeyer (Grand Rapids: Eerdmans, 20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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