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설교: "생명을 확증하는 기쁨"

2009.03.16 00:17

류호준 조회 수:9394

 “생명을 확증하는 기쁨”
누가 15:1-3, 11b-3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 …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개역개정)


예수님의 가르침들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이 있다면 그분이 들려주신 비유들일 것입니다. 내가 추측하건데 예수님의 비유들 중 가장 사랑 받는 비유들, 가장 유명한 비유들,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비유들은 모두 제 3의 복음서 가운데 있지 않나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부자와 나사로 비유’, ‘불공평한 재판장 비유’,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방탕 하는 아들 비유’(탕자 비유)들입니다. 이 비유들은 오직 누가복음서에서만 발견되는데, 대부분의 다른 비유들과는 다른 형태와 느낌을 줍니다. 예를 들어, 길이에 있어서 다른 비유들보다는 좀 더 길고 좀 더 이야기 형식을 띕니다. 예를 들어, 짧고 간결한 ‘누룩 비유’나 ‘겨자씨 비유’처럼 그렇게 짧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누가의 긴 이 비유들은 씨를 심거나 고기를 낚는 주제처럼 자연에서 얻어온 소재들을 사용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누가의 비유들은 사람 사는 이야기, 그들의 행동양식, 인간관계들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들입니다.

 

오늘의 비유를 이해하기 전, 먼저 우리는 그 앞부분에 있는 두 개의 비유들을 - 잃은 양 비유와 잃은 동전 비유 - 살펴보아야 방탕한 아들 비유의 독특성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마리 양이 잃어버렸고, 그 양을 찾으러 나섰고, 마침내 발견되었고, 발견의 기쁨에 겨워 즐겁게 잔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림’, ‘찾으러나감’, ‘발견함’, ‘축제의 즐거움’ 등이 짧은 5절 안에 담겨있습니다. 동전 비유 역시 잃어버렸고, 샅샅이 찾았고 마침내 발견되었고 기뻐하게 되었다는 주제를 겨우 3절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아들이 아버지께 반역하고 대들고 속을 썩이고 집을 나가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오늘의 비유는 이야기 전개가 느리고 완만합니다.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은 우리 독자들을 조심스럽고 천천히 이 인간 극장 속으로 인도하여 들입니다. 한 다발로 묶여져 있는 세 비유들은 각자의 특색이 있고 개성이 강한 비유들이기 때문에 똑같은 교훈을 세 번 반복해서 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의 저자는 이 세 가지 비유들을 하나로 묶어 놓고 있으며, 아마도 화자는 첫 두 개의 비유들인 잃어버린 양과 동전 비유들을 아버지와 아들들에 관한 대작 드라마의 전주(前奏)로 사용하는 듯 보입니다. 먼저 잠시 이 이야기들의 공통 주제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잃어버림과 방황

 

첫째, ‘잃어버림’의 주제입니다. 잃은 양, 잃은 동전, 잃은 아들. 세 비유 모두에서, 무엇인가 잃어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사건의 발단이 시작됩니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어디에도 비난과 책망의 요소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매우 부드럽고 유순하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첫 번째 두 비유에서 이것은 사실입니다. 상상하건데, 양이 (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잡목 숲 속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동전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마 어떻게 하다가 떨어뜨렸을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비난과 책망의 어투는 느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세 번째 비유에서 조차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비유를 들려주는 사람에게 있어서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동정심을 갖고 천천히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둘째 아들이 자기가 상속받을 유산을 미리 챙겨 떠나려고 하였지만, 그렇다고 화자가 그 과정을 써내려가거나 이야기 하고 있는 상태를 보면 이 이야기의 다른 부분보다 이 부분이 더 자세하거나 긴박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잃어버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 달리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잃어버림’ ‘방황’ ‘방랑’이라는 것이 항상 끔찍하거나 악의에 찬 범법(犯法) 행위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잃어버림’ ‘방황’이 정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비유의 이 부분에서 보이는 화자의 유순함과 이해와 아량은 왜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있곤 하셨는지를 잘 설명해 줄 것입니다.


찾음과 발견

 

이 비유들의 또 다른 공통의 주제는 ‘발견’입니다. 찾았다는 말이 더 마음에 와 닿을 것입니다. 양, 동전, 아들, 이 모두는 마침내 찾아집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발견됩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전통적인 비유의 명칭들이 한결같이 다 부정적일까 하고 의아해합니다. 긍정적인 명칭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워합니다. ‘찾은 양 비유’, ‘찾은 동전 비유’, ‘돌아온 아들 비유’라면 얼마나 좋을까! ‘잃어버림’보다는 ‘찾음’이 훨씬 좋고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 비유의 끝 부분에 나오는 아버지의 요약적 말씀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네 이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야. 한 때는 잃었지만 이제 찾은 것이야!” 이 말씀은 무엇인가 깊게 씹어 볼 내용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마치 히브리 시인들처럼 이 말씀의 화자는 평행되는 두 구절을 사용하여 첫 번째 구절을 두 번째 구절에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거나 심화시켜 말합니다. 다음과 같이 배열하면 논의가 좀 더 분명해 보일 것입니다.


        “네 이 동생은 죽었다가(dead) 다시 살아난 것이야(life). 
         네 이 동생은 한 때는 잃었지만(lost) 이제 찾은 것이야(found).”


첫째 구절은 두 번째 구절에서 좀 더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시의 평행법의 일반적 특성입니다. 따라서 ‘죽음’(death)에서 '잃어버림'(lostness)에로 나아가고, ‘생명’ ‘살아남’(life)에서 '찾은바 됨'(found)으로 나아가는 진전이 있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본질적으로 잃어 버려진 상태가 아닙니까? 잃어버림! 이 보다 더 비참하고 끔찍한 그 무엇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다시 살아나고 생명을 얻는 일보다 더 좋은 그 무엇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발견되었다는 것’, ‘찾아졌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1)


기쁨

 

세 번째 주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기쁨’입니다. 세편의 비유 모두 축하의 기쁨으로 끝을 맺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쉬울 것입니다. 양 한 마리를 잃었는데 다시 찾았으니 그 목자는 즐거워했습니다. 동전 하나를 잃었습니다. 후에 찾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잃었던 여인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방황하다가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그의 형을 열 받게 하고 화나게 한 것은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위해 베푼 잔치 때문이었습니다. “못 돼 먹은 그 자(者)가 돌아왔다?” “정신 차리고 집에 돌아왔다? 그 정도면 뭔가 배웠을 터이니 그 인간에게는 그나마 다행이겠지.” “그 정도라면 나는 참을 수 있어!” “적어도 나는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으니 그 자가 돌아왔다면 속이 쓰려도 받아들일 수는 있지.” “돌아왔으면 머리를 수그리고 부끄러움을 알아야겠지. 그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참회하는 심정으로 슬픔의 기색을 띠고 조용히 있어야할 것이야. 사람이 되려면 좀 시간이 걸릴걸!”


큰 형이 그렇게도 견디기에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풍악과 춤과 잔치 때문이었을까? 그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견딜 수 없었고 삼킬 수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닌 ‘기쁨’이었습니다. 풍악과 춤과 잔치였습니다.


신앙으로 가는 길목에 기쁨이라는 것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립니까? 특별히 자신을 ‘종교적’이거나 ‘경건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쁨’, ‘신생(新生)의 기쁨’은 열등한 크리스천들의 천박한 경험에 불과하다고 무시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어쨌건 ‘기쁨’이라는 숭고한 하나님의 선물이 신앙으로 가는 길에 걸림이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희한(稀罕, 썩 드물거나 신기하다)하고 어색하기 까지 합니다.


기쁨이 우리에게 문제인 적이 있었습니까? 이제 이 문제를 열어 자세히 살펴봅시다. “용서는 괜찮아. 적어도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다면 용서를 베푸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기뻐 날뛴다?” “글쎄올시다.” 이런 경우 우리는 터질듯 한 기쁨이 죄의 심각성과 모순되는 것일까 하고 묻습니다. “회개라? 좋지요. 회개해야하지요.” “용서를 받는다? 좋습니다. 용서를 받아야지요.” “용서 받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서받았다고 파티하고 잔치를 벌인다?”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은혜는 종교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의 예민한 감정과 정서를 상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은혜는 무엇이 옳고 공평한지에 관한 우리의 전통적인 감각을 파괴하거나 적어도 무디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심쩍은 누군가를 어느 정도 거리에 두고 지내려는 지혜를 배우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바리새인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공동체의 건강과 품위를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그럴 필요가 있어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공동체에 들락거리면서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력을 끼친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런 사람들을 우리 공동체 안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을 잘 다듬고 섬겨 올바르게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는 일과 그들에게 공동체 안에 지위를 주는 일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가 다시 회복되었을 경우 그런 회복된 관계를 마치 모든 경우에도 동일한 본이 되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들’과 섞여 지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그렇게 생각한단 말입니까? 바로 여러분과 나, 그리고 아마 비유 속의 형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열 받고 분노하는 것은 그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 잃어버린 동생이 찾아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기쁨’의 잔치, ‘즐거움’의 파티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유를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을수록 반복적으로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 이야기의 모든 전개와 움직임들은 작은 아들의 회개를 향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향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이 비유의 전통적 제목이 잘못되었다 따라서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 ‘고통하며 사랑하는 아버지 비유’라고 다시 이름 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찰에 충분히 동의하려면 우리는 비유의 결론 부분을 기억하면서 이 비유를 다시 읽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탕자(蕩子)가 이 비유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초점을 탕자에 맞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이야기 안에 두 명의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종종, 너무 많이 우리는 큰 아들을 잊고 지내왔습니다.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제발 두 아들을 서로 싸움시키지 말기를 바랍니다. 두 아들은 모두 그놈(者)이 그놈(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초점은 두 아들 각각이 아버지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 이야기 전체를 읽으면서 우리는 아들들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그 어떠한 거절이나 배척이나 외면이나 질책이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하십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아버지가 그 두 아들을 사랑한 때는 그들 모두가 도무지 사랑받을만하지 못했을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사랑받지 못할 지경에 있을 바로 그 때에 아버지는 그의 두 아들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둘째 아들이 비유의 끝 부분에서 부끄러움과 참회하는 심정으로 돌아 왔을 때, 바로 그 때 그 아들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온 아들의 모습이 애처롭고 불쌍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데 어찌 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은 그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만한 행위나 모습 때문에 일어난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사랑은 이야기의 초반부터 시작된 ‘그지없는 사랑’이었습니다. 달리 말해 그 아들의 눈이 온통 돈과 재물에만 집중되었을 때, 향락적인 삶에 눈이 멀어 문을 박차고 집을 나갔을 때부터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와는 정 반대로, 아버지는 큰 아들을 처음에도 사랑하셨지만 마지막에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가 아버지에 대해 순종하고 충성했던 이야기의 처음에도 그를 사랑하였지만, 속이 뒤틀리고 몹시 상해서 아버지와 잔치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던 마지막 장면, 바로 그 순간에도 아버지는 그의 큰 아들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이 비유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승자가 떠오른다고 해서 반드시 패자도 있어야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도록 우리를 압박합니다. 두 아들 중에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인가에 관해 결정해야하는 것이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런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악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일에 관심을 덜 갖습니다. 신앙은 선함과 착함, 좋음을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며,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것에 관한 일이며 생명과 삶을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은 받아들이시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배척하시는 비유로 이해되었습니다. 또한 좀 더 넓은 문맥에서,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가 이스라엘로부터 이방인에게도 넘어간다는 것을 말하는 풍유로도 알려졌습니다. 물론 이런 해석과 이해가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 비유를 잘 읽는 방식은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천명하는 위대한 복음 선언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과 용서와 은혜는 어떤 특정한 방향과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에게 퍼진다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은 탕자 (蕩者)”이십니다. 둘째 아들만 가진 모든 것을 허랑방탕하며 탕진한 탕자(蕩子)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이 탕자(蕩者, 탕진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엄청난 은혜를 허랑방탕하듯이 용서받지 못할 자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 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나온 책에서 켈리(Timothy Keller) 목사는 누가 15장의 탕자(The Prodigal Son)의 비유를 새롭게 명명하여 “탕자 하나님”(The Prodigal God)이라 붙였습니다.2)

우리를 축복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삶과 생명을 즐거워 할뿐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축복하는 은혜와 사랑과 생명을 즐거워하기 전 까지는 결코 진정한 축하의 잔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회개한 죄인들이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건 상관없이, 우리가 종교적이건 종교적이 아니건,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위해 너무 경건하건 아니면 경건하지 못하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물은 항상 ‘생명’(life)입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며 생명입니다. 아멘.


[무지개 교회 주일 설교문, 2009년 3월 15일]


1) Fred Craddock, Luke, Interpretation Series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0), pp. 186-87.

2) Timothy Keller, The Prodigal God: Recovering the Heart of the Christian Faith (New York: Dutton, 2008).  영어에 prodigal이란 단어는 형용사로서 1. reckless extravagant (무모하게, 조심성 없이, 무절제하게 흥청망청 낭비); 2. having spent everything (모든 것을 다 써버리다)란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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