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출애굽기 4장 해설

2009.01.10 11:19

류호준 조회 수:18152

 출애굽기 4 장



[1-9절]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모세의 반신반의는 계속된다(4:1). 이번이 세 번째다. 그의 백성들이 자기를 배척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나님께 되묻는다. 이런 질문에는 그들이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있다.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않고 내 말을 듣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확신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매우 부정적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네 말을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는가?(3:18)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확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위탁받는 사명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고려해볼 때 모세의 머뭇거림과 반신반의 하는 태도는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그에게는 더욱 더 큰 확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모세의 태도에 대해 하나님의 반응이 부정적이거나 화를 내시지 않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이해할 만하다.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를 사용하기 위해 그의 어리석음과 불신과 머뭇거림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그를 준비시키며 그에게 확신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단순히 말로 확신을 얻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 기적을 보여주신다. 여기서 기적은 모세에게 징조가 된다.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모세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려 하신다. 모세의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는 이적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모세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주시려 한다. 그러나 막상 지팡이가 뱀이 되자 모세는 두려워 피하였다. 이 기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실제로는 마음에 확신이 서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모세의 지팡이는 목자의 지팡이다. 이스라엘 인들은 목자의 지팡이에 대해 친숙하다. 그들의 조상들이 사용하던 목자의 지팡이기 때문이다. 양떼를 인도하고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양떼를 보호하는 지팡이다. 그런 지팡이가 변하여 뱀이 되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 모세를 보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기적의 목적이다. 상징적으로 여기서 뱀은 애굽의 왕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뱀의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애굽 왕권은 하나님과 그가 보낸 사람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동시에 모세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함을 가르친다.

 

 

내친김에 하나님은 두 번째 기적까지 보여주시면서 모세와 애굽의 이스라엘 인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시기를 원하신다. 모세의 손을 나병 환자의 손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회복시키는 기적이었다. 이 기적은 하나님은 죽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창조자이심을 보여주는 징조이다. 박윤선에 따르면, 여기에 언급된 나병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무능력한 상태를 비유한다. 그리고 회복된 손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지도 아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 받을 것을 상징한다(민 1:12).1) 두 번째 징조 역시 생명과 죽음을 통제하는 능력이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가리킨다. 젠슨이 잘 지적해 주듯이, 민 12:10-12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마치 어머니의 태속에서 죽은 영아와 같다. 그런데 창세기의 전통에 따르면 족장들의 하나님은 잉태케도 하시고 그 아기의 목숨을 거둬들이기도 하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창 20:3,17-18).2) 세 번째 징조는 나일 강 물을 조금 퍼 땅에 쏟으니 피가 되었다. 나일 강은 애굽인들에게 생명줄과 같았다. 나일 강은 애굽의 경제생활에 대동맥 역할을 한다. 나일 강이 피가 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물이 죽음의 징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애굽의 신들은 궁극적으로 족장들의 하나님, 히브리인들의 신에게 굴복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은 모세의 의심을 제거하고 믿음을 심어 주신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모세의 신빙성을 공고히 해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저런 사건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을 염두에 두고 그러해야한다. 본 단락에서 제기하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은 모세의 정체성과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모세는 “내가 누구입니까” 라고 하나님께 질문하였다. 하나님 역시 자신의 정체성이 지속적으로 의문시되고 도전 받고 있다. 사람들이 모세에게 이르기를, “너를 보낸 그 신이 누구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내레이터는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다시 말해 독자로서 우리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가 이상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주어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이 점은 현대적인 상관성을 지닌다. 교회와 그 사역자들은 부단히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섬기고 고백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관한 분명한 대답을 갖고 있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화와 다원주의의 물결이 범람하고 있는 이 시대에서 영적 전투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출애굽이 조금 늦어지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은 모세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갖기를 원하신다.

 

 

[10-17절]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모세는 다시금 자신의 말솜씨(言辯)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에 부적당하다고 말한다(10-12절). 이번이 네 번째 뒤로 빼는 모습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 위해서 언변이 출중하고 의사전달이 효과적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역의 대부분이 언어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말이 어눌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아닌 것 같다. 일종의 변명 같이 들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기분이 좀 언짢은 듯하다. 모세의 짜증나게 하는 질문과 의심에 대해 지금껏 친절하게 대답해 주시면서 인내하셨지만 이번에는 좀 달라진 것 같다. 하나님의 대답하시는 목소리에 약간은 불쾌한 감정이 섞인 듯하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야웨가 아니냐?”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만드시고 그것들에 질서를 정해주시며 그것들을 적재적소에 투입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모든 일을 하시는 당사자가 내가 아니냐?”는 하나님의 수사학적 질문에는 모세의 짜증나게 하는 소심한 반신반의에 대한 입을 막아버릴 의도가 있음에 틀림없다. 창조주 하나님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건드리는 모세의 철없는 의문에 대해 하나님은 단단히 그에게 중요한 신학을 가르치시고 계신다. 야웨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다. 물론 사람도 지으셨다. 그로 하여금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말하게 하신 분이 창조주 야웨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모세의 불쌍한 변명은 더 이상 설 수 없다. 그는 알아야 한다. 그가 부여 받은 사명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그가 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을 못한다는 핑계나 걱정은 성립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모든 걱정일랑 뒤로 하고 그는 사명을 향해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라고 명하시기 때문이다. 그에게 다시금 확신을 주신다.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겠노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모세는 다시금 다섯 번째로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토씨를 달며 이견을 제시한다(4:13-17). 하나님께서 방금 전에 모세에게 가라고 명하셨는데, 이제는 그 말씀을 정면으로 받아치면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라는 것이다. 자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독자로서 모세가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노하셨다(4:14).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의 청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셨다. 아론을 그의 대언자(代言者)로 삼아 보내시겠다는 것이다. 말을 잘 못한다는 모세의 걱정도 들어주면서 모세의 체면과 입장을 세워주신 것이다. 이제 모세와 아론은 동역자로서 일하게 되었지만 동일한 위상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아론은 모세의 입 역할을 할 것이며 모세는 아론에게 그가 섬겨야할 하나님이 되었다. 모세의 권위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립적이고 독자적이었다.

 

 

 

[18-20절]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본 단락부터 모세의 이야기는 미디안에서 애굽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네 개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18-20절에서 모세는 애굽으로 떠나려고 결심한 후에 먼저 장인 이드로의 허락을 받으려 한다. 미디안의 제사장이며 일곱 딸을 둔 한 가문의 족장인 이드로의 입장에서 큰 딸의 가족을 먼 곳으로 보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위에게 몹쓸 짓을 한 야곱의 장인 라반과는 달리 사위 모세를 선대한 장인이었다. 비록 인간적으로는 서운하고 섭섭하였겠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떠나는 사위 모세를 위해 복을 빌어주는 이드로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 이드로의 행위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우리가 우리와 가까운 사람을 기꺼이 그들이 가야만 하는 삶의 방향으로 가도록 허락하고 내어줄 수 있을 때, 그리고 보낼때 그냥 보내지 않고 샬롬을 복을 빌어주고 떠나 보낼 수 있다면, 그들은 사실상 어떤 의미에서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드로는 “평안히 가시게나! 샬롬!”하면서 사위와 딸 자식의 가족을 먼 곳으로 보냈다. 육신적으로는 그들이 멀리 떠나갔어도 그들은 이드로의 마음에 평생 함께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떠나보낸다면 훗날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장인의 복된 허락을 받은 후에 모세는 다시금 하나님으로부터 애굽으로 가는 일에 관한 확신을 받는다. 하나님의 격려와 용기를 받은 후에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향한다. 끝으로 내레이터는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앞으로 모세가 잡은 지팡이가 예사롭지 않는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능력과 권위의 상징인 지팡이를 손에 든 모세는 드디어 이스라엘 민족으로 구원자와 지도자로 새롭게 탄생한다.

 

 

[21-23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애굽으로 출발하기 전에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몇 가지 지시사항을 주신다. 앞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이적들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는 것이다. 야웨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함을 드러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 주지 않게 할 것이라는 모순적인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이 둘은 모순적이 아니라 서로 상승작용을 하게 된다. 기적과 이적들은 애굽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시는 일들이다. 한편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은 애굽에 대항하는 일로서 이스라엘에게는 간접적으로 위하는 일이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애굽의 장자를 죽이게 되고 그 후에 이스라엘을 보낼 수밖에 없다면 이보다 위대한 승리는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애굽으로서는 사상 최대의 패배를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적의 강도를 한층 더 높여 갈뿐 아니라 바로의 저항의 강도 역시 높여감으로써 최대의 승리의 결과를 얻고자 함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또 다른 지시사항은 바로에게 해야 할 말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라는 사실을 바로에게 천명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에게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들에게도 엄청난 선언이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관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첫째 아들이다! 장자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와 자긍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볼 때마다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든든한 생각이 든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면류관이요 긍지요 자랑이요 명예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이보다 더 위대한 명예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된 이스라엘을 건드린다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 사실을 바로는 알고 있어야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데 그 당연한 의무와 권리를 박탈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린다. 하나님의 장자를 멸시한다면 멸시하는 사람의 장자의 생명을 거둬들일 것이다. 바로는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첫 아들이라는 사실을 바로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면 그 결과는 치명적이 될 것이다. 그는 엄청난 값을 지불해야한다. 자신의 장남을 잃게 되는 비극이 그 값이다.

 

 

[24-26절]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본 단락은 출애굽기에서 가장 어렵고 수수께끼 같은 본문이다.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등장하는 에피소드이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라고 하는데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왜 가고 있는지 전혀 문맥이 잡히지 않는 에피소드이다. 야웨께서 모세를 만나 죽이려고 한다. 매우 갑작스런 일이다. 사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 대해 상당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던 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갑자기 아무런 분명한 이유도 없이 그를 죽이려드는가? 반면에 이 에피소드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 중에 하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모세를 자신의 위대한 구원사역을 위해 준비시키고 훈련시키지 않았는가? 그에게 오래 참으시면서 까지 확신을 심어주시면서 사역자로 부르셨다. 그래서 모세 역시 오랫동안 거절하고 머뭇거렸던 순종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런 모세를 하나님께서 죽이려 든다니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창세기의 기사 가운데 야곱이 한 밤중에 얍복 강가에서 이름 모를 어떤 사람과 갑작스럽게 조우한 사건처럼(창 32장), 이 사건 역시 매우 비상한 만남을 보여준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 들었을까?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아직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했다. 문제는 이 문제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해석의 역사를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해석자들은 모세를 죽이려는 하나님의 동기를 찾는 일에 몰입하였다. 그러나 모두 실패한다.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하신 결심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모세에게 죽을 만한 잘못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판단을 결코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세 안에 있었다. 모세가 죽어야 마땅한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거룩성과 관계가 있는 죄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성함, 거룩성이 침범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대답이 서서히 분명해지기 까지 우리는 먼저 십보라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행동을 통해 모든 위험과 긴장이 해소되고 모세는 하나님의 살해의 손길에서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보라의 행동 역시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먼저 그녀는 모세를 구출하기 위해 사건에 뛰어든다. 그녀는 혹독하게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다. 돌칼로 아들의 생식기의 포피(包皮)를 잘라내어 모세의 ‘발’(생식기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에 갖다 대었다. 피로 범벅된 상태로 할례의 예식이 상징적으로 모세에게 시행되었다.

 

 

모세는 언약의 증표가 되는 할례예식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엄청난 실수요 잘못이다. 성결(聖潔)의 표로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는 외형적 증표였다. 방금 전의 단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첫 자녀요 장남이라고 하였다(22절). 하나님의 아들로 성별되었다는 증표로서 할례가 행해지는 것인데, 모세는 이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장남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애굽으로 부임하면서도 자신의 집에서 그의 장남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었다. 따라서 십보라의 행위는 모세를 부끄럽게 만든 위대한 구원 행동이다. 이스라엘의 장자를 포함하여 첫 번째 태어난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분에게 성별되었다. 따라서 그것을 값 주고 사오지 않으면(‘구속’[救贖]의 의미) 그들이 생명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아들의 할례는 모세가 피를 통해 구속을 받고 하나님께 성별되는 수단이 된다. 할례가 없이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떨어져 나간다(창 17:14; 수 5:1-19). 성결은 생명보다 귀하다. 하나님은 육신의 생명보다 성결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본 단락에서 십보라의 행동이 모세를 구원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고 괄목할만한 일이다. 그녀는 출애굽기에서 위대한 신앙의 여인들 - 애굽 왕의 칙령을 무시해가면서 까지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산파 여인들, 모세를 길렀던 어머니와 모세의 누이, 모세를 물에서 구출해 내었던 바로의 딸 공주 - 의 반열에 서있다.

 

 

이 사건은 예시(豫示, foreshadowing)적 의미를 제공한다. 아들의 할례를 통한 피를 모세의 발에 바름으로써 하나님의 무서운 죽음의 심판에서 구출 받은 사건은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출 받게 되는 것을 미리 보여준다. 이 사건은 모세가 생명을 위협받는 경험을 견디어내듯이 장차 이스라엘도 동일한 생명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견디어 내야하며 그런 가운데 피를 통하여서 생명이 보존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십보라의 중재를 통하여 모세가 구원을 받았듯이 모세의 중보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도 예시되고 있다.  

 

 

[27-31절]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처음으로 아론이 능동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앞서 그는 수동적으로 모세의 대언자 역할을 위임받은 일이 있었다(4:13-17). 본 단락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직접 나타나 광야로 나가 모세를 영접하라고 명하신다. 아론이 광야로 나가 모세를 만나러 가야한다는 사실은 모세와 아론의 관계가 수평적으로 평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론은 모세의 조수 역할을 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절대적 권위는 모세에게 있지 아론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을 아론은 평생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후에 황금 송아지 사건에서 아론은 이 점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엄청난 실수를 범하게 된다. 비록 두 사람이 혈연관계에 있었지만 단순히 혈연관계로 만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들이 받은 사명에 의해 설정된다. 두 사람은 앞으로 있게 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역에 동역할 것을 상의한다.

 

 

본 단락에서 중요한 사항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백성들이 그들을 신뢰하고 믿었다는 것이다. 4:1-9에서 이슈가 되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그를 보낸 자를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는데, 본 장의 끝에 와서 그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알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에 이르게 된 과정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믿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 가운데 모세도, 아론도, 징조들도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의 정점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그들이 믿은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믿은 것은 “야웨께서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의 현장을 직접 찾아오시고(‘파카드’) 그들의 고통을 직접 보셨다(‘라아’)”는 사실이었다. 비로소 그들은 그 하나님께 머리 숙여 경배하였다. 이것은 대단한 변화이다.


1)  박윤선,『성경주석: 창세기 출애굽기』(서울: 영음사, 1968), p. 448.
2) J. Gerald Janzen, Exodus,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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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 신앙교육(5): "왜 불행이 당신에게 일어납니까?" 류호준 2008.11.30 9113
706 설교: "그리스도, 우리의 재판장"(대림절 설교) file 류호준 2008.12.06 9700
705 신앙교육(6): "하나님은 왜 당신이 불순종하도록 허락하십니까?" [2] 류호준 2008.12.09 8681
704 신앙교육(7): "지은 죄들에 대해 어떤 변명들을 둘러대십니까?" 류호준 2008.12.13 9453
703 신앙교육(8): "괜찮은 죄인인가 몹쓸 죄인인가?" 류호준 2008.12.22 9588
702 출애굽기 1장 해설 [4] 류호준 2009.01.10 15080
701 출애굽기 2장 해설 류호준 2009.01.10 14361
700 출애굽기 3장 해설 [1] 류호준 2009.01.10 16305
» 출애굽기 4장 해설 류호준 2009.01.10 18152
698 신학 에세이: "금식에 관하여" 류호준 2009.01.30 9692
697 신앙교육(9):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류호준 2009.03.15 8641
696 신앙교육(10): "성령은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하십니까?" 류호준 2009.03.15 8822
695 설교: "생명을 확증하는 기쁨" 류호준 2009.03.16 9394
694 설교: "하늘 시민권" [1] 류호준 2009.03.22 10576
693 신앙교육(11): “당신이 거듭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십니까?” 류호준 2009.03.23 8889
692 설교: "우리의 신학자들, 우리의 설교자들" [1] 류호준 2009.03.28 8257
691 설교: “하찮은 것을 추구하는 삶” 류호준 2009.03.29 9069
690 신앙교육(12):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하는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류호준 2009.04.11 8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