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그리스도, 우리의 재판장”

마태 25:31-46


[내일은 항상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말하기를, “내일은 항상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는 둥근 원(圓)과 같다. 인생은 돌고 돋는 물레방아와 같다. 한 세대가 가면 또 다른 세대가 온다. 아침에 태양이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진다. 바람은 남으로 불어 북으로 돌아간다. 바람 역시 물레방아처럼 돌고 돌아 처음 자리로 돌아온다.”라고 합니다.


 

모든 시냇물과 강물은 흘러 바다로 가지만 바다를 채우는 일은 없습니다. 시냇물은 마침내 그 시작했던 곳으로 다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돌고 돕니다. 만사가 그렇습니다. 식탁을 차립니다. 먹습니다. 접시와 그릇을 닦습니다. 건조대에 말립니다. 찬장에 집어넣습니다. 그 다음날 다시 여러분은 똑같은 일을 합니다. 이처럼 그릇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다시 돕니다.


 

이 세상에,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것이야! 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야”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모두 우리 앞선 시대에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있었던 것이 앞으로 있게 될 것이며, 예전에 이루어진 일이 앞으로 이루어질 일입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삶이란 끝없는 반복의 연속입니다. 한 일이 지나면 다른 일이, 그리고 그 일이 지나면 또 다른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둥근 원(圓)과 같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내일’이 있을 것입니다. 항상 또 다른 ‘내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뭐 그리 신경을 쓰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좀 쉬어 가면서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내일이 있는데 왜 그리 서둘러야 한단 말입니까? 내일로 미루면 어떨까요? 내일이 있지 않습니까? 삶과 시간은 돌고 돈다고 했는데 다음번 돌아오는 기회와 시간을 잡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와 같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말했습니다.

 


[은혜의 기회는 항상 있다]


물론 이에 해당하는 기독교인들의 버전도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 언제나 은혜는 있다. 
   ․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언제나 용서는 있는 법이지.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고? 잘못을 했다고? 죄를 지었다고? 
   ․ 괜찮아. 문제없어. 걱정하지 마. 
   ․ 은혜는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야. 
   ․ 언제나 새로운 출발이 있기 때문이야. 
   ․ 새로운 시작은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한 젊은이가 그의 아버지께 물려받을 상속 재산을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받아서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허랑방탕하며 살다가 결국 돼지와 함께 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고향에는 아버지와 집이 있었습니다. 뒤늦었지만 깨우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기쁘게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를 위해 큰 잔치까지 열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모든 것을 용서 받았습니다.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그에게는 ‘다시’라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에게 ‘내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비유 중 가장 사랑받는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내일은 언제나 있다!”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포도 농장 주인이 있었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구하려고 이른 새벽에 인력시장에 나갔습니다. 얼마간의 사람을 구해 왔습니다. 오전 늦게 다시 나가 여러 사람을 구했습니다. 오후 늦은 시간, 일을 마치기 한 시간 전에 몇몇 일꾼을 더 불러들였습니다.

 

일을 마칠 시간이 되자 주인은 일꾼들을 불러 일당을 계산해 주었습니다. 모두 똑 같은 일당을 받았습니다. 원래 그렇게 하기로 하고 불러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 같은 액수의 일당을 받았습니다.

 

일찍 와서 일한 사람들이 심한 불평은 털어놓습니다. “공평치 않습니다!”라고.

그러나 포도원 주인의 얼굴색이 굳어졌습니다. 그가 묻습니다. “아니 내가 처음에 당신들에게 약속한 대로 지불한 것이 아닌가? 당신들은 내가 늦게 온 사람에게 관대하게 주었다고 투덜대는 것이요? 내가 당신들에게 한 약속을 안 지켰소?”

 

우리는 이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오후 늦게 포도원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럴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우리가 소망하고 바랐던 것이 맞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 은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시간은 언제나 있다. 
   ․ 기회는 언제나 있다. 
   ․ 그러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 이번 시간이 아니라면 다음 시간이 있을 것인데 뭘!

 

물론 아버지는 기다리십니다. 여러분은 작업 종료 한 시간 전에 들어와 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른 새벽에 와서 일한 사람이 받은 은혜만큼 동일한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시 은혜로우십니다!

 

그렇습니다. 내일은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내일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사는 ‘내일’이 항상 있을 것입니다. 미래에, 내일에, 우리를 기다리는 은혜가 항상 있을 것인데 왜 굳이 지금 해야 한단 말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모두 탕자의 비유나 포도원의 일꾼 비유와 같은 비유들이었더라면, 다시 말해 다음 기회가 있다는데 왜 굳이 지금 뭔가를 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 비유들이 예수께서 하신 유일한 비유들이었더라면, 그리스인들처럼 여러분들도 미래에 대해 내일에 대해 마음 편히 태평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열려져 있는 내일을 향해 여러분은 마음대로 떠다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비유들 말고 전혀 상반되는 비유들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결혼 잔치에 초대 받은 열 명의 처녀들에 관한 비유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등잔에 기름을 준비해 놓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도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신랑이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잔치에 들어오라!” 그런데 기름이 다 없어진 것입니다. 그 사이 연회장의 문이 닫혔습니다. 문밖에 선 다섯 처녀들이 문을 세차게 두드려 댑니다. 문을 긁습니다. 사정합니다. 울며 소리칩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묻은 닫힌 채로 있습니다. 그 처녀들은 이미 기회를 가졌었으나 그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 어느 날, 내일이 없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 언젠가 내일이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

 

   ․ 어느 날, 내일로 들어가는 문이 꽝하니 닫힐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의 문이

     그렇게 닫혔듯이 말입니다. 
   ․ 더 이상 내일이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주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기가 없는 말씀일 것입니다. 대중적이지도 않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처녀에 관한 이야기 보다 탕자의 이야기를 훨씬 좋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태가 살던 당시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마태는 열 처녀의 이야기와 오늘 읽은 염소와 양의 이야기를 그의 복음서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마태복음서는 대략 주후 85 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즉 예수께서 “내가 곧 돌아오리라”고 약속하신지 약 5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교회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고 지겨워졌습니다. 발꿈치를 들고 50년 동안 서있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50년 동안 기대감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람을 엄청나게 지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40배 이상 심각합니다. 우리는 2000년이 넘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하는지 그 이유를 여러분에게 말씀해 드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 왜 무엇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오랫동안 잡아 두고 있는지에 대해 속 
     시원히 알려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

 

 


[최후의 날과 기다림]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 있습니다. 성경 한 구절에 여러분의 관심을 집중시켜드리는 일입니다. 이 구절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는 것입니다.

 

   ․ 이 구절은 신약성경이 최후의 심판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 알려지지 않는 미래로부터 최후의 심판을 끄집어내어 우리의 삶의 한 
     복판에 놓고 약간의 맛을 보게 합니다.

 

“인자가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영광 가운데 다시 와서, 하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 때에 세상 모든 나라가 그 앞에 모일 것이며,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인자가 사람들을 나눌 것이다. 인자는 자신의 오른 쪽에는 양을, 왼쪽에는 염소를 둘 것이다” 예수께서 마태 25:31절에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니케아 신조에서 다음과 같이 메아리(反響)칩니다. 
        “그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문구는 신조(信條) 가운데 인기 있는 조항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하나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적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란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횡적이고 독재적인 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민주적이고 자상한 아버지 상을 선호하는 문화에서는 잘못을 책망하고 최후의 심판을 집행하는 신의 모습은 견디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하나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에게 오는 용서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는 심판의 메시지로 가득 합니다.
   ․ 노아 홍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 바벨 탑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의 날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 세 가지 이야기 모두는 심판을 집행하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상당히 많이 심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 그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도시와 마을들을 무섭게 정죄하셨습니다. 
      궁극적인 악의 대명사인 소돔 성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차라리 그들 
      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불들을 피할 수 있다고 
     기대하느냐고 하시면서 그들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수많은 
      비유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 행한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자기가 행한 행위대로 거기에 알맞은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후 5: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럽의 오래된 성당들의 입구 위를 보시면, 끌로 깎아 새긴 최후의 심판 장면이 벽면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중앙에는 그리스도의 대(大) 심판대가 있고, 정죄 받은 자들은 그의 왼쪽에, 자유를 선언 받은 자들은 그의 오른 쪽에 있습니다.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교회 안에서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 먼저 너희는 최후의 심판을 깊이 생각하라. 
   ․ 당신의 온 삶과 인생을 최후의 심판 아래서 살았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에게 주신 성경의 가르침은 그러한 성당 입구와 닮았습니다. 오늘의 비유의 말씀은 돌에 새겨진 심판대 장면과 유사합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을 읽는 각 사람은 귀담아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즉 최후의 날은 반드시 올 것이며, 그 때 나라들의 ‘목자’(그리스도)가 양들과 염소를 나눈다는 말씀입니다. 양들은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갈라놓을 것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은 너희들이여, 
         와서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준비하신 나라를 물려받아라.”

 

그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해 준비한 
         영원한 불에 들어가거라.”

 

이 말씀들은 단순히 개인적 의견이 아닙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계시의 말씀입니다.

 

 


[대림절에 무엇을 할 것인가?]

 

인자가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영광 가운데 다시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입니다. 그 때에 그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사람들을 나눌 것입니다. 오른 쪽의 양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의 궁핍에 대해 반응하고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배고플 때, 너희는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마를 때, 너희는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나그네로 있을 때, 너희는 나를 초대해 주었다.
         내가 헐벗었을 때, 너희는 내게 옷을 입혀 주었다.
         내가 아플 때, 너희는 나를 돌보아 주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는 나를 찾아 주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의 귀에는 이 말이 그렇게 옳게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들이 아닌 사람들도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까? 비 기독교인들도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주고. 병든 자를 돌보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비기독교문헌들 - 유대문헌이나 이집트 문헌들 - 을 읽어보아도 이와 같은 선행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어야 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목을 것을 주어야 하고 벗은 자에게 옷을 주어 입혀야 합니다.

 

달리 말해, 이 모든 행위들은 딱히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고대 중동의 지혜 가르침들입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배우고 가르쳐야할 지혜들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한다면 이 비유의 요점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 최후에 날은 올 것이며 그 날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재판장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 그런데 최후의 날, 인류 종말에 우리 앞에 서 계실 재판장이 지금 
     고통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미 지금 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물려받아라. 왜냐하면 네가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물려받아라. 너희가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것입니다.
        “내가 배고팠을 때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말랐을 때 너희가 내게 마실 물을 주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나와 궁핍한 사람은 하나다.
         나는 고통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나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 여기 예배하는 사람들 가운데 입니까?
   ․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이는 곳에 입니까?
   ․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입니까?
        아마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변방의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 사람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별 볼일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대하는 것이, 곧 예수님께 하는 것입니다.

   ․ 최후의 날에 재판장이신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 즉 고통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고 계신 것입니다.
   ․ 예수님, 우리의 최후의 날에 재판장이신 그분은 고통 하는 우리의 
     이웃들 가운데 숨어 계십니다.
   ․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단순한 행동들 가운데, 이미 지금 최후의 심판의 
     드라마는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는 소박한 행동들 가운데, 이미 지금 최후의 
     심판의 드라마는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 병든 사람을 찾아 돌아보는 단순한 행동들 가운데, 이미 지금 최후의 
    심판의 드라마는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1519년 9월, 루터의 가까운 친구인 Frederick of Saxony가 중병에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 루터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위로 했습니다.

 

“당신이 병들었을 때 나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도 당신 안에서 병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몸에서 나를 향해 ”나는 병들었어!“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못들은 척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병과 같은 악들(病魔)은 크리스천들인 우리가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짊어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내 형제들 중 가장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대림절 둘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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