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그리스도인’과 ‘예수쟁이’


류호준 목사


‘기독교’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가? 열 사람에게 기독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서로 다른 열 가지 대답을 내 놓을 것 같다. 미국이나 서구 유럽에서 들어온 외래 종교라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 이들은 불교와 같은 종교는 우리의 재래종교이고 기독교는 수입종교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 서양식 사고방식이나 특정한 삶의 스타일을 제공하는 문화적 영향력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개화기를 선도했던 교육제도의 상당부분을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고(예, 이화학당, 연희학당, 숭실대학, 배제학당, 오산학교 등), 의료부분(예, 세브란스)에서도 그러했다.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영향력도 마찬가지였다. 국산장려운동을 주도한 조만식 선생이나, 3.1운동을 주도한 33인중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지금도 정부에서 지원하는 사회복지관의 상당부분을 지역 교회들이 맡아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기독교’하면 그 용어 속에 들어있는 ‘그리스도’(基督)를 떠나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종교이다. 또한 ‘그리스도’ 하면 ‘예수’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라는 선포가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2천 년 전 중동의 한 자그만 나라인 유대 땅에서 태어난 역사적 인물 ‘예수’라는 분이 수천 년 동안 구약성경에서 지속적으로 가리키고 말해온 ‘메시아’(‘메시아’는 히브리어로 헬라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라는 것이 신약성경의 주요한 선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예수는 메시아다”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이다. 따라서 예수를 떠난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으며 예수가 없는 기독교 신앙은 불가능하다.

지금이야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종교가 되었지만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인하면 ‘예수쟁이’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독교는 조상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는 불량한 신흥종교로 비난을 받았으며, 종종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일로 인하여 가족들로부터 혹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며 심한 핍박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전통적인 유교가정에서 며느리가 예수교(예전에는 ‘야소교’라 불렀다)를 믿게 되면 집에서 쫓겨나던 일이 엊그제의 사건이었다. 이제는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가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초대교회시대처럼 늘 사회적 변방 사람들의 모임이나 비주류 집단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소외와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독교인이 얻게 된 자랑스러운 훈장들이었다.     

‘크리스천’(christian)은 우리말로 ‘기독교인’(基督敎人)이라 부르는데, ‘기독’(基督)이란 ‘그리스도’(Christ)를 한자어로 번역한 용어다. 따라서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과 ‘크리스천’이라는 용어는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이다. 물론 ‘기독교인’이란 한자어는 기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고 자연히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에 대해 더 많이 말하는 교인과 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그리스도)시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가 도래할 것이며, 그의 대속(代贖)적인 죽으심을 통해서만 모든 죄들이 씻김을 받을 것이며 그의 대속적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들이 열렸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서, 누가 크리스천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 안에 자신의 삶과 인생이 감싸여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천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여 처음에는 교인으로 다니다가 그 다음에는 신자가 되고 그 다음에 제자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한 어조로 가르치기를, 제자란 다른 것들을 뒤로 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며, 예수 안에서 자신의 인생과 삶을 찾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Savior)와 주님(Lord)으로 고백하고 영접한 후로는 바로 제자의 삶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칭

성경에는 ‘크리스천’(그리스도인)이란 용어가 세 번 나온다. 세 번의 경우 이 단어의 의미에 역사적 색깔과 배경을 더해준다. 이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사도행전에서이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행전 11:26).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게 된 것은 대략적으로 주후 30년경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란 명칭은 대충 5년 뒤였을 것이다. 왜 그 때일까? 이 때 까지만 해도 예수를 따르는 일은 유대인들의 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런데 그 때 즈음에는 상당한 종교적 갈등과 사회적 분리가 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이 아닌 나머지 인종(대부분 그리스인들)간에 발생하였다. 그러나 시리아의 안디옥 지방에서는 상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예수를 믿었던 유대인들이 그리스인(헬라인)들에게 예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헬라인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두 인종을 하나로 묶었는가? 그들을 하나로 묶은 공통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사랑했다는 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중심으로 그들은 하나가 되었으며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라고 부른 것이다.

- “예수의 목적은 자신 안에서 그 둘로 한 새로운 인류(사람)를 창조하여 화평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었다.”(엡 2:15b)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새로운 창조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옛것은 지나
    갔으니 새것이 여기에 있도다!”(고후 5:17)

크리스천이란 용어가 사용된 두 번째 예가 사도행전 26:28에 기록되어 있다. “네가 몇 마디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냐?” 담대하고 당돌한 예수쟁이 바울이 당시 총독인 베스도와 그 지역을 다스리는 왕 아그립바에게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 되라고 강력하게 전도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일이 일생일대의 엄청난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옳았다. 예수를 따르는 일이 삶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때를 놓치고 만다. 중대한 결정을 나중으로 연기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결정하지 않고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중대한 결정이라는 것임을 몰랐던 모양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용어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경우는 베드로전서 4:16에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예수를 따르는 일에는 많은 엄청난 유익과 혜택이 있지만, 그것이 고난이나 어려움이 없는 평안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여길 경우 - “예수의 이름을 지니는 사람, 즉 ‘예수쟁이’ 혹은 ‘그리스도인’” - 종종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외부로부터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인 반응을 불러들이게 된다. 지나치면서 던지는 빈정댐이나 조롱서부터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까지, 온갖 부정적인 반응에 직면하게 된다. 어떤 형태이든지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이유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겪지 않을 그런 배척과 핍박과 조롱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고한다.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위해 사는 일을 통해 주어지는 기쁨과 평안은 충분히 그런 고난과 어려움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주전(主前, B.C.)과 주후(主後, A.D.)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역사의 분수령이기도 하지만 우리 개인의 삶의 역사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올해가 2008년이다. 언제서부터 따져서 2008년이란 말인가? 예수의 출생을 기점으로 해서가 아닌가? 서양의 역사가들은 모든 세상의 커다란 사건들을 예수의 출생연도와 관계하여 시기를 정한다. 예를 들어 다윗 왕은 B.C. 1,000년 경 사람이다. 그리스도 이전 1,000년경의 사람이란 듯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 2,000년 전 베들레헴이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한경직 목사는 A.D. 1902년 즉 그리스도 출생이후 1902년이 지난 후에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다. 이처럼 예수의 탄생은 인류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역사를 양분한다. ‘주전’(主前)과 ‘주후’(主後)라는 말이 그것이다. 알파벳 B.C,는 before Christ를 가리키고, A.D.는 라틴어인 anno Domini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약어로 “우리 주님의 해(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B.C.를 ‘주전’(主前)으로 A.D.를 ‘주후’(主後)라고 부른다. 인류 역사 구분을 우리 주님이 태어나시기 전과 태어나신 후로 나눈 것이다. 흥미 있게도 고신대 총장을 지낸 신약학자 황창기 박사는 ‘주후’(主後, A.D.)라는 용어 대신에 ‘주다해’라는 약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주님이 다스리는 해”의 약어다. 이 용어는 신학적으로 ‘무천년설’을 잘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주다해 2008’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여 천상의 보좌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지 2008년이 되는 해”라는 뜻이다. 참고로 요즈음 서양에서는 A.D.를 사용하는 대신에 B.C.E.(Before Common Era)를 사용한다. 기독교적 색채를 없애고 좀 더 중립적인 용어를 선택하려는 다원화된 시대상을 반영 하는 것 같다.  


2008년 10월 14일에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류호준 2020.08.24 4397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928
709 야곱이 드디어 아들을 만나다!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9.28 9758
708 설교: "그리스도, 우리의 재판장"(대림절 설교) file 류호준 2008.12.06 9700
707 신학 에세이: "금식에 관하여" 류호준 2009.01.30 9692
706 설교: "성만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류호준 2009.10.04 9690
» 신앙 에세이: '그리스도인'과 '예수쟁이' 류호준 2008.10.14 9659
704 설교란? (Rev. Scott Hoezee) [2] 류호준 2007.10.05 9592
703 신앙교육(8): "괜찮은 죄인인가 몹쓸 죄인인가?" 류호준 2008.12.22 9588
702 설교: "은혜: 연공서열 파괴자" [6] file 류호준 2007.09.08 9565
701 꿈꾸는 자 요셉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6 9531
700 설교: "당신의 몸은 비싼 몸입니다!" file 류호준 2007.03.19 9526
699 로마서 묵상(22): “정자(精子)인가 약속인가?” file 류호준 2010.08.31 9487
698 신앙 에세이: "TGI Friday's 유감" [2] 류호준 2008.10.05 9476
697 설교: "하나님의 날개" 류호준 2009.11.22 9473
696 악을 선으로 갚는 요셉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9.28 9470
695 신앙교육(7): "지은 죄들에 대해 어떤 변명들을 둘러대십니까?" 류호준 2008.12.13 9453
694 설교: "그리스도, 우리의 착한 목자" 류호준 2010.04.25 9409
693 설교: "생명을 확증하는 기쁨" 류호준 2009.03.16 9394
692 큐티를 위한 스가랴서 해설 (17) 류호준 2009.11.04 9366
691 설교 : "물에서 태어난 사람들" file 류호준 2007.04.16 9343
690 (15) 무지개를 바라볼 때마다 (창 9:1-29) 류호준 2007.11.09 9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