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방관자”(bystander)이십니까  “일어서는 자”(upstander)입니까?

 

불의한 일들, 부적절한 행동들, 공격적 행동들, 파괴적 언사들, 악성 소문 유포 행위들,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기관들, 미움과 증오의 행위들, 독선과 아집에서 나온 정책들, 각종 폭력들, 평화를 해치는 생각과 행위들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오로지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방관자라 합니다. 곁에 서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사람들입니다. 방관자를 영어로 bystander라 합니다. “곁에(by) 서 있는 사람(stander)”입니다. 좋게 이야기하자면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뜻으로 방관자란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 일에 개입하면 자신에게 손해가 될듯하여 쳐다보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소심한 방관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손을 쓸 수 있는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팔짱을 끼고 쳐다보고만 있는 사람은 “대담한 방관자”입니다.

 

한편 영어로 bystander(방관자)와 반대되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Upstander입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일어(up) 서는 사람(stander)”입니다. 업스탠더는 누군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보면 그냥 있지 않고 용기를 내어 정의의 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거나 아니면 작지만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에 사로잡혀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더욱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자베르 경감들도 아닙니다. 아니면 머리에 붉은 티를 두르고 위협적으로 시위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을 “일어서는 사람”(upstander)라고 부르는 이유는 약자들과 궁핍한자들과 억울한 자들과 연대하겠다는 의미에서 일어서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뜻을 같이하여 일어서는 사람들은 어깨를 같이 하고 연대의식(solidarity)을 갖고 “화해와 평화”(reconciliation & Peace)를 구현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자그마한 신앙공동체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신앙 공동체의 멤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방관자”(bystander)가 아니라 “일어서는 자”(Upstander)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적 예들 들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기는 손 하나 까딱 거리지 않고 쳐다보는 자가 되지 마시오. 허덕이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드럽고 온화하게 격려하시오. 탈진하거나 고갈된 사람, 빈손털이가 된 사람에게 다가가 그의 발끝까지 잡아 일으키시오. 각 사람에게 참을성 있게 대하고 기다려주시오. 각 사람이 처한 어려움들과 그들의 궁핍한 사정들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시오. 상대방이 아주 영적으로 심적으로 예민할 때 그의 신경을 건드리면서 신앙이라는 미명아래 함부로 폭언을 퍼 붓지 마시오. 상대방 속에 들어 있는 가장 좋은 점을 찾아보시오. 항상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의 장점을 끄집어내세요. 선한 것, 착한 것, 좋은 것만을 간직하고 지켜나가세요. 악으로 물든 것은 무엇이든지 던져버리세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쳐다보는 자”(bystander)처럼 있지 말고 의로운 뜻을 펼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여 “일어서는 사람”(upstander)이 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정의(justice)를 위해, 화해(reconciliation)를 위해, 화평(peace)을 위해 일어서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건강한 사랑”과 “건강한 미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선한 것은 무엇이든지 사랑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지 미워하는 건강한 영성의 소유자들입니다. 신앙공동체 안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천 년 전 마케도니아 데살로니가 도시의 작은 신앙공동체를 향한 바울 사도의 바람이었으며 2천 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의 작은 신앙 공동체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바람일 것입니다.

 

Yellowstone National Park, Wyoming, USA

yellowstone NP.jpg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류호준 2020.08.24 4587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930
709 신앙에세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겪은 불행한 사건” file 류호준 2017.10.25 539
708 신학 에세이: “창조에 관하여” file 류호준 2020.07.24 539
707 신학 에세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백성의 거룩함의 의미” file 류호준 2020.08.02 540
706 일상 에세이: “차간(車間) 거리를 확보해야 합니다!” [1] file 류호준 2018.04.09 542
705 클린 조크: 끔찍한 용어들, 그 맛을 잃다! file 류호준 2018.02.14 543
704 일상 에세이: “이별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소망” [1] file 류호준 2020.04.06 545
703 일상 에세이: "너무 어려운 전문용어들" file 류호준 2018.03.15 549
702 평신도를 위한 성경공부: “그리스도인, 영광스런 호칭” 류호준 2018.02.14 551
701 일상 에세이: “구치소 풍경과 영치금” [1] file 류호준 2018.11.23 557
700 일상 에세이: "김훈과 육필원고" [3] file 류호준 2018.04.28 559
699 수난주간 묵상: "40일간 광야에서(1)" file 류호준 2018.03.28 560
698 "신학교육에 일침을 가하는 지혜자의 일갈!" [1] file 류호준 2017.09.19 560
697 신앙 에세이: “우리의 총구(銃口)는 어디를 향할 것인가?” file 류호준 2016.07.22 562
696 일상 에세이: “짜장면 한 그릇에 한번쯤 영혼을 팔아도 된다!” file 류호준 2019.01.04 564
695 클린조크: "스타벅스의 상술인가 하나님의 섭리인가?" file 류호준 2017.09.22 569
694 일상 에세이: “너희가 호롱불을 아느냐?” [1] file 류호준 2018.04.07 571
693 일상 에세이: “집으로....” file 류호준 2018.03.12 571
692 평신도를 위한 성경공부: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을” file 류호준 2017.12.06 571
691 일상 에세이: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크리스마스 저녁 모임” file 류호준 2018.12.25 575
690 “개정증보판《아모스서》출간에 붙여” file 류호준 2020.07.20 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