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성경의 기본적 가르침으로 돌아가시오.”

요한복음 8:31-41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 앞에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대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가 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신 아버지만 한 분 계십니다." (요한복음 8:31-41, 표준 새번역)

 

 

 

갇혀있는 삶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참으로 자유를 누리고 사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희귀합니다.

     ․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손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라온 과거에 의해 속박되어 있습니다.

     ․ 또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욕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가면을 쓰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참으로 희귀합니다.

     ․ 사회는 매우 위선적이기 때문에, 진실하기를 목말라 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바라볼 때가 허다합니다.

     ․ 아니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위선적이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참’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본연(本然) 일수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저런 가면을 쓰고 생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참으로 드뭅니다. 거림직한 것, 걸리는 것이 있음으로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마치 속담에 도둑놈이 제 발이 저리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 자신의 동료나 친구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사람,

     ․ 자신들의 부모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사람,

     ․ 사람 만나는 일들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걱정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참으로 드뭅니다. 즉 내면의 자유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

     ․ 건강에 대한 걱정,

     ․ 직장에 대한 걱정,

     ․ 자녀들에 대한 걱정 등등.

            이런 목록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진짜로 자유로운 사람, 내면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을 만나기란 정말로 드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 그들은 마치 커다란 거미줄에 잡힌 파리들과 같습니다.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도 점점 얽혀 들어갈 뿐입니다.

      ․ 그들은 마치 물위에 떠내려가는 나무쪽처럼, 그들을 떠내려가게 하는 어떤 세력이나

        열망, 혹은 강렬한 소원이나 소욕(所欲)에 힘없이 굴복할 뿐입니다.

 

나사렛 지방의 한 회당에서 행한 설교에서 ― 이 설교는 예수가 행하신 설교들 중 최초로 기록된 설교문이다 ― 예수는 자신이 보냄을 받은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해방자로, 석방해주는 자로, 사면을 선언하는 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놀라운 소식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감옥에 갇힌 자들

 

그렇다면 누가 감옥에 갇힌 자들입니까? 여러분과 제가 아닙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 가지 세력들과 영향력들 아래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력들과 영향력에 대해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이 우리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고 하십니다. 해와 악, 좋지 못한 것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마음대로 부립니다. 우리는 종종 악과 해에 휘둘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폭정에서 해방을 얻고 자유를 찾게 되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에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재앙과 재난과 해악에 대해 철저하게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면 도대체 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유에 이르는 길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가르침을 꼭 붙잡는다면 너희는 진짜로 내 제자들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너희가 내 가르침, 내 지침, 내 교훈을 붙잡고 있으면,

     · 너희가 나에게 대한 헌신과 지조를 끝까지 지키어 낸다면

     · 너희가 내 계명을 순종한다면

     · 너희가 내 가르침을 실제로 실행에 옮긴다면

            - 너희는 진짜로 내 제자들이다.

            -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

 

“너희가 내 가르침에 붙어있으면…”

“너희가 내 가르침을 붙잡고 있으면…”

 

(1)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다는 뜻은,

· 궁핍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넉넉하게 베푼다는 뜻입니다. 또한 관대하게 베풀면서도 자기가 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다는 뜻은,

·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과 약점을 보면서도 그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두고 타내는 어떤 사람과 같지 않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다는 뜻은,

· 음탕한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느니 차라리 오른쪽 눈을 뽑아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음탕한 눈으로 쳐다본다면 그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간음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다는 뜻은,

·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껄끄러운 사람이나 보고 싶지 않는 사람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다는 뜻은,

·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과 죄들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6)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다는 뜻은,

·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에게 돌아갈 공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방인들도 다 하는 것입니다.

 

(7)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다는 뜻은,

· 여러분의 보화와 재물을 이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웬 줄 아십니까? 당신의 재물이 있는 곳에 당신의 마음도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8)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잡고 있다는 뜻은,

· 공중의 새들과 들판의 야생화를 여러분의 삶의 모델로 삼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가르침을 꼭 붙잡는다면,”

          “너희가 내 가르침 안으로 이사 들어와 그 안에 거주한다면,

           너희는 정말로 내 제자들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인이 되게 하리라.”

 

이 말씀을 들은 청중들은 몹시 기분이 나빴습니다. 기분이 상한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당신들은 자유하지 못해, 당신들은 속박 아래 있는 노예들이야,”라고 말한다면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이 국가적 전통이 자신들이 자유국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은 자유롭지 못해, 당신들은 종이나 노예와 같아!” 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겠습니까?

 

아마 이런 선언(“당신은 자유롭지 못해!” “당신은 갇힌 자야!”)에 대해 일반적으로 “뭐라고,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요?”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것을 우리의 뼈 속에 깊이 각인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 표현의 자유를,

     · 출판의 자유를,

     · 예배의 자유를,

     · 주거의 자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을 한식으로 먹을지 양식으로 먹을지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내면의 자유

 

그런데 우리는 자유하지 않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아마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너희가 진짜 내면적으로 자유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진짜로 내면의 자유를 누리십니까?” 물론 외형적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겠지요. 외적으로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않고, 헌금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내면적 자유를 누리십니까? 아니지요! 내면적으로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유롭지 않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자유롭고 평안하게 앉아 이야기 하는 것처럼 여러분이 하나님과 마음 편안하게 지내십니까? 뭔가 거북하고 꺼림칙하고 어색하고 불안하고 어쩔 줄 몰라 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외형적 자유만을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자유하지 못하다”고 했을 때 그들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오. 우리는 한 번도 누구의 종이나 노에가 되어본 적이 없소이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우리가 자유해야 한다고 말합니까?”

 

 

거짓에 속아 사는 사람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처럼 행동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지 않았느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너희도 아브라함처럼 나를 영접했어야 했다. 너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통해 실현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를 받아들였어야 했어! 안 그래?” “그러나 오히려 너희는 나를 죽이려 든다. 그러니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일 수가 없지. 너희는 마귀의 자손이야. 악마의 자손이란 말이다. 마귀는 본성상 살인자이거든!”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의 아버지였더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했어야 했지. 왜냐하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거든!” “너희가 정말로 아버지를 사랑했더라면 나도 사랑했어야 했어. 너희가 나를 미워한다면 너희가 아버지도 미워한다는 말이야!”

 

예수님의 질책이 계속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를 보여준 대로 너희가 아버지를 보았어야하는데 너희는 그렇게 아버지를 보지 않았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을 풍자적으로 농담하는 줄 알았느냐? 너희는 나를 알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지?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거든. 그것은 마귀의 환상이야. 마귀가 네가 착각하도록 한 것이야. 너희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기꾼의 희생물이야. 왜 그런 줄 알아. 나를 떠나서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최악의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런 사기에 속아 넘어갔어. 그러나 이런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있거든. 잘 들어보라고.”

너희가 내 가르침을 붙잡고 있으면,

너희가 내 말을 아버지의 말로 받아들인다면,

·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 진리는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투명한 슬라이드(transparency)입니다.

     · 여러분이 예수‘를’(at) 볼 때, 예수님을 ‘통해서’(through)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 여러분이 예수님을 들을 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듣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전체가

          이러한 ‘봄’(seeing),

          이러한 ‘들음’(hearing),

          즉 예수를 통해서 아버지를 ‘보고’ ‘듣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에서 ‘보다’ ‘듣다’는 용어는 가장 많이 사용된 동사들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보는 너희 눈이 복되다. 듣는 너희 귀가 복되다”(마태 13장)고 하셨습니다.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을 들을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순종과 믿음

 

     · 여러분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끝까지 붙잡는다면

     · 여러분이 그분의 말씀들을 순종한다면

               - 여러분은 그분의 진짜 제자들입니다.

               - 여러분은 진짜로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들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진짜로 그분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예수님께] 순종합니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믿습니다.“

 

순종하는 것과 믿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한쪽 면만을 가진 동전은 없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만이 믿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할 때만이 여러분은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파도 위를 걸어갔던 베드로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는 배에서 내려 파도 위를 걸어 예수께로 갔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이니셔티브를 잡고 배에서 뛰어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했던 첫 번째 행동은 어쩔 줄 몰라 그냥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나로 물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래, 이리로 오라!” 예수께서 먼저 베드로에게 명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파도 위를 걷는 일는 오직 예수의 명령에 순종해서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시면, 베드로에게는 다른 길이 없게 됩니다. 오직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는 배를 떠나 예수께로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서있어야 할 위치입니다. 우리가 서야할 자리가 이곳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 우리는 믿음이 가능하기 전에 순종해야합니다.

          · 달리 말해 순종함으로써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도 없습니다.

          · 예수님을 향해 걸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잡지 않으면

         · 그의 제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 진리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순종과 자율

 

우리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우상처럼 섬기고 받들기 시작하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 ‘자율’과 ‘자유’라는 미명아래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행동합니다.

      · 모든 종류의 권세들과 권위들이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 이혼은 결혼의 옵션이 되어가고 있고

      · 자유스런 성은 젊은이들 사이에 자연스런 트랜드가 되어 갑니다.

      ·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공공의 유익은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 개인의 성향과 취향이 종교적 생활에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사회가 ‘자라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 한국 사회에서도 마약과 향락은 점점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 십대의 임신율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가고 있습니다.

     · 범람하는 낙태 행위, 성행위를 통해 전염되는 질병들이 퍼지고 있습니다.

     · 파멸하고 있는 수많은 가정과 개인의 삶들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 반인륜적인 범죄들과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순종과 믿음은 어디로 사라지고, 열매는 없고 무성한 잎들만 남아 있습니다. 무늬만 기독교회가 얼마나 많은지요. 제자도의 값을 치르기를 거부하는 교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듯입니다.

 

사회적인 삶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들에 불순종하는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자기 머리위에 죽음의 길을 내고 있는 어떤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씹고 뜯고 먹고 즐겨라!”

       너희가 나의 가르침 안으로 이사 들어와 살아라!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꼭 붙들고 놓지 말아라!

            · 그러면 너희는 나의 진짜 제자들이다.

              그러면 너희는 ‘참’(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허황된 삶, 피상적인 삶이 아닌 진짜 삶을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삶의 본질을, 삶의 실체를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정말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 그러면 너희는 진정으로 자유하게 될 것이다.

                  · 그러면 너희는 거침없이 인생길을 활보할 것이다.

                  · 마침내 너희는 자유할 것이다(free free at last!)

                  · 죽음도 너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님이 너를 책임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놓지 않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달라붙어있는 것과 관계합니다.

 

 

간척지와 예수님의 가르침

 

간척지를 아십니까? 전북의 새만금 간척지를 기억하시지요?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들고 그 둘레를 돌이나 흙으로 둑을 쌓아 바다 물이 넘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간척지의 제방(堤防)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줍니다.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간척지 안에 산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바다의 수위는 지금 여러분이 누워 있는 간척지 안의 집 보다 5~6미터 더 높습니다. 그런데 간척지 안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제방을 없애버려야 할 것 같아.

          · 답답하잖아. 앞이 탁 트여야 할 텐데 제방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어.

          · 제방만 없으면 망망대해가 잘 보일 텐데.

 

이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손가락질 하며 그를 비난할 것입니다. 바보 같다고 어리석다고 미쳤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럴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보다 더 어리석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방과 같습니다. 둑과 같습니다.

            · 도덕적 혼란의 바다 한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자유의 영역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고 말입니다.

            · 예수님의 가르침은 도덕적 죽음과 영적 파멸에서 우리의 세상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인생은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보여주는 메뉴판을 내놓습니다.

            ·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든지

            · 혼란과 혼돈(chaos)의 세력들에 굴복하든지.

 

어느 메뉴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삶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있는 기본적 법, 모든 삶을 통제하고 있는 근본적인 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붙들면 너희가 살리라!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아멘.

 

 

                         [무지개 교회 주일 설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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