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누가 우리 자녀들에게 말해줄까?”
                                                                       딤후 1:1-5; 시편 78:1-8

                                                                          [성경본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 1:1-5)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편 78:1-8)

                                                                                  [설교전문]

                                                                       [보혜사(위로자): 오네시보르]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두 번째 편지는 슬픔의 기색이 역력합니다. “눈가에 촉촉함을 느끼지 않고” 이 편지를 읽기란 힘들었다고 Handley Moule이 쓴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의 선교경력이 마지막에 이르게 된 때였습니다. 이미 닻이 내려졌으며 하선할 때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다른 배를 타고 또 다른 해안을 향해 가야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작별의 인사를 고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시간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다.”(딤후 4:6-8)

이런 작별의 슬픔이 더욱 컸던 이유는 그가 복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을 때 아무도 그를 돕거나 지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바울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정말로 슬펐습니다. 배반감, 분노, 허탈과 좌절이 뼛속까지 느껴졌습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일들이 그에게도 똑 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의 모든 친구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그중에 한명만은 예외였습니다. 오네시보로!

바울이 로마에 있었을 때 오네시보로는 사방에 수소문해서 그를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이집 저집의 문을 두드리면서 바울의 행방을 수소문했던 것입니다. 잘못하다가는 그도 체포되어 구금당하는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울을 찾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바울이 로마 군인의 감시아래 가택 연금되어 사슬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네시보로는 한번만 바울을 면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나를 자주 격려해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딤후 1:16) 침울해진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고 축 처진 어깨를 두드리면서 기운을 북돋아주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오네시보로와 같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한 문장이나 두 문장정도로 그들을 소개합니다.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 대해 더 이상 알지 못합니다. 오네시보로의 경우도 딤후 1:15-17의 정보 외에는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을 들어보십시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위로자 오네시보로! 향기로운 사람이지 않습니까? 보혜사 오네시보로! 이런 사람이 성자(saint)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교회 이름들 가운데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교회가 없을까? 성 바울교회, 성 누가 교회, 성 마태 교회, 성 베드로 교회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 있는데, “오네시보로 장로교회!” 어떻습니까? 아마 우리 신자들은 이런 이름을 가진 교회에도 익숙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당시 개종한 이방인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오네시보로만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그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이 사실은 초기 이방인 교회에 대한 충격적인 비판적 주석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디모데: 거짓 없는 믿음]

어쨌건 바울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내가 떠난 다음에 이방인 교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누가 내 자리를 대신해서 사역할 것인가? 디모데가 할 것인가?”

디모데를 기억할때마다 바울에게는 많은 것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이 그를 기억할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그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실한 믿음, 신실하고 한결같은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인상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 믿음은 “먼저 너의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스 안에 살아있었는데, 이제 보니 네 안에도 살아있구나”라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지난 세월들을 뒤돌아보고 있습니다. 감사가 그 내면에서 샘솟듯이 올라와 온 몸에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디모데의 신실한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디모데의 믿음에 전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었습니다. 믿음은 어느 날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전수되어 내려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디모데가 갖고 있는 믿음이 그 전에 그의 어머니에게 있었던 믿음이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또 그의 어머니에게 있었던 믿음은 그의 할머니에게 있었던 믿음이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가문을 이룬 집안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에 대해 말해주신 디모데의 어머니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 어머니에게 믿음에 대해 말해주신 디모데의 할머니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믿음: 물려받은 전통]

디모데의 믿음은 ‘물려받은 선물’이었습니다. ‘물려받은 전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에 관한한, 아무도 혼자서 시작하는 법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밭(마음)을 갈아야합니다.
   •누군가가 먼저 씨(복음)를 뿌려야합니다.
           - 씨를 뿌리면 작은 새싹들(믿음)이 움이 트고 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저 새싹들을 짓누르는 잡초들을 뽑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부모로부터,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입니다. 동시에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선물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갑니다. 왜냐하면 선물로서 믿음은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수평적으로, 즉 부모와 선생님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은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심겨진 믿음이 나에게도 전수되어 온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그분들에게 믿음을 전해준 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경우, 친구들과 함께 주일 학교에 가면서, 그것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러 가든,  부활절 달걀을 받으러 가든, 아니면 성경 이야기를 들으러 가든, 상관없이 친구와 같이 가면서부터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여 있네!”를 듣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작은 믿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입니다. 아니라면 우리 아버지의 경우는 좀 특이했습니다. 지금부터 거의 50여 년 전 우리 집은 서울에서 여러 대의 버스를 운영하던 차주 집안이었습니다. 괜찮은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용된 버스 운전수 가운데 크리스천이 있었습니다. 후일에 우리 집의 운수사업이 도산하게 되었습니다. 충청도 어딘가 금광에 투자하면 돈을 벌수 있다는 소리에 그만 재산을 그곳에 다 투자하다가 그만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몰락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 운전수가 차주이셨던 우리 아버지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마음속에 믿음의 씨가 뿌려지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신자들의 연결고리 중의 한 고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이 연결 체인에서 떨어지거나 벗어난다면, 다시 말해서 내 믿음을 버린다면, 이런 결정이 결국은 영원히 나의 자녀들뿐 아니라 내 자녀의 자녀들, 내 후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만 하면 얼마나 등골이 오싹해지는 지요! 나 한사람 때문에 장차 올 수많은 내 자손들의 운명과 미래가 불행해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크리스천들에게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믿음은 여러분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라고 쓴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또한 전통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전승’(tradition)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되어지는 그 무엇입니다.

                                                                          [위대한 선교사: 부모님]

달리 말해보겠습니다. “크리스천 부모들은 최상의 선교사들이다” 라고 해봅시다. 여러분들 중 부모님들이신 분들은 이 말씀에 약간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우리가 선교사라고?” 라며 의아해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도 자신이 선교사라고 생각해보신 일이 없으시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여러분 부모님들은 최고의 선교사들입니다. 이 타이틀이 여러분의 직함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 것을 들어본 일이 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들은 머나먼 이국 땅 어려운 환경과 난관 중에서 선교하시는 분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데 자신들의 온 일생을 바친 아버지와 어머니들이다.

이 분들이야말로 기립박수와 칭송의 노래를 들어보지 못하고 지내온 진짜 영웅들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분들에게 대중 집회나 강단에서 그들의 스릴 넘치는 경험들을 이야기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의 이야기 속에는 화려함이나 극적인 반전이나, 드라마나 신문에 나올만한 일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가정들을 통해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십대 아들이 여러분의 속을 시커멓게 썩일 때,
   •여러분의 십대 딸이 새벽 2시가 넘어 집에 들어올 때,
이런 문제들을 선교사로서 다루시기를 바랍니다. 선교사의 심정으로 이런 문제를 다루시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선교사: 선생님]

여러분의 자녀들의 삶과 인생에 있어서, 신앙을 전수하는 일에 있어서 부모님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들은 선생님들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의 선생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들을 전적으로 지원하고 격려하십니까?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자녀들이 수업을 빼먹지 않고 잘 출석하는지 챙기십니까?

1946년, 그러니까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지 일 년이 된 해에 루이스(C.S. Lewis)는 ‘선생님 문제’에 관한 글 한 편을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지금도 시의적절하기 때문에 다시 언급합니다. 루이스가 고심했던 문제는 “왜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불가지론자가 되거나 무관심하게 되는가?”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오늘 날 우리의 젊은이들이 비기독교인 들인 이유는 그들의 선생님들이 기독교의 신앙을 그들에게 전수하는 일에 있어서 별로 자발적이지 않거나 아니면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젊은이들 중에 퍼져있는 불신앙(믿지 않음)의 근원은 젊은이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르쳤던 사람들 안에 있다.”

                                                                       [열매를 보아 알리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습니다. 어는 세대도 그들이 갖고 있지 않는 것을 다음 세대에 전수해줄 수 없습니다.
   •만일 선생님들이 기독교신앙에 대해 회의적이라면, 그들은 그들이 학생들에게 오로지 회의주의만 가르칠 것입니다.
   •만일 선생님들이 어리석다면, 그들은 오로지 어리석음(우매, 愚昧)만을 가르칠 것입니다.
   •만일 선생님들이 저속하고 속물근성이 많다면, 그가 그의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저속한 것뿐입니다.
   •만일 선생님들이 부도덕하다면, 학생들은 부도덕과 부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들은 거룩함을 가르칠 것이고, 그의 학생들은 거룩함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은 믿음을 가르칠 것이고, 그의 자녀들은 믿음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각 세대들이 그 다음 세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통로가 교육입니다. 선생님 속에 있지 아니한 그 어떤 것도 학생들 속으로 흘러들어갈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영어를 모른다면,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수학을 모른다면,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믿음이 없다면, 학생들에게 그 믿음을 전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선생님들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분이 어떤 선생님인 줄 어떻게 아십니까? 그들의 열매를 보아서 그가 어떤 선생님인 줄 알지 않습니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태 7:16).

그 부모의 그 자녀, 그 선생의 그 학생, 그 목사의 그 교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론 가끔 돌연변이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시금 우리 자신을 돌아보거나(왜 저 아이가 그렇게 되었을까? 왜 저 교인이 저렇게 되었을까? 네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다시금 선교사적으로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하겠다는 다짐(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을 해보아야할 것입니다.  

누가 믿음의 전통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전해 줄 것입니까?

어떻게 되나 그냥 팔짱을 끼고 두고 보자는 식의 부모들은 참으로 안쓰러운 부모들입니다. 집 정원이 있는데 잔디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두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온갖 잡초들과 엉겅퀴들이 밀림을 이룹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소원: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

크리스천들로서 우리에게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주어졌습니다. 수많은 글들이 주어졌습니다. 시편들과 찬양들과 노래들이 주어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함께 공유(共有)합니다.

이제 우리의 바람이 있다면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 어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이런 것들(성경의 이야기들, 성경의 글들, 시편들과 찬양들과 노래들)을 알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알기를 소원합니다.
   •노아의 방주에 대해,
     야곱의 사닥다리에 대해
   •요셉의 그 많은 채색 옷들에 대해,
     예수님의 이음매 없는 홍포 옷에 대해,
   •에덴의 정원에 대해,
     겟세마네의 정원에 대해,
   •엠마오로 가는 길에 대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대해,
   •성문 기둥을 무너뜨린 삼손에 대해,
     언약궤 앞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추던 다윗에 대해,
     황금 송아지 상을 박살내버린 모세에 대해,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에 대해,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에 대해,

왜 우리는 그들이 이런 것들에 대해 알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시편 78장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왜 우리는 이런 일들을 우리 자녀들에게 숨기지 않고, 그것들을 장차 오는 후손들에게 말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교훈하는 이유를 우리는 고대 히브리인들이 그들이 자녀들을 교육하고 교훈했던 이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히브리인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은 요단강에서 열두 돌을 가져다가 길갈의 성소에 세워두었습니다. 일종의 신앙교육의 도구(catechetical device)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장차 너희 자녀들이 너희에게, “엄마, 아빠, 이 열두 돌들d;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야?”라고 묻거든, 여호수아는 이렇게 대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셨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위로 요단강을 건넜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1)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여호와의 손은 위대하시고 강하시다!’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 (2) 또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게 하기 위함이다”(수 4장)

장차 너희 자녀들이 너희에게 물을 때, “전설에 의하면… ”이라고 말하지 말고, “오, 그것 말이야?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우리 백성들을 독수리의 날개 위에 업어 이 좋은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야.”라고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 이 열 두 둘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으로써 히브리 부모들은 그들이 자녀들에게,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이교적인 환경의 바다에서, 파괴적인 세력들로 가득한 만(灣)에서 그들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맥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열두 돌들이 없이는,
   •사도신경의 열두 신앙고백의 조항들이 없이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동들에 대한 앎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과 학생들을
        - 규범 없는 세상에,
        - 도덕적 정글에 내어주는 격이 될 것입니다.

부모가 그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선생이 그 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어느 누구라도 그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그들을 신앙의 길 위에 놓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과 사라가 걸었던 길,
        - 모세와 미리암의 길,
        - 다윗과 룻의 길,
        - 예수와 바울과 베드로의 길 위에 놓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그런 길 위에 놓는 다는 것은
   •그들이 떠내려가는 것에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삶의 레슨을 주는 것이고
   •그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기도하십시오, 매일같이 일하십시다. 먼저는 여러분의 부모님 안에 살아있었던 믿음, 그리고 지금은 여러분들 안에 살아있는 믿음이 바라건대 여러분의 자녀들 안에도 살아있기 위해서입니다.


                                                                             [기도]

오, 하나님, 지금 여기 우리는 지나간 세대와 장차 올 세대 사이에 이렇게 서있습니다. 바라건대, 우리로 하여금 이 두 세대들에 대해 신실한 사람들로 서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노력과 힘과 자원들을 다 동원하여 우리 자녀들이 신앙의 위대한 전통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사용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립니다. 아멘.

                                                       (류호준 목사, 2007년 11월 25일, 무지개 장로교회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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