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그냥 야곱으로 남아 있게나!”

창세기 28:10-19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꿈이 이끄는 삶

 

각 사람들마다 꿈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사람들을 깨워 일으키는 꿈 말입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평생을 보냅니다. 이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부단히 달려갑니다. 이 꿈은 여러분의 부모를 뒤로 하고 집을 떠나게 하고 교육을 받게 하고 직장을 잡게 하고 이 꿈 때문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사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 꿈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꿈이 우리를 계속해서 움직이고 달리게 만듭니다. 꿈은 여러분을 누구와 관계를 맺게 하다가도 또 다른 사람에게로 관계를 바꾸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내리는 중요한 결정은 여러분이 꿈에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에 따라 내려질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꿈은 항상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관계에서 저 관계로,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심지어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기게 합니다. 결국 인생은 ‘꿈에 이끌려 사는 삶’(dream-driven life)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자신들이 세운 꿈을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달리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은 문화 사회적 달리기뿐 아니라 종교 신앙적 달리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사회적 잠언이 있다면, “꿈은 이뤄진다!” 일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할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납니다. 보통사람들이 볼 때 꿈같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투영해 보자면, 야곱의 형인 에서가 그런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는 장자입니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고대 중동문화에서 ‘장자’(長子, 큰 아들)가 된다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일종의 기득권을 갖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에서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렇게도 얻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당연시 여기고 삽니다. 우리가 에서가 소유한 재산권이나, 그가 누리는 대중적 인기나, 아니면 잘 풀리는 그의 팔자를 보고 있노라면, “아하, 이 세상에는 태어나길 잘 태어난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소수의 그런 사람을 빼놓고 대부분 우리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항상 지루하고 힘든 허드레 일과 같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야곱에게 더욱 마음이 끌리고 정을 주게 되고 그의 심정을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의 뜻은 ‘투쟁하는 자’, ‘사기꾼’, ‘탈취 자’, ‘빼앗은 자’, ‘움켜잡는 자’입니다. 야곱은 성공의 사닥다리를 오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사람의 전형(paradigm)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줄기차게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야곱의 오르기 노력

 

야곱에 관한 이야기는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그래서 늘 무엇인가 부족하여 허기진 우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온갖 짓을 다하려는 우리들에게 너무도 마음에 와 닿은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아마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꿈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과는 반대쪽에 서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슨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이뤄야할 꿈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우리들 대부분은 두 번째 부류에 속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이루어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것도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나가서 우리의 꿈들이 실현되기를 위해 무던히 애쓰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애쓰고 노력하면 할수록 수렁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오르려고 애를 쓸수록 한없이 추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일생의 초반부터 야곱은 이 사실을 배우는데 엄청난 희생과 비용을 지불하게 됩니다.

 

 

좋은 꿈은 언제나 위로부터

 

그러나 주님의 신실한 백성들이여! 이 진리를 기억하십시오. 즉 꿈이라는 것, 다시 말해 모든 좋은 꿈들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오는 꿈들만이 진짜 좋은 꿈들입니다. 그리고 더더욱 잊지말아야할 사실은 하나님은 그 좋은 꿈들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꿈들로 무엇이 있을까?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 사랑받는 일,

      ․ 생명을 잉태하는 일,

      ․ 자녀를 갖는 일,

      ․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 - 석양의 낙조, 산야의 꽃들, 하늘과 별과 구름과 바다,

        음악, 연인들의 속삭임, 장애아들을 업고 가는 엄마의 모습

      ․ 삶의 목적을 발견하는 것,

      ․ 일의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

      ․ 모든 일에 있어서 여러분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친구를 발견하는 것,

      ․ 무엇보다도 진리 중의 참 진리를 발견하는 것.

 

이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좋은 꿈들은, 즉 살면서 우리가 가장 갈망하고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들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들이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복들은 결코 땀 흘려 ‘버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행복들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

 

그러나 이러한 ‘신성(神聖)한 선물들’(sacred gifts)을 즐기고 누리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런 것들을 얻으려고 기를 쓰며 노력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이란 포장’을 통해 주신 그런 신성한 선물들은 고마움과 감격으로 받는 것이지 얻으려고 애를 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코 그런 선물들을 즐길 수도 없고 만족할 수도 없게 됩니다. 바로 이 점이 야곱의 삶에서 가장 큰 실수였고 오점이었습니다. 아마 내 삶에서도 그렇고 여러분의 삶에도 그럴 것입니다. 선물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을 얻어내려 성취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선물이 이미 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차지하려고 덧없는 노력을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 이미 “너는 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다! 너는 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라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것을 인간적 방법을 다 동원해서 움켜 붙잡아야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 속임, 간교 등 치사한 방식으로 자신을 더럽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약속된 행복, 주어진(given) 행복을 기다릴 수 없어 무리수를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삶은 치열한 전쟁터가 되고, 정글의 법칙아래 사는 삶으로 축소 환원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입니다. 그러나 일란성 쌍둥이기에는 서로가 너무 다르고 서로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에서는 들판으로 다니면서 사냥을 하였고 몸에는 털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했고 생각이 많아 뭔가를 계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이삭이었는데, 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에서와 야곱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되는 축복들, 즉 야곱이 자기 인생 자체보다 더 바라고 원했던 그 축복들을 수여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이런 축복들이 자연히 장자인 에서에게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사회적 통념 사이에서

 

그러나 쌍둥이의 어머니인 리브가는 쌍둥이가 태중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분명히 리브가는 그의 아들 야곱에게 이 약속에 대해 말했을 것입니다. “너는 둘째라도, 너는 언더 독(under dog)이라도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너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야,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야”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역시 여러 경우에 이 사실을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에서를 선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통념상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 에서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에서가 누굽니까? 아마 어렸을 적 에서와 야곱이 동네에서 놀이를 하거나 경기를 하게 되면, 친구들은 언제나 에서를 자기들 편으로 뽑아갔습니다. 에서는 학교에서도 언제나 선생님의 눈에 들었습니다. 그는 일류 대학에 들어갔으며, 우등으로 졸업한 후에는 연봉이 꽤 높은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에서의 잔디는 야곱의 잔디보다 항상 더 푸르렀습니다. 에서의 이름은 언제나 초고속 승진 인사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종종 신문에 나왔습니다. 그의 가족 역시 아름다웠습니다. 여러분이 야곱이라면 여러분의 어머니는 여러분이 제일 잘났다고 하셨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은 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어쨌건 그는 늘 이런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쌍둥이와 함께 사는 삶

 

야곱처럼 우리 모두는 쌍둥이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날부터 우리는 우리자신을 다른 에서들에 비교하여 재고 삽니다. 우리가 볼 때 우리가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기준 말입니다. 그 기준에 대해 우리자신을 측정하고 잰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그런 에서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에게 쌍둥이를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에서는 그저 야곱의 형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에서는 여러분과 우리 모든 사람들이 어떤 복을 얻기 위해 먼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인물입니다. 에서는 여러분과 같기는 하지만 여러분보다 더 나은 인물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더 선호하는 쌍둥이며, 여러분이 되고 싶어 하는 가능성을 지닌 인물입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는 부단히 에서의 기준치로 우리 자신들을 평가하고 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언제나 ‘쳐진 사람들’(loser)이고 따라서 열등감과 숨겨진 분노로 위장된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에게는 결코 만족이란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에서가 나보다 더 잘할 거라는 생각에 기분 나빠하고 우울하고 위축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에서의 이미지를 채우기 위해 애를 쓰다 보니 탈진하거나 지치게 됩니다. 우리는 평생 무엇엔가 쫓기는 쌍둥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분의 축복을 쟁취하는 줄로 알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공을 향한 유일한 길 인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쟁취하기 위해?

 

이삭이 늙어 앞을 잘 보지 못하게 되었고, 이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삭은 큰 아들 에서를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고, 다시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전해주었던 복을 다시 큰 아들 에서에게 전해줄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그녀의 남편이 아들 에서에게 하는 지시사항을 담장너머로 듣게 됩니다. 에서가 아직도 들판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을 때, 리브가는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형 에서의 의복으로 갈아입힙니다. 야곱의 목과 손에 염소의 털을 덮어 그가 형처럼 털이 많다는 것처럼 아버지가 느끼게 위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에게 들어가 에서인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이삭이 물었습니다. “누구냐?” “에서입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분만 거짓말이었습니다. 아니 그 대답은 진실에 가까웠습니다. 그 시간 때 즈음 야곱은 너무도 에서에 탐닉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거의 절반 이상 에서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그의 장자 권을 훔쳤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형 에서에게 했던 것처럼 자기에게도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야곱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섰던 쌍둥이, 즉 자기가 그렇게도 바라던 그 쌍둥이를 닮으려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제가 에서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사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거의 에서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충격적인 사실은, 하나님이 축복하시기로 작정한 사람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에서가 되려고 하는가?

 

이 광경을 하늘에서 쳐다보았더라면 얼마나 기가 찰 노릇입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사랑하시기로 작정한 바로 그 사람 야곱이 이제는 에서가 되려고 염소의 털로 목과 손을 덮어가면서 눈먼 아버지 앞에 서있었기 때문입니다. 눈먼 아버지 앞에 서있는 ‘야곱→에서’를 보십시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눈이 멀지 않았거든요! 하나님은 여러분이 누구인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위장하고 포장하고 가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누군지 꿰뚫어 보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인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라시지 에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위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가면을 쓰지 마십시오. 더 이상 에서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야곱의 속임수는 결국 스스로를 집에서 쫓아내는 꼴이 되었습니다. 넋을 놓고 있다가 단단히 속은 에서가 분노에 차 서슬 퍼런 칼을 뽑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제대로 길 떠날 준비조차 하지 못한 채로 허겁지겁 떠났습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 숨 가쁘게 도망쳤습니다. 역설적으로 지금 그는 그가 그의 가족으로부터 빼돌리려 했던 유산에서 점점 멀리 떨어져 가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죽어라 달리다 보니 마침내 지쳐 땅에 고꾸라지게 됩니다. 도망자의 신세로 덩 빈 들판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기쁨”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매우 의외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치고 고갈한 실패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축복의 순간이 야곱에게 온 것입니다. 그가 잠에 골아 떨어졌을 때 야곱은 하나님의 꿈들을 꾸게 됩니다. 그가 꾸어 본적이 없는 꿈, 자신의 간절한 바람과 소원의 투영으로서의 꿈이 아닌 꿈, 계시적인 꿈, 하나님의 꿈,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눈물겨울 정도로 너무도 찬란하고 영광스런 꿈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디 하나님의 은혜는 예기치 못한 특성이 있습니다.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의외성이 아닙니까? 루이스(C. S. Lewis)가 말한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이라는 것입니다. 한 밤중 광야 한 복판에서 광활한 하늘을 초대형화면 삼아 상영되고 있는 황홀한 영화 “예기치 못한 기쁨”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만이 유일한 관객이었습니다.

 

 

그가 본 환상적인 꿈 내용입니다. 야곱이 피곤하여 잠들었을 때, 엄청나게 큰 사닥다리(사실은 ‘지구라트’라 불리는 계단식 신전 형태라고 추측됩니다)가 하늘과 땅 사이에 나타났습니다.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 위로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그 사닥다리 꼭대기에는 하나님이 계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들에게 주리라…” 사닥다리 꼭대기에 좌정하신 분은 다름 아닌 창조주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입이 딱 벌어지는 놀라운 계시였습니다.

 

 

사닥다리 타기 인생

 

오늘 보인 이 꿈이 있기 이전에도 야곱은 꿈을 꾸어왔습니다. 성공의 사닥다리 꿈, 그 사닥다리에 오를 수만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신념아래 달리고 달렸던 것입니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사닥다리에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그의 꿈의 정상까지는 다다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실패자로서,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이 황량한 광야, 한 밤중 안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사닥다리의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봅니다. 그러나 매번 무엇을 배웁니까? 온갖 시간과 재능을 다 쏟아 바치지만 언제나 오르다가 떨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배우지 않습니까? 황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온갖 고생을 하며 기를 쓰고 올라갔는데 내가 올라간 그 사닥다리가 내가 생각한 건물이 아니라 다른 건물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요! 부지런히 일하고 치밀하게 계산하고 가보니 그곳은 내가 생각하고 바라던 곳이 아닌 다른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허망하고 좌절했는지요! 이건 아닌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속에 나타난 사닥다리를 보십시오. 야곱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닥다리 위에 야곱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사닥다리를 올라가는 야곱은 없습니다!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한 것은 야곱이 아니라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닥다리 꼭대기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투쟁하는 자’, ‘집착하는 자’, ‘움켜잡는 자’, ‘먼저 저리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 - 이런 야곱은 이 시간 한 밤중에 광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 인생은 사닥다리 타기가 아니다.

 

야곱이 배워할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 너는 선택받은 자(being chosen)다.

      ․ 너는 사랑받고 있는 자(being loved)다.

      ․ 네 인생과 삶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점찍어놓은 것이었단다.

 

 

받는 사람들

 

애쓰고 투쟁하고 성취하려는 우리들로서는 ‘받는다’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받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은혜’는 받는 것이지 버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삶을 풍성하게 만들려고 애쓰면서 세월을 보내든지, 아니면 풍성한 삶(‘선택받음’과 ‘사랑받음’의 삶)을 선물로 받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목표를 이루려고 애쓴다면, 항상 불평과 불만이 여러분을 따라다는 친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얻어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만족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의 목표를 ‘받는 것’으로 한다면, 여러분을 따라 다니는 친구의 이름은 언제나 ‘감사’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을 축복하시려고 결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창세전에 선택하셨다는 선택의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사랑받는 자라는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에 대해 이제 여러분이 결정할 시간입니다. 이런 사랑을 땀 흘려 버시겠습니까? 아니면 감사함으로 받으시겠습니까? 아무리 벌어도 만족함이 없는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받으면서 감사하고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야곱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십니다. ‘선택받은’ 야곱으로, ‘사랑받는’ 야곱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도하건데,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고 오직 당신만이 줄 수 있는 것, 즉 ‘선택받음’과 ‘사랑받음’의 축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아멘.

 

 

 

[무지개 교회 주일 설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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