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예레미야의 고백 (I)

렘 15:15-18



들어가는 말


본문은 예언자의 탄식과 비탄으로 가득 차있다. 시편에서 자주 발견되는 개인적 탄식을 예레미야 개인의 고백문의 형식으로 심도 있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탄식시 안에는 세 당사자들이 등장한다. 시인과 하나님과 원수. 먼저, 탄식시 안에는 고통하고 비탄하는 시인 자신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 깊이 탄식한다. 그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소외나 억울함과 같은 정신적 고통, 혹은 신체적 병과 같은 일들에 대해 탄식한다. 다음은, 자신이 처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시인의 탄식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한 비난과 원망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탄식하는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왜 자기에게 이러한 불행들을 허락하거나 아니면 무관심하게 방치하고 있는가 하면서 하나님께 원망과 질문을 퍼붓는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깊은 회의가 시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자신이나 하나님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원수들을 향하여 강한 불만과 증오심을 표출한다. 그들(원수들)이 시인에게 행한 여러 가지 불의한 일들을 열거하면서 하나님께 정의를 시행해 달라고 간청한다.


본 고백문에도 이 세 당사자들이 모두 등장한다. 고통과 소외 속에서 탄식하는 예언자 자신, 그를 짓누르고 계시는 하나님, 시인을 박해하고 핍박하는 사람들. 특히 본문에는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진솔한 속내를 드러내며 하나님께 “왜 나에게?”라고 부르짖는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속이는 하나님’,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이라고 소리친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배신당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은 이제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 그는 신앙의 붕괴 현상을 몸소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15당신은 아십니다!

오 야웨여,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돌아보아 주시며,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보복하여 주옵소서.

느린 당신의 진노 안에서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당신 때문에 내가 치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하나님께 간청을 드리기 전에 시인은 아주 당돌하게도 하나님을 다그치고 있다. 15절을 여는 히브리어 문장의 어순을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를 2인칭 단수형 동사 앞에 사용함으로써, “하나님! 당신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 당신은 알고 계십니다!”라며 확언하고 있다. 즉 “내 사정과 형편을 알고 있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당신’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은 모른척하고 계십니까?“ 라고 하나님을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내게 남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게 있어 임(戀)이십니다! 당신은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분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올차고 도랑도랑한 진술은 하나님의 정원에 돌을 던지는 행위이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시인에게 반응하시도록 그분을 불러내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인은 강력한 용어들을 동원하여 하나님께 간청과 탄원을 한다. “기억해 주십시오”, “돌아보아 주십시오”, “복수해 주십시오”, “저버리지 마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 하나님의 기억력에 호소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기대는 행위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자카르’, רכז)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구원을 이루신 것처럼(출 2:23-25), 예레미야 역시 하나님께 자기를 부르셨던 사실, 그리고 그 소명(召命)을 이루는 동안 그가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는 수많은 난관과 고난 가운데서 구원해주시겠다는 그분의 약속(렘 1:8,17,19)을 기억해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난 가운데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호소하는 행위다. 이러한 사실은 왜 시편의 수많은 탄식시들 안에 하나님의 ‘기억’에 호소하는 구절들이 많은가를 설명해줄 것이다(예, 시 74:2, 18, 22; 80:15; 89:47, 50; 106:4. 참조, 삿 16:28; 누가 23:42).


시인 예레미야는 그를 끝까지 추적하여 박해하였던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정의로운 간섭이 있기를 요청하고 있다. “원수를 보복하여 달라”는 구절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과 행위의 결백함을 적대자들 앞에서 증명해 보여 달라는 뜻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정의로운 재판장으로 인식하고 있는 시인의 신관(神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금 시인은 하나님께 당돌하게 간청한다. 여기서의 그의 간청은 매우 특이하다. 히브리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문구 안에(“느린 당신의 진노 안에서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이러한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곳의 ‘분노에 느리다’라는 히브리어 관용어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문구로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종의 신앙고백문안에 담겨져 전해내려 왔다(예, 출 34:6).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 곧 하나님의 인내가 그의 백성들이 아닌 원수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면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구를 쉽게 해석하자면, “하나님, 내 원수들, 곧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향하여 당신께서 분노를 참으신다면 나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더 이상 당신의 심판을 지체치 마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계속하여, “하나님, 내가 당신 때문에 이러한 수모와 치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라며 다시금 명령조로 하나님을 다그친다.



16 만군의 하나님 야웨여,

        당신의 말씀들이 발견되자, 나는 그것들을 먹었습니다.

당신의 말씀들은 내게 기쁨이었고,

        내 마음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나는 당신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7나는 즐거워 떠들어대는 자들과 함께 앉지 않았으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당신의 손이 누르는 무게에 나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분노로 내게 가득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본 단락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결백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을 또 한번 토설(吐說)함으로써 하나님의 방관자적 태도에 대해 강한 불만과 항의를 표출하고 있다. 그는 먼저 “당신의 말씀들이 발견되자 나는 그것들을 먹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요시아 왕이 성전을 수리할 때 발견된 두루마리 율법서를 가리킨다는 견해, 혹은 예레미야 이전의 예언자들의 말씀을 예레미야가 전수 받아 자신의 것으로 삼은 경험을 가리킨다는 견해, 아니면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소명 때의 일에 대한 진술일 것이라는 견해 등이다. 본문 자체가 탄식시의 일반적인 형식인, 구체적이 아닌 모호한 시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어느 견해를 취하든지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 견해를 사용하여 말하자면,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히 부르시어 민족들을 향한 예언자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입에 자신의 말씀을 친히 담아주시고 그것을 선포하게 하셨음을(렘 1:9)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도록 촉구함으로써, 지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다루시는 방식이 예전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레미야는 “하나님, 당신 때문에 그리고 당신이 주신 소명 때문에 나는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어찌하시려는 것입니까? 나를 불러 놓고 이제 와서 뒷짐을 지고 모른척하고 가만히 계시다면, 당신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나님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당신의 말씀들은 내게 기쁨이었고, 내 마음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는 고백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만이 자신의 삶의 최고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역자 예레미야, 그는 진정한 경건이 무엇인지, 진정한 영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종이다.


요즈음 대부분의 많은 교회 사역자들이 갖고 있는 내면적 바람과 갈망들이 무엇일까? 교회지상주의라는 동굴 속에 스스로를 가둬놓고 교회의 대내외적인 사업들과 업적들, 다양한 프로그램들과 차별화 된 특성들을 추구하며, 또한 그런 것들의 시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성취감과 만족감 등을 맛보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사역자들의 솔직한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예레미야의 고백(“당신의 말씀들은 내게 기쁨이었고, 내 마음의 즐거움이었습니다”)이 시편 1장과 119장에 반영된 한 경건한 사람의 삶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하나님의 토라(가르침, 율법)를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으로 삼고, 그 토라를 밤낮(晝夜)으로 ― 밝을 때든지 어두울 때든지, 건강할 때든지 병들었을 때든지,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든지, 아니면 수난의 계곡에 있을 때든지 상관없이 ― 읊조리며 사는 사람이다. 그는 진정으로 ‘행복’(시 1:1)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우리들의 모습과는 얼마나 대조적인 삶의 방식인가! 

   

그뿐 아니라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지다”(16b절)는 문구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떠나서는 예레미야를 생각할 수 없고, 예레미야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여기에 앞선 성전 설교문(렘 7:1-15)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성전)”이란 문구가 나온다. 여기서 어떤 특정한 사람의 소유권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관용구가 “아무개의 이름으로 불리다”이다. 그렇다면 성전의 소유권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예레미야 자신은 하나님의 소유물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진정한 소유권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명에로의 충성과 헌신이 그에게 평탄한 사역과 맛있는 열매들을 보장해주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다. 도리어 배척과 소외가 그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17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소명에 얼마나 충실하였는지, 그리고 그러한 헌신과 충성심 때문에 오히려 그가 지역 공동체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소외당하였는지를 절규하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그와 경쟁하는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건강과 번영의 복음’(gospel of health and wealth)을 전하는 전도자들이었다. “샬롬, 샬롬, 샬롬”을 외치는 샬롬 삼창의 선동가들이었다. “이 땅에 샬롬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외쳐대는 싸구려 은혜의 장사꾼들, 종교주의자들, 거짓 예언자들은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온몸에 받았다. 그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갔다. 그들이 주최하는 종교집회, 그리고 각종 파티들에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언해야만 했던 예레미야는 알량한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거짓 예언자들이나 종교사업가들의 파티에 함께 참석하여 거짓 웃음을 웃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손이 누르는 무게 때문에, 다시 말해서 예언자적 소명이 무거운 짐짝처럼 그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에,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는“ 심판의 메시지, 하나님의 분노의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짐 지워 주셨기 때문에 그는 외로움과 소외 가운데 홀로 앉아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18 왜 나의 고통은 끝이 없고

        나의 상처는 심하여 낫지 않는단 말입니까?

당신은 정말로 내게 대하여 속이는 시냇물 같고,

        믿을 수 없는 샘물 같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터질 듯한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깊은 회의(懷疑)에 빠지게 된 것이다. 시인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분노, 소명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을 표출하기 위해 새로운 은유를 도입한다. 시인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치료되지 않는 병과 상처로, 소명에 대한 회의와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은 흐르지 않는 시내와 강물로 비유하여 하나님께로 쏟아낸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불치의 병에 걸린 중병환자로, 아무리 치료해도 고쳐지지 않는 상처를 지닌 가련한 환자라고 부른다. “나의 고통,” “나의 상처”라는 문구가 암시하듯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유독 나에게 부과된 고난과 고통과 슬픔은 이다지도 끝이 없단 말입니까 라며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다. 병과 고통을 죄의 결과로 여기던 당시의 대중적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예레미야는 자신이 정말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아무런 죄를 지은 사실이 없는데, 있다면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충실했던 것이 전부인데 왜 고난 받아야 하고 왜 고통 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여 도전적인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당신은 내게 대하여 속이는 시냇물 같습니다!

        정말로 당신은 내게 대하여 믿을 수 없는 샘물 같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진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가 할 수 있는 극단적 도전이며 항의다. 그가 그렇게도 믿었던 하나님이 이제 와서 보니 속이는 분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가리켜 ‘속이는 시냇물’(a deceitful brook)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은유적 비난은 하나님을 향한 예레미야의 매우 역설적인 비아냥거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생수의 근원’이라고 부르시고 다른 신들을 가리켜 ‘물을 담을 수 없는 웅덩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렘 2:13).


이스라엘 지역에는 푸석푸석한 흙으로 덮인 거친 광야 지역이 많다. 성경에는 이러한 지역을 종종 ‘사막’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거친 들판, 혹은 광야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겨울철 우기와 여름철 건기로 나누어지는 지중해성 기후대를 가진 이스라엘에, 특별히 이스라엘의 광야 지역에는 와디(wadi)라 부르는 하천이 있다. 건기에는 물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다가도 우기가 되면 갑자기 내리는 비에 와디가 철철 넘친다. 와디는 광야를 여행하는 목마른 여행객들의 갈증을 해갈해 주는 곳이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가리켜 ‘속이는 와디’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광야를 지나는 목마른 여행객이 멀리서 와디가 있는 것을 보고 찾아갔다가 와디가 바닥까지 바싹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면 그 여행객의 실망이 어떠하겠는가? 멀리서 보니 물이 흐르는 시냇물인 것 같아 기대를 안고 가까이 가보았더니, 물은 전혀 없고 강바닥만 보이고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너무도 실망한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그를 속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배신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보다 하나님을 심하게 비난하는 말이 어디에 더 있겠는가? “당신은 믿을만한 분이 아닙니다!” “당신은 나를 속였습니다!” “당신은 신뢰할만한 분이 아닙니다!” 한 때는 자신을 가리켜 생수의 근원이라 하시던 하나님이 이제 와서 보니 샘물은 커녕 바싹 메마른 시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그의 소명의 때를 연상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무어라며 약속하셨던가?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 대적하고 위협한다 하더라도 결코 그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의 약속이 아니었던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지 않았던가?(렘 1:8,19).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하나님은 그의 대적들을 물리쳐주시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 의해 박해와 고난을 당해도 방관자처럼 가만히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너무도 실망했다. 아니 실망을 넘어서 하나님을 배신자라고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사정없이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보여주고 있는 진정한 경건과 영성을 엿볼 수 있다. 결코 그는 하나님 앞에 위선적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을 잘 참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잘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문제가 심각한데도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넘어가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가 직면하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 그가 알고 있는 신학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그가 느끼고 그가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하나님 앞에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왜 나에게?”라는 절규는 우회적으로 아니면 직설적으로, 하나님이 문제의 대답인 동시에 문제 자체라는 생각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과 언쟁하며, 하나님께 도전하며,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을 극한 지점까지 몰아세우는 예레미야의 솔직성과 정직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영성과 경건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동시에 가리켜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본 글은 백석신학저널 2010년 봄호에 실렸다. 일반 독자를 위해 각주는 생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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