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둘째 강론]

“에스겔의 싸인(sign)-설교들”

에스겔 4-5장

 

류호준 목사

 

 

예루살렘에 기우는 재앙

 

본장들은 예루살렘이 적군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혀 함락된다는 끔직한 기사들로 시작됩니다. 에스겔의 마음은 깊이 상했습니다. 사로잡혀온 동료 유대 포로민들이 불쌍하고 가련했습니다. 예언자의 말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2:10)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의 메시지 안에는 희망의 실마리도 엿보입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재앙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려는 목적을 실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심판의 폭풍 구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희미한 빛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말을 잃은 예언자

 

에스겔의 사역은 4개의 ‘상징 행위 설교’들로 시작합니다. 상징 행위 설교는 일종의 ‘싸인(sign)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正義) 프로그램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마치 전위 예술가처럼 에스겔은 행위 공연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시행될 것인지 보여줍니다. 물론 에스겔서의 중요한 주제가 되는 희망의 요소가 그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상징적인 행위들로서 이 ‘싸인 설교’들은 포로민들에게 예루살렘에 닥쳐올 심판에 대해 가르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싸인 설교를 해야 하는 에스겔로서도 그런 행위들과 표정들과 몸짓들과 자세들이 힘들고 이상한 일들이었지만 포로민들이나 우리에게도 매우 충격적이고 기이한 행위들입니다.

 

왜 에스겔은 그의 메시지를 팬터마임으로 전달하였을까? 대답은 에스겔서 안에 세 곳에서 발견됩니다. 이 세 구절들은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벙어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구절들입니다. 말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에스겔서 3:26에서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그리고 4년 6개월 후인 에스겔서 24:27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예루살렘에 함락되던 때)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세 번째는 에스겔서 33:21,22인데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그 도망한 자가 내게 나아오기 전날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요점은 이것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대부분 닫혀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역시 거의 입을 다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완고하고 고집적인 포로민들은 하나님께 대해 너무도 반역적이었고, 삶에 있어서는 너무도 부도덕적이고 불의했습니다. 회개하라는 촉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귀를 막고 있었습니다. 재앙이 떨어질 때까지 완고하고 고집스런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예언자들이 전통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던 방식(설교)을 버리라는 명령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유다를 향한 최후의 경고를 말로 설교하는 대신에 드라마로 만들어 보여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종을 칠 때에도, 하나님은 증인들을 두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의 철판 같은 뻔뻔스런 우상숭배와 혐오스런 부도덕적 행위들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차근하게 따지거나 애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이전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하나님의 부드러운 말씀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무시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입을 다물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무지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속을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게 되었을까.

 

에스겔의 첫 번째 행위 설교(4:1-3)는 모래 위에서 전쟁 게임을 하는 것이었는데 아마 그발 강가에서 했을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 진흙으로 된 토판 위에, 에스겔은 대충 예루살렘 도시 지도를 그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도시를 포위하기 위한 공성(攻城)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포위를 위한 공성의 클라이맥스는 바퀴가 달린 대형 타워를 만들어 성으로 진입할 전사들을 실어 나르는 것이었습니다. 트로이의 목마를 연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형 타워 꼭대기에서 궁수(弓手)들은 성벽너머에 있는 거주민들을 향해 활을 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철판을 가져다가 에스겔과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면서, 도시를 향해 등을 돌려대고 있는 것입니다. 침공이 임박했는데 하나님은 등을 돌려대고 무관심 하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두 번째 행위 설교(4:4-8)는 모래 위에 왼쪽으로 눕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집 앞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끈에 묶여 390일 동안 누워있게 되는데, 주전 722년에 이미 북쪽 지파들에게 떨어진 형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비슷하게 에스겔은 40일 동안 오른쪽으로 눕게 되는데, 유다의 악을 상징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해석이 되는지, 어떻게 정확한 숫자를 이런 경험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결국 혼란스럽거나 혼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은 통계나 숫자에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이미 예시된 시간이 지난 후에 고통과 환난이 끝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작정 형벌을 주시거나 재앙이 온다는 것이 아니라 형벌도 조정되고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세 번째 행위 설교(4:9-17)는 예루살렘의 포위를 당하던 마지막 날들에 일어나게 될 일들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매일 먹는 식사량은 8온스의 빵과 물 한 병 정도였습니다. 먹을 빵을 준비하는 과정은 역겹고 소름끼치게 더러웠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배급양식으로 근근하게 연명할 것이며 나중에는 사람을 잡어 먹는 일까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애가 4:10).

 

네 번째 상징 행위 설교(5장)에서, 에스겔은 머리와 수염을 밀게 됩니다. 이것은 바벨론인들이 유다의 국토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게 된다는 상징일까요?(보라, 사 7:20). 히브리인들에게 머리를 밀거나 수염을 깎는다는 것은 수치와 애곡의 표시입니다. 예루살렘에 다가올 피치 못할 수치를 가리킬 적절한 징표일 것입니다. 자른 머리카락을 세 뭉치로 나눕니다. 각각의 머리카락 뭉치를 없애버리게 됩니다. 하나는 불로, 다른 하나는 칼로, 또 다른 하나는 바람에 날려 보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약간의 머리카락을 옷자락에 남겨두는데, 심판 가운데서도 보존될 ‘남은 자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도시는 파멸되지만 신앙은 계속해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이 아니라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분노가 바벨론에 떨어지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보여준 행위 설교들은 바벨론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말씀을 선언했습니다. “예루살렘아, 너를 대적하여 치는 자는 다름 아닌 바로 나다!”(겔 5:8)

 

그러나 예루살렘의 잘못은 그들이 저지른 일들, 즉 우상숭배와 부도덕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도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그들에게 온 세상에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선포해야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그를 통해 온 나라들이 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창 12:1-3). 물론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을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을 인도하는 안내자요, 앞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빛의 역할을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들은 이런 중차대한 소명과 사명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주변 나라들에게 “수치와 조롱거리, 두려움과 경고”(겔 5:15)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나가는 자가 보는 앞에서”(겔 5:14) 예루살렘의 멸망을 집행하시게 된 것입니다.

 

포로민들은 이런 충격적 선언에 심히 놀랐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희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희망의 상징인 예루살렘에 무너진다는 선언에 정신을 잃게 됩니다. 참된 신앙과 미래의 희망이라는 철벽 요새는 결코 사람이 지은 도시나 성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배울 시간이 된 것입니다. 진노 가운데 하나님은 긍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에스겔 4-24장에는 열 가지 상징 행위 설교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한번 찾아보시고 각각의 설교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2.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많이 주어진 자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이것이 얼마나 유대인들에게 사실입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3. 예루살렘에 심판을 불러들인 이스라엘의 죄들을 열거해보시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 크리스천들도 이런 잘못들을 반복하는지 말해 보시오.

 

4. 오늘날 교회에서도 상징 행위 설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요? 오늘날 어떤 것들이 상징 행위 설교들에 해당할까요?

 

5. 밝은 미래를 가리킨다고 생각되는 구체적인 요소들이 에스겔의 행위 설교들 안에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것들인지 말해 보십시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류호준 2020.08.24 4710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933
89 설교: :누가 우리 자녀들에게 말해줄 것인가?" 류호준 2007.12.04 10932
88 하나님에 이끌려 사는 삶 (창세기 큐티) [1] 류호준 2008.10.06 10947
87 신학에세이: "베뢰아 사람들의 신학 방법" [1] 류호준 2008.05.27 11010
86 요셉의 유언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10.06 11028
85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다.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6 11051
84 에스겔서 강론(7): “마른 뼈들” 류호준 2010.04.18 11058
83 “신학 교육과 목회자 양성” file 류호준 2013.09.24 11077
82 번역에세이: "희망(HOPE)은 타고난 것" [1] 류호준 2007.12.07 11087
81 설교: "조각 햇살이 비추는 공간을 향해 기수를 돌리십시오" [1] file 류호준 2007.03.26 11138
80 신학에세이: “하나님은 몇 분인가?”(이정석 교수) 류호준 2008.10.05 11149
79 서문: [정의와 평화가 포옹할 때까지] [1] 류호준 2006.10.26 11201
78 야곱의 유언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10.06 11307
77 신앙교육(50): "세례의 의미" 류호준 2010.05.09 11412
76 신학에세이: "열 가지 재앙에 관하여" 류호준 2006.09.20 11456
» 에스겔서 강론 (2): “에스겔의 싸인(sign)-설교들” 류호준 2010.03.15 11562
74 설교: “예수: 사람의 아들(人子)” 류호준 2010.09.05 11576
73 신학에세이: "신약은 어떻게 민수기를 다루고 있는가?" file 류호준 2006.10.07 11602
72 로마서 묵상 (21): “크리스천의 슬픔” [1] file 류호준 2010.08.31 11679
71 에스겔서 강론 (1): “하나님은 어느 곳에든지 계신다!” 류호준 2010.03.13 11745
70 신학에세이: "'율법'에 관하여: 간단한 해설" [1] 류호준 2006.09.17 1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