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창세기 30:9-24
제목: 하나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시다.
찬송: 218장 (새 286장)
묵상 포인트: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새로운 미래를 여는 근본적 원인이다.
레아와 라헬의 출산 경쟁은 계속됩니다. 물론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옛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무자와 불임의 고통에 비하면 사치스런 불평일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그러겠지만 옛날에도 많은 자식들은 부모들에게 말 그대로 “힘”(power)이었습니다(참조, 시 127:3-5). 자식들이 많으면 부모들은 어깨를 펴고 행세합니다. 노년에 자식들이 그들을 봉양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가슴이 찔리는 사람들은 회개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어쨌건 레아와 라헬은 더 이상 옛날의 자매 사이가 아닙니다. 야곱을 사이에 놓고 벌어지는 애정싸움은 단순히 김수현의 글쓰기 소재로 적합한 낭만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사투를 벌이며 얻어야하는 고지이며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매가 아니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사실상 라헬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을 독차지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5절). 물론 근원적인 잘못은 일부다처제와 야곱과 라반에게 있었지만, 표면적으로 라헬은 가해자요 레아는 피해자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잠간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봅시다. 왜 사람들은 함께 나누는 것을 싫어할까요? 나누어야할 그것이 무엇이든지 말입니다. 그 당시 풍습에 따라 결과적으로 자매가 함께 야곱의 아내들이 되었다면, 왜 그녀들은 야곱의 사랑을 공유할 수 없었을까요? 욕심 때문일까요? 질투 때문일까요? 시기 때문일까요? 경쟁심 때문일까요? 자존심 때문일까요? 도대체 뭘까요? 아니면 이런 것들이 조금씩 다 모아진 것일까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레아는 몸종 실바를 통해 갓(“행운”)과 아셀(“행복”)을 얻습니다. 레아 자신 역시 다섯째와 여섯째 아들을 낳습니다. 잇사갈(“보상”)과 스불론(“명예”). 그리고 마지막으로 딸 디나를 낳습니다. 그러나 태가 닫힌 라헬은 오랫동안 고통 하였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수치였습니다. 라헬은 그 고통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가련한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말입니다(22절). 그러자 하나님은 라헬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기억하신다는 것은 그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그에게 새로운 미래를 여시겠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닫힌 태를 여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에서의 창조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또한 부활의 본래적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임이라는 죽음의 상태에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낳은 자식이 요셉(“더하다”)입니다.
| 기도 |
하나님, 우리의 죄가 크더라도 마음을 돌이키고 당신께 기도하면 들어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