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설교: "세례에 합당하게 사세요!"

2009.05.29 16:58

류호준 조회 수:9262

 “세례에 합당한 삶”

에베소서 4:17-32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러해 전에 졸업반에 있는 신학생들과 함께 성지순례로 이스라엘을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장소 중에 하나는 서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 바셈’(Yad Vashem)이었습니다.


‘야드 바셈’이란 이름은 이사야 56:5에서 따온 것으로, 그 구절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야드 바셈’(기념물이름)을 그들에게 주리라”(개역개정); “I will give within my temple and its walls a memorial and a name” (NIV) monument.


   · 야드 바셈은 국가적 비애를 기억하는 기념비요 민족적 슬픔을 추모하는 기념관입니다.
   · 야드 바셈은 나치에 의해 희생된 600만명의 유대인 대학살의 비참한 기억을 담고 있는 추모관입니다.


관광객의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하기에는 너무도 힘겹고 어려운 장소입니다. 추모관 안에서 지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은 숨진 수많은 어린이를 추모하는 기념관입니다. 이 어린이 추모관은 유대인 대학살 당시 죽어간 150만 명의 어린 영혼들을 추모하기 위한 건물로 땅속 깊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안은 어둡고 컴컴했습니다. 온몸에 전율을 느낄 정도의 어두움이었습니다. 그 추모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길을 잃어버린 미아(迷兒)처럼 혼란스럽고 어쩔 줄 모르게 됩니다. 벽 옆으로 설치된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한걸음씩 발을 뗍니다. 홀 중앙에는 다섯 개의 타오르는 촛불이 있는데 사방벽면 모두가 각진 거울에 반영되어 다시 수천수만 개의 촛불이 말없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소름끼치는 공간입니다.


마치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미아가 된 우주인의 기분이라 할까요? 은하계의 수천 수억 개의 별들 사이 어디에선가 길을 잃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느낌입니다. 깜빡거리는 연약한 불빛들이 여러분의 둘레에 말없이 서 있습니다. 그 불빛들 하나하나는 포로수용소에서, 독 가스실에서 죽어간 150만 명의 어린이들 한명 한명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 위 어디선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독일의 이짝 골드스타인
        오스트리아의 사라 코헨
        홀란드의 안네 프랑크.
        
        


감당하기 힘든 삶과 죽음의 무게를 동시에 느낍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어 거의 질식할 정도입니다. 150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살해되고 처형되고 심지어 어떤 경우는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세례 받은 이교도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이 무고한 어린아이들을 가지고 ‘놀이’를 했던 살인자들 말입니다. 아이들을 공중에 던져 총으로 쏘아 맞히기도 하고, 살아있는 채로 불속에 던져 집어넣기도 한 이 비극적 인종 말살 사건이 기독교 문명권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니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이 살인자들 대부분이 어렸을 때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소리 지릅니다. “유아세례라고? 도대체 세례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무슨 유익이 있는 예식이란 말인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무의미한 종교예식이지! 값싼 은혜에 불과해! 보라고, 세례를 받았다는 자들이 이런 몹쓸 짓을 태연하게 한 것 아니야?”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들은 그들이 받은 세례가 무엇을 뜻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모르는 무지한 ‘세례 받은 이교도들’이 아닙니까? 그들 부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자녀들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할 때 그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어린 아들과 딸의 머리에 떨어지는 세례의 물방울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알기나 하였던가요? 그들이 세례의 의미를 이해하였더라면 그들은 나치정권이 그들의 자녀들을 세뇌시켜 끔찍한 살인자들이 되도록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세례 받은 어린아이들이 자라서 15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 어린아이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이상 여러분은 ‘세례’에 대해 말할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세례란?


그렇다면 세례는 무엇입니까? 세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세례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오늘 읽은 본문 안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일 세대 크리스천들에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이 받았던 세례를 기억해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친절하게 그들이 받았던 세례의 뜻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함의(含意)들을 설명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 세례는 당신들의 이전 삶의 방식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 세례는 당신들의 부모들이 가르쳐주었던 삶의 방식과 온전한 단절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는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입니다. 과거와의 단절이란 무슨 뜻입니까? 저는 어렸을 적 미신이 득실거렸던 시골 동네에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 그때만 해도 시골 마을에는 예수를 믿는 가정은 드물었고 대부분이 철저한 무신론자이거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네 이곳저곳에서 굿을 하는 광경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 성황당이나 사당에 가서 소원을 빌고 참배하는 사람도 꽤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마을과 가문과 가정에서 소외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단순히 정서적인 소외(왕따)만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물리적 핍박과 언어적 박해가 뒤 따랐습니다. 물론 좀 너그러운 집은 예수 믿는 아내나 자녀가 교회에 가는 것을 허락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언제나 지불해야할 빚이 이었습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돌아와 반드시 해야 할 산더미 같은 숙제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농사일, 밭일, 집안일은 고스란히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래 얼마나 잘하나 보자”하는 식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예수를 믿게 되는 사람은 그 집에서 어김없이 박해를 받게 됩니다. 예수를 영접한 어떤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리고 땅에 내팽개치는 수모를 비롯하여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시어머니의 구박과 핍박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그런 성도들이 마음의 설움과 슬픔을 토할 수 있는 곳이 어디겠습니까? 마을 저 멀리 외롭게 서있는 교회당이었습니다.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단정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그녀에게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이었습니다. 그가 살고 있던 동네와 마을 공동체가 갖고 있던 도덕과 인습에서 완전하게 벗어난다는 것을 상징하는 예식이었습니다. 이것을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자랐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몸으로 배웠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래된 초기의 상황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과 기독교회 일세기에 세례를 받는다는 것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례란 당신이 알고 지내왔던 도덕과 인습과 생활습관을 철저하게 버리고 과거와 단절하는 것입니다.


울은 17절에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이방인들이 살던 방식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이방인이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들이 이방인들입니까? 그들은 이해력에 있어서 어두워진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이유는 무지와 무식 때문이었고, 무지하고 무식하게 된 이유는 그들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굳어진 마음, 강퍅한 마음, 돌과 같은 마음, 비가 스며들 여지가 없는 마음,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건조한 마음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지고 무지하고 무식해졌다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말대로 혹시 우리도 ‘하나님 굳은살’(God-Callus)이 박힌 것은 아닌지 두려울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감각적이 되고 육감적이 되고 관능적이 되어 온갖 불결한 생각과 행동과 일에 집착하고 몰입하게 된 것입니다.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벗다, 입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은 그런 식으로, 이방인들이 사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전 삶의 방식에 관해 배우면서, 먼저 여러분의 옛 자아를 벗고 새로운 자아를 입어 하나님처럼 되어가도록 지음을 받았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벗다’와 ‘입다’라는 두 동사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옛날 자아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옷 입듯 입어야 합니다.


이런 용어들은 세례의 언어입니다. 즉 세례를 받게 되는 후보자들은 세례의 물속으로 들어가기 전, 그들이 입고 있었던 옷들을 벗습니다. 그들의 이교도적인 과거를 뒤로 한다는, 이교적인 삶의 방식을 내버린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세례의 물속으로 서서히 들어가면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물속으로 온전하게 푹 들어가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물 먹이시기를 좋아 하시는가 봅니다! 혹시 내가 지금 물 먹고 있다고 생각이 드시거든, 역시 하나님은 나를 무지하게 좋아하시나 보다 하고 위안을 받기 바랍니다!] 물속에서 다시 나오게 되면 신선한 새 옷을 입습니다. 새 의복을 입듯이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상징입니다.


세례는 죽음의 물들에서 기어 나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도덕과 성적 쾌락의 깊은 물에서 나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마른 땅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죽다, 살다


이 말을 현대적 이미지로 번역하여 말씀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와 동시대의 미국 시인이며 작가인 제롤드 람세이(Jarold Ramsey)가 쓴 “침수”(沈水, immersion)란 시가 이런 이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적 상황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도 귀한 의미를 줄 것입니다.


완고한 침례교 부모들이
그들의 위축된 아들들과 딸들에게
침례를 받게 하기 위해 강가로 데려왔을 때,
마른 땅의 감리교도들은
몇 명이나 물속에 빠지는지
그 수를 세러 나왔다.
저 위험천만한 일에 구속(救贖, redemption)이
뒤 따른다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파자마를 걸친 채 맨발로 나와
쭈그러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내 학교 친구들은
순교로 가는 저 강의 반대편 둑에 서있었다.
그들은 설교자가 물이 허리춤에 차는 지점에 서서
아직은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목을 빼 밀고 보았다.
그 목사님이 내 친구 헤롤드의 허리춤을 떠받치고
다시 그의 뒷목 부분을 잡고 뒤로 젖히는 모습이
마치 갓난아기 목욕시킬 때처럼
그렇게 물속으로 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은 하늘을 향해 번쩍 쳐들면서
“내가 그대에게 세례를 주노라”라고 소리치는데,
목사님께서 얼마나 천천히 말씀을 하시는 지!
헤롤드의 폐 속은 물이 차오르는 공포 그 자체였다.
헤롤드가 물에서 올라올 때
그는 마치 해마처럼 콧김을 뿜어냈다.
그리고는 눈을 감은채로 뒤뚱거리며
마른 땅위로 걸어 나왔습니다.
내 건조한 피부로 그를 감싸 안았다.
그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내 친구, 강물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이젠 됐어!” 하고
고개를 끄덕이실 때까지
용감하게도 숨을 꾹 참았던 내 친구,
이제는 약간은 추워 벌벌 떨면서
반대편 강가에 서서 구원에 대해 재잘재잘 지껄여댄다.

세례의 물은 우리가 들고 다니는 플라스틱 병속의 물이 아닙니다. 더울 때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마시는 그런 병 물이 아닙니다. 그 물은 우리가 빠져 익사하는 물이요 다시 그 물속에서 일어나 걸어나 나오는 그런 물입니다.

   ․ 세례의 물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가 죽음으로 내려가신 사건과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부활하신 사건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 세례의 물을 통해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요단강으로 내려가시고 다시 올라와 
    성령을 받으신 그 예수님을 좇아 따라가는 것입니다.

   ․ 세례의 물을 통해 우리는 죽음 속에 깊숙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생명의 주님으로 
    일으킴 받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 어느 날엔가 모든 피조물들이 세례 받은 크리스천들이 겪는 이와 동일한 변혁의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 역시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 어느 날엔가 새로운 창조가 옛 창조의 죽음에서부터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춘설(春雪)에 피는 매화가 봄의 도래를 알리는 전령(傳令, 메신저)이듯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새로운 창조세계의 도래를 알리는 그런 매화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성품을 입었기 때문입니다(“심령으로 새롭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하나님처럼 되어가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다”) (엡 4:24)


새로운 사람으로 살기


그렇게 되었다면 여기에 더할 것이 있다고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 자아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자아로 새롭게 태어났다면, 그리고 이것이 세례의 진정한 의미라면, 이제부터는 삶의 방식과 행동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더 이상 거짓말은 그만!
   ․ 더 이상 겉치레나 허영이나 허례허식은 그만! 
   ․ 화를 냈다하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풀어라!
   ․ 제발 밤새도록 꽁하거나 분을 품지 말 것!
   ․ 훔치지 말라! 
   ․ 땀 흘리지 않고 먹으려드는 ‘불한당’(不汗黨)이 되지 말라!
   ․ 떳떳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살라!
   ․ 말하는 습관을 살펴보라. 상스런 욕이나 음담패설은 부끄러운 줄 알라!
   ․ 입에서 추잡하고 더러운 말이 나오지 않게 하라. 
   ․ 도움이 되는 말만 하라. 덕(德)이 되는 말을 하라.
   ․ 말 한마디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선물이 되도록 하라.
   ․ 뒷말하고 남을 씹어대는 저급한 언어 행동은 깨끗하게 끊어라.
   ․ 남을 용서하는 일은 재빠르고 철저하게 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용서하실 때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전과 지금


세례예식의 언어는 ‘이전과 지금’의 언어입니다.

   ․ 세례를 받기 전에는 당신은 저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습니다.  
   ․ 세례를 받기 전에는 당신은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은 빛입니다.
   ․ 세례를 받기 전에는 당신은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은 진실만을 말합니다. 
   ․ 세례를 받기 전에는 당신은 빈둥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의 배우자에게 성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이전과 지금’이라는 대조적 문구를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디도서에서 한 구절을 현대적으로 번역하여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전에는 우리 역시 어리석고 고집스러웠으며 얼간이처럼 죄에 속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기분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살았으며 늘 누군가와 싸울 기세로 살았고 미워하고 복수하면서 다시 미워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끼어드셨습니다.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 모든 것들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목욕탕에 집어넣으셨습니다. 푹 불리게 하시더니 모든 더러운 때를 다 밀어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끔하고 말쑥한 새로운 백성이 되어 나왔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속과 겉을 모두 깨끗하게 씻어 주신 덕분입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새롭게 된 것입니다. (디도서 3:3-5)


‘싸크라멘툼’, 충성서약


2세기 중엽에 로마에 유스틴(Justin)이란 크리스천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는 로마의 황제와 원로원과 로마의 백성들 앞에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께 서원하고 바치는 충성심을 로마의 군인들이 시저에게 바치는 충성맹세에 비견하였습니다. 로마 군대에는 그들의 황제인 시저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맹세 예식이 있었는데 이것을 ‘싸크라멘툼’(sacramentum)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는 이 용어를 차용해서 세례의식에 붙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식을 거룩한 예식이란 의미의 ‘성례’(聖禮, sacrament)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싸크라멘툼’을 통해, 즉 세례를 받을 때에 드리는 서약(맹세)을 통해, 세례 받는 그 사람은 더 이상 일반 시민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대의 군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싸크라멘툼’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사복(私服)을 벗습니다. 즉 자신의 옛 본성을 벗어던집니다. 그리고 제복(유니폼) 즉 새로운 본성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날 ‘싸크라멘툼’(충성서약)을 한 대다수의 사람들, 다시 말해 세례 서약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이 세상과의 전투에 참가할 그리스도의 군대에 입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서약을 한 후, 세례를 받은 후 많은 사람들이 탈주병이 됩니다. 그리고 숨어서 이교도들처럼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병영을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상부에서 감찰이 있다고 하면 그 때나 간혹 다시 나타나기는 하지만, 결국 이중생활을 하는 짝입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이중생활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재물을 섬기는 삶입니다. 그러나 두 집 살림하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한 집 챙기기도 어려운데 두 집을 다 챙길 수 있다니 그런 당신은 대단한 분들입니다!


바로 이런 모든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 일곱 가지 도전적인 권면의 말씀을 합니다. 그가 묻습니다. 당신은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세례를 받으셨지요? ‘싸크라멘툼’을 하셨지요? 세례 서약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십시오.


1. 거짓을 버리십시오.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시오.

2.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시오. 품고 자면 그 다음날 새끼가 나옵니다! 
   마귀가 틈을 노릴 것입니다.

3. 도둑질 하지 말고 제 손으로 정직하게 수고하고 일하시오

4. 더러운 말은 입 밖에 내지 마시오. 오직 덕을 세우는 착한 말을 하시오.

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시오. 그 성령은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받은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6. 껄끄럽고 쓰디쓴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시오. 성질을 부리고 화를 내고 분노하는 일을 
   버리시오.

7. 서로에게 친절하고, 서로를 용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을 
   용서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용서하시오.


달리 말하자면,

   ․ 여러분이 받은 세례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 세례예전(洗禮禮典)적으로 사십시오.

   ․ 세례를 삶으로 사십시오. 아멘.



                            [2009년 5월 24일 주일 설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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