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
로마서 5:1-1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도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홉 절이 더 이어집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이 구절을 연구하고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만약 바울이 결혼을 했었더라면,
   ․ 만약 바울이 그의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더라면, “여보, 내가 방금 전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편지 한통을 좀 길게 썼는데, 당신이 시간을 내어 읽어 
    보고 편지에 대한 당신 생각을 말해보소.”


며칠이 지났습니다. 바울의 아내가 편지를 돌려주면서 말합니다. “여보, 이 편지를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제발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바울이 대답합니다. “뭐라고요? 무슨 뜻이오?” 그러자 아내가 말합니다. “당신이 전하려는 내용을 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에요. 특별히 십대 아이들이 그럴 것이에요.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들이라서 당신처럼 신학자로 훈련받지 않았잖아요. 당신의 편지를 읽으면 그들은 골치가 아프다고 할 것입니다. 너무 신학적이에요. 예를 들어, ‘의롭다함을 받는다’, ‘의롭다 하다’는 용어들이 자주 나오는 데, 당신은 그 사람들이 그런 용어들을 다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에요. 당신과 평생을 산 나도 잘 모르는데 그 사람들이 알겠어요?”


아내가 말을 이어 갑니다. “내가 당신이라면 편지를 좀 더 쉽게 쓸 것이에요. 전문적인 신학적 용어들은 다 빼버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 십대 청소년들도 잘 알아듣게 쓰겠어요. 그러면 좋으련만…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지금부터 2천년 후의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끙끙거리면서 씨름을 할 것이에요. 투덜대면서 말이지요.” 마치 우리 집 사람이 목사인 저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아내의 말을 잘 들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도 이 말씀을 읽으면서 끙끙대며 이해하려고 하는 것을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로마서를 등산하면서


바울의 가상(假想)적 아내의 말이 맞습니다. 로마서를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침대에 누워 소설이나 수필을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로마서는 고봉(高峰)으로 가득한 히말라야 산맥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르지 못할 높은 산은 아닙니다. 얼마 전 저는 십여 년 만에 속세를 떠난다는 뜻을 지닌 속리산(俗離山)으로 여러 신학생들과 함께 등산한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 오를 때는 이야기꽃을 피워가며 즐겁게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6.25 기념일이라 가곡 ‘비목’(碑木)을 부르며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숨을 차고 목은 마르고 발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게 되자 한 두 사람씩 뒤로 쳐졌습니다. 기를 쓰고 오르는 사람들의 얼굴도 많이 일그러졌습니다. 더 이상 대화도 없고 누군가 건드리면 돌아오는 대답은 짜증뿐일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젖 먹은 힘을 다해 오기로 올랐습니다. 그러기를 몇 시간, 마침내 정상에 이르렀습니다. 생전 처음 올라본 속리산 정상은 그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는 파노라마와 같은 대 장관(壯觀)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를 자세하게 심각하게 주의 깊게 읽으면 이와 같은 보상을 받게 됩니다. 때때로 지루하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마침내 그 어디에도 얻을 수 없는 통찰력, 심지어 복음서에서도 얻기 힘든 심오한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오늘 아침에 우리는 같이 끝까지 정상에 오를 것입니다.


자, 이제 어느 정도 로마서에 매력을 느끼셨다면, 아니면 저의 말에 약간이라고 설득을 당하셨다면, 다시 함께 본문을 읽겠습니다.


은혜의 복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도다.
   ․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는 소망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도다.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도다.”


이 말씀이야말로 맑고 정결한 복음의 물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순수한 상태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위에 인용한 마지막 세 구절에는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언급합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중앙에는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마치 우리 교회당의 강단 뒤에 서 있는 ‘십자가’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지 않으셨더라면

   ․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과 전쟁 중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묻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십자가에 달려 있다면, 왜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이 
    그 십자가를 배척한단 말인가?”

우리도 묻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져온다면,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절하는 것일까?”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 십자가는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우리의 존엄성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범죄자(흉악범)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흉악범(범죄자)의 얼굴을 쳐다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우리를 쳐다보실 때 무엇을 보시고 계시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쏟아 부으신 것은
    인류가 높은 도덕적 고원에 스스로 도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신 것은 
    사랑을 주면 그만큼 돌려받을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사람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을 때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고집적으로 대들고 반역할 때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도다.”


이것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듣기 좋게 하는 말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사람들의 도덕적 자존감에 대한 일격(一擊)입니다.

   ․ 당신들은 도덕적 자존감이 있는 그럴듯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 당신들은 범죄자들이요 흉악범들입니다. 
   ․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당신들 때문이었소.


이렇게 강하게 일격을 내려치자

   ․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어야만 했다는 소리가 듣기 싫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말이 싫어했습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무신론도 아니고 세속적 인본주의도 아닙니다.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축소된 기독교’, ‘할인된 기독교’ ‘싸구려 기독교’(reduced Christianity)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 자존감의 종교로 전락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치켜세우는 종교 정도로만 알려지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 십자가를 제거한 기독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 기독교는 교양 있고 세련된 현대인들이 액세서리로 가지고 다니는 종교로 
    변신하였다는 뜻입니다.  
   ․ 십자가 없이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고등종교로 기독교를 전락시켰다는 것입니다.


에밀 부른너(Emil Brunner)라는 신학자가 잘 말했듯이, “교회가 지은 가장 큰 죄는 십자가의 복음을 세상에게도 자신에게도 알리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 우리가 우리의 알량한 도덕적 자존감을 내려놓진 않는 한, 
   ․ 우리의 가장 절박한 궁핍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罪責)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 그리스도를 우리의 절실한 피난처로 삼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대항하실 것이며 우리와 싸우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 받아들이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길들여진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축화된 하나님’, ‘길들여진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위험을 느낄 수 있는 최후의 마지막 장소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을 위험천만한 분, 우리와 전쟁을 치르시는 무서운 분으로 알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의 세력 아래 사는 인간


바울이 힘주어 설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한다 해도, 하나님께 우리를 받으실 만큼 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받으실 만큼 우리가 되려고 해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롬 3장에서 바울이 힘주어 설파하듯이,

․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 착하게 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끝에 가서는 비열하고 치사한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 희생적이고 이기적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결국에 가서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 사랑하는(loving)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만 결국에는 사랑대신 미워하고 속이 좁은 인간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지만 끝에는 비참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우리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 모두는 죄의 세력 아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힘 아래 눌려 살기 때문입니다. 죄가 지배하는 영토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도 없다. 모두 다 치우쳐있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10-12,23)


이 말은 이 세상에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숭고하고 고상한 이방인이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죽은 닭들이야!


이 말이 뜻하는 바는,

   ․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문제에 관한 한, 
   ․ 하나님이 보시기에 “괜찮아.” “이젠 됐어!”라는 말을 듣는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죽은 닭이라는 것입니다.

   ․ 그저 병든 닭도 아니고, 
   ․ 떨 뽑힌 닭도 아니고, 
   ․ 절뚝거리는 닭도 아니라, 
   ․ 우리는 모두 죽은 닭, 폐사한 닭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우리 모두가 살인자들, 혹은 성범죄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래도 다 괜찮은 사람들이라 종종 착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울의 핵심은 우리가 아무리 친절하고 착하고 종교적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죽은 닭에서 산 닭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모두는 죽은 닭입니다.

-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의롭다 하실 수 있습니다.


개인적 간증


바울이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은 그의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해 전, 바울이 아직도 그리스도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무슨 이유로 나를 박해하느냐?”


이런 나타나심과 이 질문 때문에 바울은 마침내 그리스도를 위한 일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다.”(행전 9:15)


바울이 자기의 새로운 삶의 이니셔티브를 잡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하나님, 제게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스스로 어둠속에서 뛰어나와 그리스도의 빛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문제’를 갖고 있는 당사자는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였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이방인과 유대인의 세상이라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바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러 해 후 바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여기서 바울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빌어 자신의 삶에 중대한 전환점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바울은 땅은 형체가 없이 텅 비었고 어둠이 깊음의 표면을 덮고 있었던 태고의 혼돈 장면을 제시하면서, 그런 가운데 있었던 자신의 삶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혼돈(chaos)이 온 우주를 덮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질서’(order)가 있게 되었습니다.
   ․ 어둠이 깊음의 표면을 덮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바로 이런 일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혼돈과 어두움이 나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분의 능력(힘)이 나의 혼돈을 질서로 바꾸셨습니다. 그분의 빛이 나의 어두움을 쫓아냈습니다. 마치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다시금 반복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둠가운데서 빛이 있으라’하시던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제 나에게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놀라운 간증입니다.


이런 경험에서 부터 바울은 로마서 5:1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함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그런데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이 마음에 분명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수없이 교회에서 이 말을 들었어도 아직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의 뜻을 잘 알려주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누가 15장의 한 비유입니다. 일명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탕자가 돌아오자 아버지는 달려 나가 얼싸안고 뺨에 입을 맞춥니다. 이 장면을 자세히 기억해보십시오. 분명 탕자의 옷에는 먼 나라의 더러움과 냄새가 깊이 배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아, 괜찮아!”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앞뒤를 가릴 것 없이 단칼로 내리치듯이 아버지는 탕자를 단번에 용서하셨습니다. 한 번도 집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탕자는 단번에 그렇게 취급을 받습니다. 탕자는 탕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대우를 받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말합니다. “너는 내 아들같이 보이지 않아! 너는 내 아들 같은 냄새도 나지 않아!” 그러나 “너는 내 아들이야!” 가슴에서 터져 나온 간결하고도 단호한 선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었던 내 자녀가 다시 살았어!”


내 직업 상, 여러 사람들의 많은 설교를 읽고 듣게 됩니다. 오랜 목회 생활을 통해 내가 발견한 사실은 이 많은 설교들의 바탕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아우트라인이 깔려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설교들은 다음과 같은 아우트라인을 갖고 있습니다. 

1) 여러분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만이 그 문제 대한 유일한 대답이다.
3) 그러므로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십시오.


많은 설교들이 우리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생각나게 함으로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이혼 통계, 성의 남용과 약물남용, 자살율과 범죄율 등을 열거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를 상기시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들은 두 번째 요점으로 넘어갑니다. 그리스도가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듣는 상투적인 설교는, 이 세상이 제공하는 대답들은 적절하기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들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대답은 단순하고 하나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의 대답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대답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들은 세 번째 요점으로 넘어갑니다. 그리스도가 대답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설교들이 주저앉게 됩니다. 회개와 구원에 관한 것이 정말로 이 설교들이 말하듯이 그렇게 오는 것일까요?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왜 많은 설교들이 주저앉게 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말씀하기를,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기를 바라는 것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려고 하지만, 아무리 설교자들이 우리가 얼마나 못된 죄인인가를 느끼게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죄에 관한한 우리는 절뚝거리는 닭도, 떨 뜯긴 닭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죽은 닭들’입니다. 죄에 관한한 우리는 스스로를 치료할 수 없는 나병환자들입니다.


다시금 반복합니다.

1) 여러분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가 대답이십니다.
3) 그러므로 회개하시고 구원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유형의 설교가 무엇이 문제인줄 아십니까?

   ․ 좋은 소식(복음)을 뒤로 물러가게 합니다.
   ․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수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항상 우리가 하는 것보다 앞선다.
   ․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의 회개를 앞선다.
   ․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 그분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즉,

   ․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은혜로우셨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사랑받을 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적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아멘.
 
[2009년 7월 5일 주일 설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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