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예수님과 악수를 하면 어디가 덧나나요?”

누가 7:36-47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주제 문구: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45절)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바리새인의 저녁 식사 초대를 받고 그의 집에 가셨습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예수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아서인지,
     ․ 그가 행한 기적들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였는지
     ․ 자기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는지
     ․ 자신의 생일이나 진급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선생님’(랍비)이라고 부른 것을 보아서 예수님과 함께 약간의 신학적 주제로 토론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잘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 친밀한 관계가 아닌 예수님을 언젠가 한번 정도는 여러분의 식사에 초청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무슨 이유인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바리새인의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갔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자주 식사 초대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목사들도 식사 초청을 많이 받는 특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어쨌든 예수님을 초청한 시몬도 다른 모든 바리새인들처럼 의롭고 경건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야기 전개

 

예수께서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있을 때 정말로 황당하고 당황스런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지 않은 “그 동네에 잘 알려진 한 죄인 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더니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이었던지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긴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더니 눈물에 젖은 예수의 발을 닦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발에 키스를 하더니 엄청나게 비싼 향유를 발에 부어 적셨습니다. 만찬 장소의 분위기는 급속하게 얼어붙었고 사람들의 입은 굳게 닫혔습니다. 매우 황당했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대부분의 성경 해석자들은 아마 이 여인이 창녀(harlot)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대 여성들 가운데 오로지 창녀들만이 공공장소에서 머리를 풀어 젖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름을 갖고 있는 시몬과는 달리 이 여인은 이름이 없습니다. 마치 그녀가 지은 죄가 그녀의 공적(公的) 정체성(이름)을 빼앗아가기라고 한 듯 말입니다. 그녀는 그저 ‘죄인’(sinner)으로 알려져 있는 여자였습니다.

 

시몬은 아주 불쾌했습니다. 그러나 품위 있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서 그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끌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 여자뿐 아니라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래? 그렇다면 네 말대로 내가 진짜 선지자인줄 보여주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늘 하시던 대로 예수님은 비유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심으로써 자신의 예언자적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어떤 한 사람에게 자기들의 갚을 능력보다 더 많은 돈을 빚졌어. 한 사람은 50일치의 임금을 빚졌고, 다른 한 사람은 500일치의 임금을 빚졌지. 그런데 놀랍게도 채권자는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어. 두 사람을 모두 용서해준 격이란 말이지.” 이야기를 마치면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물었습니다. “자, 시몬! 네가 생각할 때 누가 그 주인을 더 사랑할 것 같아?” 그러자 그 바리새인이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당연히 큰 빚을 진 사람이겠지요.” “맞다! 네 말이 맞아!”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시몬, 이 여인을 보느냐?” “시몬, 이 여자가 보이는가?” 매우 충격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분명 시몬은 두 눈으로 이 여인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녀가 지금 저지르고 있는 황당한 행위를 어찌 못 보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자를 보느냐?” “당신! 뭐 보이는 게 있어?” “시몬, 정말로 이 여인을 보고 있느냐?” “이 여인이 누구인지 아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녀(죄인)가 당신 안에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살고 있는 두 사람”

  [바리새인]

 

 

우리 안에는 한 명의 바리새인과 한 명의 죄인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우리의 일부분입니다.

     ․ 규칙을 잘 지키려는 우리,
     ․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있는 우리,
     ․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 우리,
     ․ 우리의 ‘평판’(이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는가 하고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우리, 이런 우리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인

        입니다.

 

이 바리새인이 누구입니까? 그는 일간 신문의 사회면에 종종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상당한 사회적 자산을 갖고 있었던 것에 틀림없습니다. 보아하니 그의 사회적 성향은 진보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말도 많고 사회적 문제 거리였던 예수님을 저녁 파티에 초청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 일이 충분히 사회적 이슈가 되거나 자기가 속해 있는 바리새파 안에서도 공격을 받을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그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회적 자산이 충분했던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동네 사람들이 서로에게 수군거리며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 오늘 저녁 시몬의 파티에 갈 것이야? 시몬이 예수도 초청했다고 들었는데? 아주 흥미로운 파티가 될 것 같군!”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에 대해 친절했고 자신이 개방적인 사람으로 보이기를 바랐습니다. 즉 모든 생각이나 이념들에 대해서 열려진 사람처럼 보이기를 바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훌륭하고 멋진 이 바리새인의 삶에 있어서 최소한 한 가지가 결핍하였습니다. 아니 이 한 가지에 의해 그의 훌륭한 삶이 더렵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이 발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의 크리스천들, 소위 ‘괜찮은 죄인들’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인]

 

바리새인 안에는 밝은 면뿐 아니라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달리 말해 바리새인 안에 죄인도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부분 즉 바리새인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인은 이 창녀와 비교할만한 어떤 끔찍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바리새인들은 자아성찰에 탁월한 전통을 지니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들에게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삶 속에 깊이 파묻고 싶은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 아마 그것은 그의 자녀들의 성적 성향이나 삶의 방식들과 행동들과 관련될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 아니면 자신의 젊은 시절의 어두웠던 부분들이나 방탕한 이력(履歷)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 아니면 그의 경제적 상태나 사회적 지위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위험한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 아니면 마음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죄인이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제는 그렇게 겉으로 안 그런 척 하고 살지 말고 다 터뜨려
버려. 마음대로 자유

         롭게 살아봐. 한번 마음대로 삶을 즐겨봐. 그렇게 살아봐야 너만 손해야”라고

         하는 계속되는 유혹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바리새인이 아닌 공적인 바리새인, 겉으로 나타나 있는 바리새인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미지를 보강하고 지탱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매일같이 부지런히 삶을 가꾸어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공적 바리새인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치고 모든 일들이 시들해지고, 우리가 행한 모든 올바른 일들이 더 이상 우리의 삶에 동력이 되지 못할 때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인과 조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중 모두가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두 나쁘다면 오늘 여기 교회당에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곳에 가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쁜 사람이 왜 교회당에 와 있겠습니까? 괜찮은 사람들이니까 교회에 나와 예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중 아무도 모두 괜찮지는 않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모두 선하거나 착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속에 바리새인과 죄인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시몬의 측면을 강하게 확신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을 잘 발전시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그늘진 곳에 웅크리고 있는 죄인은 숨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숨기려 해도 깊숙이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속의 죄인은 항상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우리 속의 바리새인 쪽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다 지칠 때, 반대쪽에 있던 죄인이 부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녀와 짐승”(the beauty and the beast)이 함께 있어 한쪽이 떠오르면 다른 한쪽이 가라앉고, 다른 한쪽이 가라앉으면 다른 쪽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돋보이는 바리새인 쪽은 그동안 우리가 세워왔던 모든 것을 내면의 죄인이 허물어뜨리는 방식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죄인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우리는 그 죄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마치 시몬이 자기 집에 들어온 죄인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직한 사람도 아니고 신앙이 좋은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떨까 하고 두려워합니다.

 

물론 요즈음에 세상이 많이 바뀌어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 순간도 그런 생각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사회적으로 연결되고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지금부터는 누가 뭐라 해도 오직 하나님께서 내게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만 상관하겠어요. 그런데… 남편. 그래 하나님과 남편만. 그런데 자녀들은 어쩌나. 자녀들에게 모델 역할이 되어야하는데 말입니다. 그래, 하나님과 남편과 자녀들. 그런데 물론 교회 교인들도. 그래 오직 하나님, 내 남편, 내 자녀들, 그리고 교회 교인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도 뺄 수는 없겠네요.” 이 부인은 자신에 대해 비아냥대면서 농담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듣고 보면 이 부인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름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관심사항입니다.


바리새인과 죄인을 함께 초청하시는 예수님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은 우리 안의 죄인을 공중 앞에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을 것 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파티를 열어 예수님을 초대했다고 합시다. 마치 예배에 예수님을 초대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내면의 죄인이 나타나기를 바라겠습니까? 사실 이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예배에 온 것은 내 안에 바리새인과 죄인을 함께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 속의 바리새인을 드러내고 싶어 하면서도 내 속의 죄인은 깊숙이 숨기려 할 것입니다. 어쨌건 우리는 죄인을 파티에 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죄인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인을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선한 부분, 착한 부분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과 죄인을 모두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사랑 때문에 그는 그들 모두를 용서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 여러분 안에 있는 죄인은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그 죄는 그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용서받는다고 할 때는 “해방되다”, “놓임을 받다”, “자유로운 몸이 되다”는 뜻입니다. 죄를 용서함 받지 않고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이 통제하고 제어하려고 애쓰는 그 죄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 여러분 안에 있는 바리새인도 용서 받아야 합니다. 스스로 착하고 선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죄들을 용서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선한 삶, 착한 삶, 괜찮은 삶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좀 더 착해지고 좀 더 선해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실수할까봐, 잘못할까봐, 실패할까봐, 죄를 지을까봐 조마조마하며 걱정합니다. 바리새인은 그 누구보다 근심걱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근심걱정은 마음을 좀 먹어 들어갑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마음’, ‘함께 눈물을 흘리는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이 앓고 있는 치명적 병이며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설명하셨듯이, 죄인은 자신이 주님의 용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함을 받았을 때 그녀는 아낌없이 풍성하게 넉넉하게 사랑하는 일에 자유로웠습니다. 거침없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과 그녀의 차이점이 있다면 용서받은 후에 행하는 거침없는 사랑이었습니다.

     ․ 시몬은 예수께서 자기 집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중동 지방의 풍습은 손님이 오시면 대야에 물을 떠
발을 씻도록 하는 예절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최소한의 예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

       으로 그녀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 시몬은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에게 환대의 표시로 입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 시몬은 향유로 예수님의 마리에 바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적셨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용서

 

여러분은 이 여인이 보입니까? 여러분의 바리새인 안에 숨어 있는 죄인 말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누가 15장에 등장하는 큰 형님, 큰 아들이 아닙니까? 겉으로 보기에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 말입니다. 누구의 손가락질도 받지 않을 정도로 항상 곧은길(正道)을 걸어오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 사람 말입니다. 그는 사랑이란 가족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에게로 가는 고향 길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용서받는 것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용서받는 것입니다. 오직 용서받은 사람들만이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아하고 품위 있었을 저녁 파티의 판을 깨뜨려버린 이 여인의 모습을 생각하며 충격을 받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런 일을 하게 하였을까? 어떤 연유 때문에 그녀는 그 장소에 나타나 그런 충격적인 일을 했던 것일까? 어떤 열정이 그녀로 그런 일을 하게 하였단 말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합니다.”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그 사랑은 그들의 마음에서 흘러넘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놀라운 일들’, ‘거침없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 그들은 집 없는 사람들을 먹이는 일이 쉽다는 것을 압니다.
     ․ 가난한 학생들을 개인 교습해 주는 일이 쉽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지역의 정치나 학교의 학부모회에 참석합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공동의 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호의와 은혜를 베풀기로 작정합니다.
     ․ 저 죄인 여인에 대해 쑥떡거리거나 쓸데없는 말들을 돌리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 그들은 자신들의 돈을 기꺼이 냅니다.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선물로 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그들이 용서를 발견했다는 기적을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이제 내면의 죄인을 정화하고 승화시키는데 들어가던 모든 에너지들은 ‘공짜로 사랑하는 일’에 투여됩니다.

     ․ 공짜로 사랑합니다!
     ․ 사랑하는 일에 자유롭습니다!
     ․ 사랑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자유 합니다!
     ․ 두려움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자유 합니다!
     ․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이 세상 안에 변화를 만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아멘.

 

 

 

[무지개교회 주일 예배 설교전문, 2009년 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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