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설교: “너희는 소금과 빛이다!”

2010.06.20 21:04

류호준 조회 수:13310

“너희는 소금과 빛이다!”

마태 5:1-2, 13-16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등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다.” 이것이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은 듣기 바랍니다.

 

소금과 빛(등불)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잘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정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께서 어렸을 때 어머니 마리아가 부엌에서 소금을 사용하여 음식을 저리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썩는 것을 막기 위해 소금을 사용합니다. 물론 음식에 간을 맞추고 맛을 내기 위해서 소금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 옛날에는 등불을 사용했습니다. 해가 진후 부엌에 들어가려면 등불이 필요했습니다. 어둠 컴컴한 부엌에 등불은 필수였습니다.

 

자, ‘산상(山上) 설교’에서 예수님은 이 일상적인 이미지들, 즉 소금과 등잔 이미지를 사용하여 우리가 누구인지,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신지를 알려줍니다.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등불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인 우리는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 이 세상은 썩고 부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금입니다. 부패하는 것을 막습니다.

    · 이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등불입니다. 빛입니다. 어둠을 쫓아냅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백성으로 세상에서부터 불러내십니다. 백성을 불러내신 것은 우리에게 “거룩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었다.” “너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거룩하여라.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도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놀라운 빛 안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빛을 반사하여 이 세상의 어둠속으로 비추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등불이다!”

(1)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어야만 한다!” “너희는 이 세상의 등불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결정해야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소금과 등불이 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해야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상관없이 우리는 소금이며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소금이며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도와 소금됨, 제자도와 빛 됨은 불가불리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등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소금과 등불을 소유하거나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금과 등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손에 들려주어 우리 마음대로 사용하라는 것들이 아닙니다.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가지고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하지 않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예수는 우리에게,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거나 “너희는 이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앞으로 일어나야 할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는 장차 도래할 그 무엇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장차 어느 날 우리가 이 세상의 소금과 등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단도직입적으로 분명하게 “너희는 이미 이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미 이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보십시오. 그분은 말씀하기를 “나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가졌다. 나를 믿는 자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앞으로 되어야할 그 무엇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된 것에 관한 것입니다.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등불이다!”

여러분은 이 말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습니까? “예, 맞습니다. 비록 주변 환경을 둘러보고,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그 말씀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이 말씀을 들으면 왠지 거림직하고 어색하게 들리십니까? “아마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 하신 말씀일거야. 그렇게 말씀하셨더라면 좋았을 걸.”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다시 말해 예수께서 “나는 이 땅의 소금이다. 나는 이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만일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더라면, 아마 여러분은 “나를 보지 마세요. 예수님을 보세요. 그분이 이 땅의 소금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의 등불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금이며 우리가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인칭 단수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이인칭 복수형을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께서 이 말씀을 그의 제자 집단을 향해, 제자 공동체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 제자들의 모임(fellowship)이 이 땅의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 제자들의 공동체(fellowship)가 이 세상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 제자들의 사귐(fellowship) 자체가 이 세상의 소금이며 등불입니다.

 

프랑스의 시골 어딘가에 작은 교회가 있습니다. 물론 장로(개혁)교회입니다! 매 주일 저녁예배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등잔들을 들고 교회로 갑니다. 골동품 등잔들입니다.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이 등잔에 불을 밝혀 장의자 뒤쪽 양쪽 면에 놓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전통의 시작은 1550년경으로 돌아갑니다. 종교개혁운동 당시였죠. 등잔들은 교인 개인소유가 아니라 교회 재산이었습니다. 교회가 그 등잔들을 교인들에게 대여해준 것입니다. 교인이 죽으면 그 등잔은 다시 교회로 반납해야합니다. 무엇을 상징합니까?

     ·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교회는 밝아졌습니다.

     ·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적으면 교회당은 어두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공동체로서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교회로서 너희는 이 세상의 등불이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책을 남기시지 않으셨습니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학교를 남기시지도 않으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은 “구속(救贖)된 작은 공동체, 구속(救贖)하는

       작은 모임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들, 보통사람들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합하여 내는 빛으로 당시의 어둔 세상에 밝힌 그런 공동체를 우리에게 남겨

       두신 것입니다.

 

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똑똑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능력이나 권력이 있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비천한 계층 출신들이었습니다. 상당한 기간 동안 그들 대부분은 로마제국의 시민들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빛의 담지자(擔持者)’들이었습니다. 등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그들 자체가 등불이며 빛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프랑스 개혁교회의 교인들처럼 그들은 그들의 빛을 하나로 모아 주변의 어두움 속으로 빛을 비추었습니다.

 

      · 집중한 소수는 산만한 다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 희미하고 연약한 개별적 불빛들이 모여 강력한 광선을 만들어 냈습니다.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등불이다!”

      · 크리스천들인 우리는 비 기독교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 이 세상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 이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며 등불입니다.

 

        - 우리는 썩어 냄새나는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 우리는 어둠인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봉사하거나 헌금할 때 우리는 나팔을 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인정받기를 좋아합니다. 자기 이름 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같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경건한 척하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용어를 사용하여 그럴듯하게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들은 그런 사람들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마치 빛이 어둠과 다른 것처럼 그렇게 다릅니다.

 

우리는 항상 근심 걱정하고 사는 사람들, 끊임없이 걱정하고 사는 사람들처럼 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 라이프스타일은 그들과 다릅니다. 빛이 어둠과 전혀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 소금으로서 우리는 보존합니다. 

      · 빛으로서 우리는 빛을 비춥니다.

 

 

        · 세상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으로서 우리는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 세상은 어둡습니다.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는 어둠속에 빛을 비춥니다.

 

우리는 비기독교 사회 속으로 퍼져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비 기독교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그들과 사회적으로 격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 소금은 소금 그릇에 그대로 있는 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 등잔을 커다란 소쿠리 밑에 놓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크리스천들로서 우리는 사회에서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겠습니까? 사회 안으로 깊이 침투하여 들어가야 합니다.

 

그저 소금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주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당당하게 “나는 그저 소금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여성입니다. 누군가요? 예, 롯의 아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오면서 그곳에 두고 온 것들, 그녀의 과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린 그 아주머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그저 소금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주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냥 소금으로만 남아 있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먹을 수도 없습니다. 소금이 유용하게 될 때는 소금이 다른 것들과 섞여질 때입니다. 다른 것들 속으로 들어갈 때입니다.

 

여러분이, 우리는 이 땅의 소금이라고 말한다면 그 뜻이 무엇인줄, 무엇을 의미하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이 땅의 소금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문제들’ 속에 던져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들끓는 냄비 속에 소금을 뿌려 맛을 내듯이, 들끓고 있는 문제들 속으로 들어갈 마음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탁상용 소금 그릇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냄비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있는 다른 것들과 섞여 맛을 내고 간을 맞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맛소금!

 

소금이 다른 것들과 섞이지 않는 한,

        · 소금은 짭니다.

        · 아프게 합니다.

        · 따갑게 합니다.

        · 쓰라리게 합니다.

        · 상처를 냅니다.

 

소금 홀로는 아무도 그것을 참아낼 수 없습니다. 아무도 소금 홀로를 견딜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해를 끼칩니다.

 

냉장고가 발명되기 이전 시대에, 소금은 최상의 방부제 역할을 했습니다. 생선이나 고기에 뿌리거나 아니면 소금으로 생선이나 육류를 절이면 부패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나를 따르는 자들은 이 사회가 부패하고 썩는 것을 막거나 최소한 둔하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사회적 영향력은 왜 이리도 저조한지요? 왜 이렇게 욕을 많이 먹습니까? 심지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까지 폄하하는 지경까지 왔습니까? 국회의원의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이며, 교회에서는 장로와 집사들입니다. 사회 각계각층의 저명한 인사들 가운데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데 왜 각종 사회적 스캔들이 일어나면 거의 따라오는 불명예는 “그들은 기독교인이래.”라는 말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것은 소금이 그 짠맛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소금이 되게 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밋밋한 메시지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날카롭고 혁신적인 메시지로 출발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의 기준과는 너무도 다른 혁신적이고 근본적으로 다른 기준들과 가치들을 담은 메시지로 로마 제국을 놀라게 했습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가치체계를 담은 메시지를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교회가 자라고 성장하고 좀 더 힘과 세력을 갖게 되자, 교회는 타협하는 일에 점점 능숙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교회는 싱겁고 김빠지고 맛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통렬한 날카로움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만이 갖고 있는 맛,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그 맛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습니다.

         ·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맛을 잃는다면

         · 우리가 싱겁고 김이 빠지게 된다면

              -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소금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예수님은 우리는 소금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맛을 잃는 것이며, 싱겁게 되는 일이며, 김이 빠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이기를 부정하는 것은 마치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정원 안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이 중대한 부인입니다.

 

          · 우리가 맛을 잃으면,

          · 아니 “맛이 가버린 사람”이 되면,   

          · 우리가 우리의 제자 됨을 타협하게 되면,

          · 우리가 우리의 첫 사랑을 버리게 되면,

          · 카멜레온처럼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섞여 지낸다면,

                     - 어떻게 우리의 짠맛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싱거운 소금으로서 우리는 더 이상 아무데도 쓸모가 없어 질 것입니다. 그저 버림받아 발에 밟힐 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즉 심판의 측면입니다. 맛을 잃어버리면, 쓸모없게 되면 버림받게 된다는 섬뜩한 말씀입니다.

 

동시에 예수임의 말씀의 긍정적인 측면, 밝고 환한 측면, 즉 약속의 측면도 있습니다. 그것은 숫자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어떤 좋지 못한 농담이나 비아냥거림에 대해 웃거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면, 그런 소금은 나머지 사람들을 맛내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적대감으로 독이 퍼진 분위기에서 용서를 실행한다면,

           갑가기 그런 상황에서 치유의 요소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신앙을 지켜내기 힘든 상황에서도 굳세게 믿음을

           지켜낸다면 한 그룹의 전체 분위기는 갑자기 짭짤한 맛을 내게 될 것입니다.

         · 두려움에 덜고 있는 그룹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평화(샬롬)를 발산한다면,

           그 소금은 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며 빛을 어둠 속에서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의 소금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빛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등불입니다. 아멘.

 

[무지개 교회 주일 설교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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