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기독교대학교육의 특징: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선지자와 중보자로서의 리더들을 교육하기

   Dr. Justin D Cooper, President Emeritus

Redeemer University College

Ancaster, Ontario, Canada


2010년 10월 27일 백석대학교 해외석학초청강연


번역: 김병국 교수

 

 

서론


백석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오늘 아침에 이곳에서 강연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특별히 나를 초청해 주신 하원 총장님과 이 행사를 준비해 주신 박정숙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이 발전하고 있는 기독교대학에 직접 와서 여러분들이 기독교대학교육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게 되어 무척 감격스럽습니다.

   

대학교수로서 여러분은 주님께 받은 대단히 특별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젊은 기독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성경적 세계관에 대해 정신과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하고, 다양한 학문분야에 있어서 성경적 세계관이 갖는 영향력을 그들이 인지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내 식으로 표현한다면, 선지자적이면서도 중보자적인 지도자들로 양육해야 합니다. 비록 나는 다른 문화와 교육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나는 리디머대학교(Redeemer University College)에서 학문적 작업을 하고 있는 우리도 유사한 도전들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Christ-centered) 대학으로서의 우리의 사명을 충실히 반영하는 교양교육과 전공교육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학교에 대해 잘 모르는 입장이기 때문에 내가 부정확한 사실을 가정하거나 여러분의 상황에 적용하기 힘든 문제를 다룬다 해도 이를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백석대학교의 교육프로그램을 계속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이 강연을 통해 여러분을 돕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함께 기독교대학교육을 되돌아보고 대화를 나눔을 통해 내가 여러분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나는 기독교대학교육의 특징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들 중 일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기독교대학교육은 그것이 기독교 리더십과 봉사를 위한 효과적인 준비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특징들을 지녀야 합니다. 그 교육을 받은 학생이 어느 분야에 진출하여 어떤 직업을 갖게 되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의 강연을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진행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나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주요 도전들에 대해 개관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학생들을 기독교대학교육을 통해 잘 준비시키기 위해서는 그 도전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둘째로, 나는 학생들로 하여금 이런 도전들에 대응할 능력을 갖추게 해 주는 선지자적, 중보자적 리더십이라는 목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 이를 위해 그들을 준비시킬 수 있는 기독교대학교육의 핵심적 특징들에 대해 개괄적 설명을 제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경험적 차원을 포함하는 잘 갖추어진 그리스도 중심적 교양교육과 전공교육의 경우를 살피면서 높은 학문적 수준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할 것입니다.


셋째로, 나는 성경적 세계관의 윤곽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적 세계관이 우리가 가르치는 여러 학문분야들의 근본적 이슈들의 모습을 결정하는 중요한 방식들에 대해서도 설명할 것입니다. 나는 이런 기초와 방향을 가지고 있는 대학교육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도 잘 어울리며, 우리의 학생들에게 지식뿐만 아니라 지혜와 분별력까지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기독교대학교육이 참으로 학생들의 개인적, 특히 영적 발전에 공헌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다 넓은 의미의 비공식적 혹은 공통교과과정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실제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할 것입니다. 여기서 멘토링이라는 주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다양한 소명과 직업 속에서 활동할 선지자적이고 중보자적인 지도자들을 부지런히 양성해야 한다는 호소로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동아시아에서의 기독교대학교육에 대한 공헌이라는 독특한 사명을 계속 감당해 가실 것을 권면할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도전들


우선 우리에게서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게 될 현대사회의 주요 영적 조류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비록 그런 분석은 그 자체가 방대한 작업이 되겠지만, 나는 우리의 문화와 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두 개의 중요한 특징들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려고 합니다. 그 두 가지를 특별하게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학생들이 맞서 싸워야 할 오늘날의 주요 영적 문제들을 대표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세계관의 범주에서 보자면, 오늘날의 싸움들 중 하나는 근대주의(modernism)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인간지식에 대한 그것들의 서로 다른 견해들 사이의 싸움입니다. 이와 관련된 현상으로는 개인주의의 영향력을 들 수 있고, 또 개인의 자율성 및 선택의 자유에 대한 개인주의의 침식(侵蝕)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공헌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기로 합시다.


근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갈등은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의 기간 동안 대학교육의 무대 위에 갑자기 등장한 것입니다. 비록 그 두 가지 모두가 인본주의적이라는, 즉 진리를 찾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 실천을 추구한다는 공통의 출발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인본주의 진영 내부의 근본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과학적 합리성을 통한 진보의 추구라는 19세기 실증주의와 계몽주의 프로젝트를 그 뿌리로 삼고 있는 근대주의는 과학 혹은 기술에 있어서의 종교적 중립성이라는 신화를 그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사실-가치’(fact-value) 이원론이라는 그들의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 근대주의자들은 기독교신앙을 학문 및 연구 분야와 연결시키려는 자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심의 눈길을 보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런 일은 과학적인 작업 속으로 주관적 편견을 부당하게 주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들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의 이 잔재로 인한 그런 왜곡은 우리 사회와 직업의 영역들 속에서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정보기술의 빠른 발전과 유전자공학 및 생명과학의 진보는 이 세계관에 계속해서 환호를 보내고 있는 두 분야들입니다. 동시에 과학이 참된 진보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데 대한 환멸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증거하기 위한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과학적 자연주의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 역자)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사회와 인간의 삶 속에서 종교적 헌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과학적 자연주의의 암묵적인 반감을 폭로하고, 과학적인 용맹성이 계속 생산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로 하는 어떤 제한성에 대해 증거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동일한 환멸이 또한 혼란감과 영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 사회 속으로 침입해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닦았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은 그것의 관점주의(perspectivalism) 혹은 상대주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기꺼이 모든 관점들을 받아들이고, 모든 이야기들을 다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지식은 부분적이며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기독교 신앙과 같이 보편적 진리를 주장하는 전통적인 종교적 관점에 대한 반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개인적 혹은 집단적 영성에 대해 개방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세계관이나 거대담론(metanarrative)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이런 것들은 그 정의 자체에 있어서 잘못된 위치에 놓여진, 위법적인 강요로 간주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 어떤 참된 학문적 대화에서도 배제되어야 하는 억압적인 어떤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과거에는 논의에서 배제되곤 했던 소수의 대안적 견해들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입니다. 이를테면 페미니즘, 동성연애의 관점, 동양신비주의 혹은 환경주의(environmentalism)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와 같은 포스트모던 세계관에 직면하여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겸손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이와 같은 상대주의의 늪지대 속에서 창조된 질서를 향한 방향감각을 제시해 주고 든든한 도덕적 세계를 지시해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현대문화의 주목할 만한 두 번째 특징은 개인주의 정신의 팽배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의 자유에 대한 세속적 헌신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윤리적 상대주의, 소비주의, 쾌락의 추구, 혹은 다원적 영성의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에게는 규범적 경계선들을 재 정의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태아, 노인, 혹은 약자들의 죽음의 문화; 마약의 사용, 성적인 난잡함, 그리고 포르노를 허용하는 문화; 그리고 물질적 쾌락의 추구를 칭찬하는 소비주의 문화. 마찬가지로 뉴에이지 영성 역시 개인적 경험과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그 어떤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개념도 없습니다. 이런 풍조가 만연한 환경 속에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자기표현이 의미를 갖는 원칙 있는 다원주의와 공동체적 환경과 제한들의 실체를 이해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동아시아 혹은 한국의 세계관이나 전통적 종교들에 대해서는, 비록 그것들이 여러분의 사회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지만,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를 여러분의 상황에 보다 잘 적용하기 위해서는 보충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언급하는 내용의 일반적인 방향은 한국적 상황에서도 참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지자적, 중보자적 리더십과 봉사


학생들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의 도전적인 환경을 생각할 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학생들이 그런 사회와 세상에서 올바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기독교대학교육이 그들에게 무엇을 제공해 주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리더십과 봉사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통찰력과 방향감각을 그들은 어디서 얻어야 합니까? 내가 볼 때는 우리 학생들의 기본적인 지향점은 다음의 두 가지를 겸한 것이어야 합니다. 문화를 분별하고 비판할 수 있는 선지자적 대리인이 되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회적 변화와 개인적 회심을 위한 중보자적 대리인이 되는 것. 그들의 궁극적 과제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함을 통해 이 시대의 정신을 분별하고 비판하며, 하나님께 보다 더 순종하는 방향으로 문화를 이끌고, 올바른 사회적 행동을 실천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들이 가장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들 주위의 세상을 파악하고, 문제가 되는 근본적 이슈들을 분별하고 진단할 수 있는 지적인 도구들입니다. 그들은 또한 그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변화될 수 있는 실체를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용기 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도전할 수 있기 위해서, 또 시대의 정신과 맞서 싸우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들은 또한 거룩한 용기와 신념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문화적 참여의 선지자적 모습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한 비판과 새롭게 함을 통해 그런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이 기독교 지도자들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어떤 봉사의 자리로 이끄시건 또한 변화와 화해의 대리자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대에서 바쁘게 살고 있는 우리들과 우리의 학생들은 선지자적 임무뿐만 아니라 또한 중보자적 임무를 수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오실 왕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소망 때문에 죄와 불순종에 대해 기꺼이 대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통하여 갱신과 새로운 순종이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들 자신을 기꺼이 그 괴리된 간격 사이에 두어야 합니다. 나는 여기서 이사야 59:14-17의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리디머대학교(Redeemer University College)의 홀에 예술작품으로 표현되어 전시되고 있습니다.


   “14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 도다. 15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 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17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여기서 선지자는 광장에서 진리와 정의의 상실을 외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설 중보자를 찾습니다. 그 중보자는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선지자처럼 문제들에 직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제사장처럼 희생적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학생들을 그런 방향으로 교육시킬 수 있겠습니까? 나는 높은 수준의 잘 갖추어진 기독교대학교육이 여전히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서 나는 실속 있고 튼실한 기독교대학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특징들을 지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첫째, 높은 학문적 수준을 유지해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둘째, 잘 갖추어진 교양교육과 전공교육 교과과정입니다. 그것은 성경적 세계관의 의미를 실천하고 또한 경험적인 학습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셋째, 전인격의 개발, 그 중에서도 특히 영적 성장과 생명력을 발전시키는 비공식적 혹은 공통 교과과정입니다. 나는 다음의 두 섹션에서 공식적, 비공식적 교과과정의 이런 차원들을 다룰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학문적 수월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려고 합니다.



높은 학문적 수준의 중요성


높은 학문적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일은 뭐든지 다 잘 해야 합니다. 특히 근대주의자 혹은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동시에 내가 이 주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잘 훈련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과 그 가족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더 크고 명성 있는 비기독교대학으로 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은 이런 사실 때문에 교양교육 및 일반학문 특히 성경적 세계관의 형성을 위한 교육과정을 덜 강조하게 되는 지도 모릅니다.


구직난이 점점 더 심해지는 환경 속에서 뛰어난 전문적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원하는 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자격을 갖출 것이 점점 더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런 도전에 직면하여 나는 기독교 교양교육과 전문교육 사이, 그리고 기독교적 관점의 교과과정과 전문적 주요 교과과정 사이를 둘로 나누는 이원론을 피하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두 가지 관심사에 대해 동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 두 가지 모두를 높은 학문적 수준과 기독교적 성실성으로 대해야 합니다.


교양교육에 있어서 우리는 훈련되고 잘 갖추어진 기독교대학교육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런 교육은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근본적인 이슈들을 다루어 주어야 합니다. 잘 갖추어진 기독교대학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은 비판적 사고, 분석적 능력, 문제해결, 창의성, 그리고 컴퓨터 다루기, 수리적 사고, 글쓰기와 말하기 등에 있어서 바람직한 능력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기업들은 종종 우리에게 자신들은 좋은 배움의 기초를 갖춘 학생들을 고용하여 직업에 맞게 훈련시키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전문적 지식의 면에 있어서, 만약 어떤 학생의 전공영역이 전문적 훈련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성경적 세계관과 그가 학습하는 주제들, 그리고 전공학습이 이루어지는 환경을 연관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적 통찰력과 지혜가 다양한 직업과 소명의 훌륭한 수행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도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부르심에 충실했던 훌륭한 졸업생들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들은 기독교대학교육을 성실하게 받았고 이런 믿음의 발걸음이 그들의 전문적 직업에 있어서의 지도력과 탁월함으로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잘 갖추어진 기독교 교양교육과 학문교육


이런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독교 교양교육과 학문교육이 그 성격에 맞게끔 잘 갖추어져야 합니다. 잘 갖추어진 학문적 프로그램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가 갖추어야 할 모든 면들을 다 다루어 줄 것입니다. 기초적 기술과 전공분야에 덧붙여져야 하는 두 개의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일반교육과정(general education courses)과 경험적 학습의 기회입니다. 교양과목과 학문 프로그램에는 일반교육이 요구하는 것들뿐만 아니라 과학, 사회과학, 예술, 그리고 인문과학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성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교과과정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정원 속을 걷는 그런 학문적 산책은 자연세계와 인간세계의 여러 측면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도 중요하고,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발전시키고, 분석적이면서도 미학적인 차원의 분별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분석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에 대해서는 창조라는 성경적 주제를 다루면서 다시 살필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모든 것들의 기초는 성경적 세계관 혹은 삶과 세상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발전입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성경적 이해 그리고 자연과 환경, 문화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인간의 위치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모든 교과과정에 있어서 근본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독교대학교육의 영적 에너지와 강조점은 성경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성경적 세계관의 윤곽을 이끌어 냅니다. 기초가 잘 다져지기 위해서는 학생들은 성경적으로 방향이 설정되어 있고 학문적으로 잘 다듬어진, 인생과 현실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즉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을 학문적 활동의 근본적 문제들과 연관시키려고 하기는 하지만, 성경에서 성경적 세계관의 윤곽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철학적 체계로, 또 거기에서 여러 학문분야의 근본적 문제들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기에서 특정한 현실 속에서의 구체적인 적용으로 이어지는 단 하나의 미리 정해진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기독교 전통, 특히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사상으로부터 나온 포괄적 틀의 개념, 실재에 대한 건축 구조적 관점, 성경에 뿌리를 둔 세계관은 종종 신앙과 학문의 통합의 목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위한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학문적 접근방식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볼 바와 같이, 이 생각은 실제로는 신앙과 학문의 불가결성(integrality)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것은 모든 학문은 단지 형식적인 종교적 기초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삶과 세계에 대한 시야, 즉 우리의 세계가 하나님께 속했음을 인정하는 시야입니다. 세계는 성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 질서가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인간이 죄 속으로 타락한 이후에, 세상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인해 구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때까지(참조, 골 1:15-19) 성령의 능력과 지도하심에 의해 하나님과 화목 되고 있습니다. 이 성경적 세계관은 네덜란드의 신칼빈주의(Neo-Calvinist) 철학자인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에 의해, 전체를 아우르는 성경적 주제들인 창조, 타락, 구속으로 요약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의 미래의 왕국의 범우주적 차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창조, 타락, 구속에 덧붙여 그 완성(consummation)까지를 포함하는 성경적 틀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보다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실재와 우리의 창조,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새롭게 됨 혹은 성화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완성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복음을 외치고 실천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종말론적 과제를 또한 강조합니다. 그 과제는 우리에게도 맡겨져 있으며 예수님께서 그의 나라를 완전히 이루시기 위해 재림하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보다 완전한 설명은 크레이그 바르톨로메(Craig Bartholomew)와 마이크 고힌(Mike Goheen)의 저서인 [성경은 드라마다](The Drama of Scripture, * IVP에서 2009년 번역출간)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창조, 타락, 구속, 그리고 완성이라는 성경적 틀로부터 파생되는 몇 가지 기본적 주제들을 탐구해 볼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나는 또한 단지 전문적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교과과정 전반에 있어서의 경험적 학습 혹은 섬김을 통한 학습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육, 사업, 건강과학과 사회사업과 같은 적용분야들을 위해 봉사학습의 기회들을 제공하고, 음악, 미술, 연극, 그리고 물리적 교육과 같은 분야들 속에 실천적 교과과정들을 포함시킵니다. 경험적 학습은 학생의 학습에 다양한 차원을 추가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고 섬기는 자의 마음을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합니다.


학문적 사고를 직업선택, 인턴십 혹은 어떤 종류의 실제적 경험과 결합시킴을 통해 학생들은 세계관을 실천하고 개념을 실제상황에 적용하는 일의 복잡성을 실감하며 보다 성숙해지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성경적 세계관의 지혜를 볼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승리주의나 냉소주의에서 벗어나 이론으로부터 실천으로의 적용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경적 세계관의 개략적 모습


이제 학문을 위한 성경적 세계관의 개략적 모습과 그 의미를 창조, 타락, 구속, 그리고 완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살펴보도록 합시다.



창조


모든 실재의 기초가 창조라는 사실은 기독교대학교육을 위한 근본적인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으며, 따라서 이 세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성경의 가르침 속에 질서의 기원, 결합의 실체성, 인간의 내재적 가치와 도덕적 힘,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의 본질적 선함이라는 생각이 그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모든 학문적 작업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실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구조가 형성되고 질서가 잡힌 어떤 것이지 혼돈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사물들이 그것을 통해 달려가고 있는 정해진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타락에도 불구하고, 또 그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보존시키고 있습니다. 창조된 질서라는 개념은 물리적 질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타당성, 그리고 자연적 활동과 인간적 활동의 법적 혹은 규범적 성격의 타당성을 유지시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측면들을 위해 그의 창조 속에 집어넣어 두신 질서, 규칙, 양식, 그리고 규범들을 발견해 내려고 애쓰도록 학문작업의 방향을 잡아 줍니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창조의 의지할 처소를 제공해 줍니다.


또한 지식에 대한 백과사전적이고 학제간적 견해도 창조라는 개념에서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복잡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각각의 것들은 자기 자신의 독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또한 통일성과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품의 풍요로움은 단 하나의 학문분야의 관점만으로는 도저히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학생들에게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학점을 취득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창조의 동산 전체에 대해 느낌을 갖도록 만들어 주고, 다양한 학문분야 간의 연관관계를 파악하도록 만들어 주며, 하나님께서 피조물 속에 부여하신 질서의 조화로운 모습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접근방식은 또한 그들이 구체적으로 문제에 봉착했을 경우 자신의 위치와 주변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부여합니다. 이것은 또한 교과과정 속에 학제간 과목들을 포함시키는 훌륭한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과목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문제들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하도록 하며, 그들이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문제를 만났을 때 통합적 사고로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창조라는 개념은 또한 책임 있는 대리자로서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인간은 그가 어떤 특정한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크게 존중되고 가치 있는 존재로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이자 부집정관(vice-regent)의 지위를 지닌 인간들은 소위 말하는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에 따라 창조세계를 발전시킬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창조된 질서를 배경으로 해서 볼 때, 이 과업은 도덕적 대리인으로서의 감각, 원칙과 지침을 갖춘 도덕적 틀에 대한 감각을 제공해 줍니다. 그와 같은 것들은 학문적 작업을 통해 드러나야만 합니다. 우리의 학문적 여로에 빛을 비추기 위해 우리는 자연이라는 책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모두를 연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은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후 선하다고 선포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현재는 죄로 인해 그 모습이 흉하게 변했지만 말입니다. 이것을 잘 요약해 주고 있는 것이 구조와 방향의 근본적 차이라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악한 창조의 측면 혹은 기독교인들이 회피해야 하는 창조의 측면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술적 활동은 죄에 의해 왜곡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 자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선물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규범과 명령에 따라 예술이 추구된다면 그 선물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오로지 인간의 뜻과 동의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사회적 기구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심지어 국가의 정치적 기관들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종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가 만드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관계를 배경으로 해서 볼 때, 우리의 학문적 연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구조 및 목적과 연관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자신이 창조된 목적을 완수함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타락


죄로 인한 우리의 타락은 그리스도를 통하는 방법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가능성을 모두 차단해 버린 근본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섭리에 따라 창조질서가 보존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타락의 실재와 연관된 것들로는 대조적 개념들, 지식의 종교적 기반, 분별과 분석의 필요, 그리고 역사적 위치파악의 중요성 등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 속에 악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사탄의 불법적 지배 사이의 갈등이 생겼으며 그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이 영적 싸움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문화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조와 방향의 분명한 차이를 염두에 두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에 따르자면 죄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갉아먹는 기생충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쁜 예술이나 깨어진 가정과 같은 파괴되고 왜곡된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술이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이라거나 가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어떤 합법적인 창조구조 혹은 창조영역이 올바르게 발전, 사용, 혹은 조직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올바로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되돌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구조와 방향의 중요한 차이에 대해서는 앨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 박사가 그의 책 [창조, 타락, 구속](Creation Regained)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접근방식은 또한 타락이라는 배경 속에서 모든 지식과 학문의 종교적 기초의 실체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학문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활동영역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문 역시 하나님을 섬기거나 혹은 우상을 섬기기 위해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믿음이 모든 과학적 작업의 근본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우리는 근대주의자들과 맞설 수 있는 준거점(reference point)을 갖게 됩니다. 학생들은 기독교 학문이 신앙 혹은 가치를 학문적 영역 속으로 수입해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종교적 헌신과 인간 지식의 불가결성이라는 실재를 창조된 인간 활동으로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학문과 전문적 방법론에는 종교적 기초를 가진 가정들 혹은 신앙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죄악 속으로의 타락 때문에, 이 기본적 가정들 및 여러 관련된 이론들과 개념들은 사람들이 그것을 우리 아버지(Father)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진리 혹은 왜곡, 치료 혹은 파괴적 영향력으로 작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학문작업에 있어서 분별력과 비판적 사고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합니다.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주어진 이론가의 저변에 깔려 있는 세계관과 가정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관과 가정들은 이론과 개념의 형성에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비판적 사고가 중요한 이유는 어떤 사람의 이론에 있어서 창조의 어떤 측면에 대한 과장된 혹은 우상 숭배적 충성은 환원주의와 연관된 왜곡이나 과대확장이 분석적 작업 속으로 기어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불신자의 작업이라고 해서 그것을 쉽게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적 질서는 또한 그들도 붙들고 있으며, 그분의 은혜로운 공급은 그들 역시 타당한 통찰에 다다를 수 있도록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모든 학문에는 인간의 죄가 존재하기 때문에, 기독교인 이론가들이 올바른 방향성과 종교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쁜 이론을 만들거나 구조적 왜곡을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학문적 작업에 있어서 밀과 겨를 분리해 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종교적 방향 혹은 출발점에 바탕을 둔 모호한 비판을 통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학생들은 주의 깊은 분석과 비판적 사고를 위해 고된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학문의 부지런한 내적 재구성 혹은 개혁이 그것의 배경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즉 다시 말해서 창조된 실재와 잘 일치하고 조리 있는 설명이 가능한,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한 이론들과 개념들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궁극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반을 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실한 설명을 제공하는 견실하고 독특한 기독교적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 계속적인 공동체적 과제입니다.


마지막으로 빛의 왕국과 어둠의 왕국 사이의 드라마로서의 역사의 전개는 단지 구속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문화의 전개에 있어서도 학생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문화적, 종교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시대정신”(Zeitgeist), 즉 이 시대의 정신이 무엇인지, 또 그것의 역사적 뿌리는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 활동의 종교적 기초를 통찰하고, 그것이 다양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21세기가 시작되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심지어 기독교로부터 파생되었다고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는 시대와 문화 속에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학생들은 서양의 동향이 기독교적 기초로부터 멀어져서 기독교이후(post-Christian)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권세와 영적 세력들에 대한 것입니다.



구속


성경적 세계관의 중심적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우주, 피조물 전체를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 여기서부터 세 개의 중요한 주제들이 도출되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구원을 오직 개인적 영혼구원으로 보는 좁은 견해를 부수고 삶과 학문을 위한 복음의 완전한 의미를 분명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세 가지는, 구원의 전 포괄적(full-orbed) 성격, 구속의 우주적 범위, 그리고 선포와 섬김이라는 과업의 공동체적 본질입니다.


구원의 전 포괄적 성격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이 단지 개인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속하는 것만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요한복음 3:16의 나머지 부분이 개인적 구원을 강조한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뜻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영혼, 하늘나라보다는 더 큰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벗어난 그런 개인주의는 복음주의적 사고의 함정들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는 학생들 중 많은 이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원자이시자 동시에 주님(Lord)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구원자로서 그는 죄의 능력을 부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를 죄수로 잡아 둘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과 치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님으로서 그는 또한 삶의 모든 차원에 있어서 우리를 새로운 순종으로 부르십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의 우주적 차원이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됩니다. 성경적 세계관의 이 중심적 가르침은 종종 카이퍼(Kuyper)의 유명한 경구를 통해 설명됩니다. “창조된 것들 중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은 단 일 평방인치도 없다.” 학생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단지 영혼이나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것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생명과 문화의 주님이시오 하늘과 땅의 통치자라는 이 주장은 기독교인에 의해 수행되는 모든 학문과 문화적 노력에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창조와 창조질서에 대한 가르침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인식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한 계획은 훨씬 더 크고 풍부한 것이 됩니다. 구원은 그 창조의 회복으로 이해됩니다. 거기에는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 인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깨어진 관계의 회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카이퍼와 함께 우리들은 학생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문화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고 계시며 그것이 창조된 목적에 맞게,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사용될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 하나님 나라의 일과 세속적 직업 사이의 이원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 삶과 문화의 모든 부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찬송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대학에서의 일과 학문 역시 그리스도께서 불신의 이데올로기와 각종 사상들의 사슬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기독교적 소명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학문분야에 있어서 순화와 개선에 힘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속에 문화가 포함된다는 구원에 대한 이해는 또한 복음의 적용범위를 개인, 가족, 교회생활, 혹은 사회와 문화의 주류의 변두리에 놓인 개인적 기구들로 제한시키는 모든 개인중심주의(privatism)를 깨뜨립니다. 그 대신에 우리 학생들은 성경이 복음의 사회적 및 구조적 연관성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레슬리 뉴비긴(Leslie Newbigin)이 강조한 바와 같이 복음(Gospel)은 공적 복음(public gospel)입니다. 우리는 공적으로 증언을 해야 합니다. 즉 복음의 빛을 등잔대 위에 두고 사람들을 복음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문화의 모든 분야들을 향하여 증언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예술, 미디어, 사업, 그리고 정부를 포함하여 모든 문화적, 사회적 활동의 영역들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삶을 에워싼 모든 구조들과 활동들 속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외쳐야 합니다. 그 순종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그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사회적, 문화적 증인으로서 그들의 증언은 개인적일 수도 있고 제도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개인으로서 증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증언은 다양한 분야 속에서 성경적 원리들과 기독교적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조직된 기구들 속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힘을 합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업, 정치, 교육, 혹은 노동 기구들을 총망라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그런 보물을 질그릇에 넣어 전달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입니다.



완성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기에 그의 신실한 동역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증언할 때에, 우리는 성경적 세계관의 최종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것은 즉 그리스도의 나라의 도래와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펼쳐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는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 사이의 싸움의 결과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다 하더라도, 학생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빛을 반사하는 공동체가 되라는 사명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위한 그의 구원의 메시지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순종의 사역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복음주의적이면서 또한 문화적 사역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변형(transformation)이라기보다는 겸손한 순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증언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것은 문화를 넘어서는 전 세계적 기독교 공동체의 증언입니다.


절정의 순간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역을 특징 지워 주는 가장 훌륭한 단어는 증언(witness)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행 1:8). 이 명령 속에서는 대위임령과 문화적 명령 사이의 차별, 즉 개인적 구원을 위한 증언과 문화적 회복을 위한 증언 사이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것은 학생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구원) 그들을 가르침을 통해(모든 차원에 있어서의 순종적인 삶) 제자를 삼으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구원은 섬김의 삶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 큰 사회적, 문화적 순종을 추구하는 섬김의 삶은 다시 그것의 뿌리인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을 지적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복음전도는 문화적 순종을 함축하고 있고, 문화적 순종은 복음전도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 과업의 핵심으로서의 증언이라는 개념은 양자 모두를 포괄합니다. 또한 증언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화를 변형시켜야 한다는 견해보다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권과 섭리의 인정이라는 개념에 대해 더 큰 무게를 실어 줍니다. 상이한 기독교 전통들 속에서의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관계에 관한 라인홀드 니버(Rheinhold Niebuhr)의 유명한 범주들로부터 이끌어 낸 이 변형(transformation)이라는 개념은 승리주의 혹은 눈에 거슬리는 낙관주의적 자세로 이끌 수 있는 왜곡에 대해서도 열려 있습니다. 성경에 보다 더 충실한 생각은, 카이퍼가 표현했듯이, 그리스도는 모든 문화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접근방식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그 권리를 증언하고 순종적인 자세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학생들에게 분명한 것은 그런 증언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서 회복으로 이어지게 되건 혹은 반대를 받아 박해로 이어지게 되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 즉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접근방식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희생적 순종에 대해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것은 환경에 상관없는 신실한 증언과 순종에의 부르심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겸손하고 건설적인 형태의 문화적 참여를 시사합니다.


이런 자세는 신칼빈주의(neo-Calvinism)의 부흥이 시작될 수 있도록 도운 19세기 네덜란드 사상가인 흐룬 판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의 글 속에 적절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주변문화와 기독교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분별없는 모습으로 단지 전통을 수호하려고만 하는 보수주의가 되어서도 안 되고,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추상적 개념들을 강요하려고 하는 혁명적인(revolutionary)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르자면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역사적 사회적 행동을 취해야 하는데, 그것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일을 하지만 성경적 순종의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원칙 있는 자세로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접근방식은 학생들을 분별력 있게 만들어 방향이 잘못된 것 혹은 구조가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 그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주어진 상황 속에서 보다 규범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성경적인 지혜를 얻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적 안녕과 환경보호를 위해 공공정책에 순응하는 일 등의 복잡성을 인식하도록 해 주고, 심지어 기독교적 분석마저도 눈이 멀도록 만들어 버리는 인간 내부의 갈등을 인식하게 해줌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준거점, 방위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있으나 모든 사회적 질병과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것은 또한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설득력 있는 논리를 개발하여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시킵니다. 하지만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자유가 허용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적 견해를 정부의 다수결 통치를 통해 그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의 갱신을 위한 이런 종류의 조직적인 기독교적 증언은 학생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문화에의 참여에 있어서 원칙을 지닌 그런 다원주의적 접근방식은 보다 개인주의적인 경건주의나 복음주의 진영이 취하고 있는 세속문화로부터의 철수라는 태도와 대조를 이루고, 보다 자유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이 취하고 있는 세속문화에의 적응이라는 태도와도 대조를 이루며, 기독교적 가치를 강요 혹은 재도입하려는 호전적인 근본주의 진영이 취하고 있는 세속문화에 대한 십자군적 태도와도 대조를 이룹니다. 고립, 적응, 혹은 강요와는 달리, 원칙을 지닌 그런 다원주의는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적 성향이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문화에의 건설적인 참여를 허용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학생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문화적(trans-cultural) 비전을 갖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이 전 세계적인 실체임을 볼 수 있도록 돕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어떻게 다른 세계 종교들과 연관시켜야 할지를 알게 해 줍니다. 범세계적 실재들이 강조되는 시대에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범세계적 범주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실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지역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늘 아래 모든 족속, 언어, 그리고 나라들로 구성된 백성을 세워 가고 계십니다. 이것은 그것이 한국 교회이든 북미지역의 교회이든, 한 국가 혹은 문화에 바탕을 둔 교회는 그 어떤 것이든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위치만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 줍니다. 이것은 학생들이 전 세계에 걸친 기독교의 움직임을 인식하게 해 줍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다른 문화에 속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공부하고 교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국제적 교류는 심지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규범들까지도 그곳의 현실에 따라 상황화 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도록 해 줍니다. 그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무엇이 보편적이고 창조에 기초한 것이며 무엇이 상대적이고 변형이 가능한 순종의 패턴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것을 통해 학생들은 더 큰 겸손과 관용을 배우게 됩니다. 비개발국 기독교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학생들은 우리가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보다 더 친환경적인 삶의 방식을 개발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통신의 범위와 다른 문화에 대한 노출이 훨씬 더 큰 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한국 문화 이외의 문화들과 기독교 이외의 세계관들에 대해 알도록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알고 있어야 그들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내용이 충실한 증언을 할 수 있고 그들과 관련된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비공식적 혹은 공통 교과과정(informal or co-curriculum)의 핵심적 공헌


학문에 대한 이런 성경적 관점은 우리의 학문작업에 포함된 근본적 문제들과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개발할 수 있는 시작점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관이라는 것이 단지 학문작업과 연관된 지적 도구인 것도 아니고, 오직 지적 동의와 지식에 기초한 것도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가 최근 저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며](Desiring the Kingdom)에서 잘 보여주듯이 성경적 세계관은 배움뿐만 아니라 삶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은 이해의 문제일 뿐 아니라 개인적 신념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 세계관이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영적인 뿌리가 있어야 함과 동시에 또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삶을 통해 본보기로 제시되어야 하고 살아 있는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도출되어야 합니다.


공식적인 학문적 교과과정이 학생의 신앙과 인격적 개발을 돕는 비공식적 교과과정에 의해 보충되고 완성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기독교대학교육의 전체 범위에 걸쳐 표현되고 지원되어야 합니다. 즉 그것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포함하는 전 포괄적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인격적 영적 발전이 공식적 교과과정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교수가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멘토링은 교과목에 대한 학생의 견해뿐만 아니라 인생과 직업에 대한 그들의 견해까지도 형성할 수 있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생들과의 인격적 교류는 성경적 관점과 연관된 학문적 문제들에 대해 대화를 나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앙과 그 경험을 함께 나누고, 그 신앙이 학문뿐만 아니라 삶의 상황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교수들은 학생들을 위한 학문적, 인격적 롤모델이 됩니다.


공식적 교과과정이 그런 발전을 위한 많은 기회들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도적인 학생개발 프로그램과 기숙사활동, 문화 활동, 그리고 체육활동 등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학생들이 전인적으로 - 즉 지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 발전하는 데 기여합니다. 이 모든 차원들은 완전한 순종의 삶과 증언을 위해 필요하고 풍성한 성경적 세계관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합니다. 여기에는 사회적 활동뿐만 아니라 클럽, 연구모임, 토론모임 등의 학생개발 프로그램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실제적인 삶의 문제들을 놓고 씨름하고 인격적,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공동체에서의 자원봉사와 선교활동 역시 풍성한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그것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대학캠퍼스의 직원들이 학생들의 삶의 발전에 끼치는 영향력도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식적 교과과정에서 교수가 중요하듯이 비공식적 교과과정에서는 학생들의 삶을 돌보는 직원들이 중요합니다. 설문조사 등을 통해 재차 확인된 바에 따르자면, 주님께서는 학생의 삶에 있어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영향력을 위해 종종 환경미화원, 관리직원, 사무실직원 혹은 식당종사자의 증언을 사용하십니다. 이 사람들 역시 성경적 롤모델이 된다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학생의 발전을 돕기 위해 무슨 수단을 사용하든, 그것이 공식적인 것이든 비공식적인 것이든, 그 기저에서 성경적 세계관이 최상의 의미와 연관성을 갖게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력 있는 영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 신앙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하고 성숙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자와 반드시 짝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영적 생명력과 살아 있는 믿음은 성경적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성경적 지혜를 미래 직업의 도전들에 적용시키기 위한 지속적인 확신과 헌신의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형성은 성경적 세계관의 지적인 교육 및 특정 분야의 전문지식의 개발과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기독교적 교양교육과 전공교육이 그 사명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영적 형성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을 가진 학생들,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겸손하게 성령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학생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지자적, 중보자적 리더들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대학교육은 첫째로 마음(heart)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가르칠 수 있기 전에 먼저 사랑해야만 합니다.


이런 발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교수들에게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돕는 직원들에게도 그런 믿음이 확실히 있어야 합니다. 롤모델이 된다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올바른 영적 기풍을 지닌 기독교대학은 또한 예배를 드리고, 성경적 경건을 도모하고, 삶에 모든 분야에서 그분을 섬기라는 그리스도의 도전을 기리기 위해 함께 모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채플 프로그램과 함께 학생들의 기독교신앙을 독려할 수 있는 다른 방안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것은 성경연구반, 기도회나 경건회 등을 말하는데, 조직이 잘 짜여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학생들은 그런 활동들을 통해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들의 의존성을 알게 됩니다.


기도는 학생들이 학문작업 속에서 이 시대의 영들과 마주쳤을 때 사용해야 할 아주 강력한 무기입니다. 기숙사 생활은 기도훈련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기거하고 공부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또 소그룹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고 경건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를 둔 생명력 있고 창조적인 지성과 상상력에 강력한 개인적 신앙이 더해질 때, 학생들은 주님을 의지하는 종의 마음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기독교인 지도자가 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결론: 선지자와 중보자로서의 리더들을 준비시키기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 즉 이 시대의 영들과 싸우고 삶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언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이 시대를 살아갈 때, 우리는 학생들을 선지자적, 중보자적 지도자들로 만드는 기독교대학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지도자는 잘 훈련되고 성경적 신앙과 세계관으로 무장된, 우리 사회와 문화와 그리스도의 범세계적 왕국을 위한 지도자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그들로 하여금 잘못된 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통찰력을 갖도록 도울 것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용기를 그들에게 줄 것이며, 자신을 희생하는 겸손한 순종과 지혜를 얻게 해 줄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그들은 버려진 자들과 곤궁한 자들을 섬기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좀 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교육자들은 서양적 정신과 동양적 상황 사이에서, 그리고 서양 선진국과 다른 개발도상국들 사이에서 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들은 아마도 한국 출신의 지도자들에게 보다 더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전공분야에서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있건 상관없이,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수준 높고 잘 구비된 기독교대학교육을 제공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공식적, 비공식적 교과과정을 통하여 성경적 신앙과 세계관을 학생들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도전적인 사회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한 선지자적, 중보자적 증인들이 될 다음 세대의 서번트(servant) 리더들을 양육하는 이 중요한 사역을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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