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근본적 변화를 거절하는 사람들

(종려주일)

마태 21:1-17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오늘은 종려주일’(Palm Sunday)거룩한 주간’(Holy Week)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거룩한 주간이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한 주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종려주일’(Palm Sunday)로 기념하는 이유는 (1) 예수께서 마을로 들어오시는 날이며, 그 마을이 단순히 2천 년 전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기념하는 것 이상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우리의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교단들 안으로 들어오시는 날이라는 뜻이며 (2) 그분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오셔서 행하셨던 파격적이고 충격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를 기억하며 그런 변화와 변혁을 수용하기 위해 얼마나 비싼 값을 지불해야하는지를 인식하는 날이란 뜻입니다.

 

***

 

한번쯤 바꿔 볼까?

 

광고나 선전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변화일겁니다. 예를 들어, 이 제품을 사용하면 당신의 삶이 확 바꿔진다는 광고나 선전입니다. ‘변화’(change)라는 상품처럼 잘 팔리는 광고 아이템은 없을 것입니다. 광고나 선전을 들여다보면 항상 이것은 다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광고업자는 누구를 대상으로 삼는가요? 광고주들이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은 광고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 예를 들어 광고 속에 들어있는 가치관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광고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아니면 삶이 너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혹은 삶의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광고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광고에 신경을 쓸 만큼 한가하거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광고는 대부분의 우리들과 같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어떤 사람들인가요? 현재의 삶에 대해 막연하게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사람들, 그래서 약간의 변화만” - 근본적 변화가 아닌! -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광고는 먹혀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바랍니다. 가구를 새롭게 사들이거나, 자동차를 바꿔보거나, 넥타이 색깔을 바꿔보거나, 하던 일을 그만두고 좀 더 새로운 일을 해 보거나 하는 변화입니다. 선거 구호가운데 가장 직설적인 구호는 바꿔!”입니다. 영어권에서도 선거 전략의 키워드는 “change"입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지겨워하고 지루해하는 현대인들에게 변화는 새로운 바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싫어하는 변화는 바라지 않는변화, “원치 않는변화일 겁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약간의 분위기 변화를 바라는 사람이나 원치 않는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근본적인 변화, 획기적인 변혁, 혁명적인 변화, 전복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변화는 우리의 삶들을 약간 수정하고 재배치하고 재조정하는 정도의 변화일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한 직장을 다니다가 이름만 다른, 결국 같은 종류의 회사로 직장을 바꾸는 일이나, 오랫동안 한 집에 살다가 지루해서 다른 집을 사는 경우나, 한 사람과 데이트하다가 사람을 바꿔 다른 사람과 데이트 하는 경우입니다. 사실 얼마동안은 좀 다른 것 같겠지만 거울에 나타나는 사람은 언제나 동일한 사람입니다.

 

변화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태도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최근에 기독교계와 신학계에 영성’(靈性, spirituality)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영성역시 크리스천들이 한번 정도 시도해볼만한 괜찮은 신앙 프로그램 정도로 생각합니다. 너도 나도 영성에 대해 말하고 영성 세미나에 참석하고 어느 정도의 영적 유익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의 대부분은 우리의 삶을 재조정하거나 신앙적 방향을 약간 변경하거나 신앙적 무드를 부드럽게 잡아주는데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사실은 예수님은 그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신앙적 편의를 위해 도움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신앙적 무드를 부드럽고 기분 좋게 바꾸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시 안으로 들어오실 때는 우리의 삶과 신앙의 패턴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변혁시키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단순히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종교적 기관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자기만족과 성취감을 얻고 사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책상과 걸상을 뒤집어엎으시는 분으로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온전한 새로움, 전적 변혁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옛것은 지나갔으며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죄책이나 강박감이니 과거의 상처들이나 미래에 대한 잘못된 환상들에 의해 조작되거나 통제되지 않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다 과거일 뿐 여러분의 삶과 인생은 새로운 미래를 위해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고,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분은 그런 전복적 변화, 근본적 변화를 예루살렘의 기득권층들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누가 변화를 싫어하는가?

 

마태복음에서 흥미로운 사건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근본적 변혁과 급진적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모두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즈음에 성전은 엄청난 종교적 기관이 되어있었습니다. 그 기관 안에는 다양한 이해와 이익을 대변하는 여러 종교적 기득권 세력들이 한 지붕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니 한장총(한국 장로교총연합회)이니 NCCK(한국기독교연합회)와 같은 기관들입니다. 그런 성전 기구 아래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순결성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순결성이 다칠까봐 극도로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성전이 구조적으로 잘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성전이 구조적으로 잘 나누어졌다는 말은, 당시 성전 건물 안에는 이방인들을 위한 뜰, 여성들만은 위한 전용공간, 유대인 남성만을 위한 공간, 제사장들이 있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속한 방이 아닌 다른 방이나 공간에 들어가면 오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방이나 공간에 자유롭게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순혈주의의 신봉자들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는 생각을 갖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상 자기들이 신학적 정통주의자이며 누구보다 올바르고 곧게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라고 자처하였습니다. 그들의 엄격주의와 성서문자주의는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사두개파] 예루살렘 종교기관 안에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또 다른 단체가 있었습니다.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들은 신학적으로 상당히 진보적이었습니다. 동시에 관료적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인들 아래서 특권을 누리는 부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이 광적인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두 파벌은 적어도 자기들만의 기득권을 누리면서 상생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 모두는 현재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랐습니다. 급격한 변화를 싫어했으며 변혁을 촉구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함께 저항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에게 물어보셨다면 아마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들은 다양한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 가운데는 사두개인들도 있고 바리새인들도 있습니다. 물론 항상 의견의 일치를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양성을 믿습니다. 서로 달라도 함께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오래전에 이미 이 두 종교적 당파는 늘 같은 내용의 의견들로 서로 대립하여 왔지만 최소한 서로가 서로의 기득권을 인정하면서 한 지붕 두 가족 체제로 살아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사소한 신학적 논쟁들은 사회의 진짜 문제들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나라가 지금 로마의 점령군에 의해 압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들 사이의 사소한 신학적 문제로 논쟁할 뿐이었다는 말입니다. 현실은 그들의 백성들이 로마의 점령군에 의해 학대와 착취를 당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고, 그들의 백성들은 배고프고 병 들었고 가난하여 헐벗었지만 그들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신학적 논쟁들만 일삼으면서 실제로 그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변혁과 변화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변혁과 변화가 오면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거나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찮은 일에서 근본적인 일로

 

옛 예언자들에 따르면 하나님 가장 분노하시고 열 받으실 때가 있었습니다.

     · 우리의 신학과 예배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신성한 사명에서

       우리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게 할 때입니다.

     ·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전하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의

       ()를 선포하는 사명을 잊게 하고 하찮고 사소한 종교적 일들에 빠지게

       할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가장 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우리의 사소한 신학적 신앙적 논쟁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히 걱정하시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가난한 자들만을 위한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는 집(교회)들이 그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찾아서라도 그들을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을 두시는 이유는 우리와 같은 종교적인 사람들의 삶 속에 획기적인 변화급진적인 변혁을 가져오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변혁은 우리 마음 안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공간이 있어야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묻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은 도시의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정책들에 대해서도 묻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 것들은 더 많은 소모적 논쟁들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너는 누가 가난한 자인지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누가 가난하고 헐벗고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인지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는 네가 일반적으로 성전과 교회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 위한 공간과 자리를 네 삶 속에, 너희 교회 안에 만들어 본 일이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감람산에서의 퍼레이드

 

어느 날 감람산 위에서였습니다. 퍼레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는 퍼레이드였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나귀를 타고 있었습니다. 종려나무가지를 들은 심히 많은 무리들이 겉옷들을 벗어 땅에 펼쳤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아들 만세!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 호산나’!”

 

이 무리들은 대부분 갈릴리, 여리고, 베다니 등지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아마 무리들 가운데는 장님이었던 바디메오, 세리였던 삭게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나사로 등도 있었을 겁니다. 또한 이 군중들 가운데는 한때 예수님께서 먹이셨던 굶주렸던 사람들, 치료해주었던 병자들, 죄의 용서를 받았던 죄인들도 있었을 겁니다. 마태에 따르면 이 무리들이 호산나!”(“우리의 구세주시여!”)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과 도시는 이 퍼레이드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자 온 성이 소동했다!”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

 

마태는 분명하게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과 예수의 행렬에 따르고 있는 무리들을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마태는 성안에 있는 사람들과 성 밖에 있었던 무리들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무리들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퍼레이드를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길 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무리들은 그들이 바라고 잡을 수 있는 구원이란 구원은 모두 찾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얻을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도시를 움직이고 경영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고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도시 안에 있었던 그 사람들, 매우 종교적이었던 그들, 모든 좋은 것을 갖고 있었던 기득권층의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릴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동하고 불안해 한 것입니다.

 

일단 현재의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을 하고 살고, 완전하게 만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현재의 좋은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사람들은 삶을 약간 재조정하는 차원에서의 변화만을 원합니다. 그들은 근본적인 변화, 대대적인 변혁을 바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 말이지, 현재의 일도 좋지만 좀 바꿔서 새로운 일 좀 해보려고 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가난한 사람들은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그들은 구원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심령의 가난, 마음의 궁핍에 직면했다고 합시다. “나는 더 이상 반복적으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아. 이젠 근심과 걱정으로 찌들어 잠자리에 들어가는 것도 지쳤어. 눈을 떠도 똑같은 근심과 걱정으로 하루를 살아야하니, 이젠 지쳤어.”라고 하는 분이 있다면, 바로 이때가 여러분이 기꺼이 구원자를 환영하고 기다리는 종려주일의 무리들 가운데 자리를 잡는 시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퍼레이드를 본지 어연 15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의 정복자인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을 무참히 짓밟고 예루살렘 성전 높은 제단위에 더럽고 혐오스런 돼지를 희생 제물로 드리고 그 피로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경멸과 모욕을 퍼부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수치였고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광복군 지도자였던 유다스 마카베우스(Judas Maccabees)가 에피파네스의 군대를 섬멸하고 개선장군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자 군중들은 그의 말 앞에 종려나무가지를 깔고 대대적인 환영을 했습니다. 시편으로 찬송하면서 그들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왜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소동하였을까? 그들은 종려 행렬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성전이 더럽혀졌었다는 사실과 구세주께서 성전을 뒤집어엎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호산나, 구세주가 오시고 있다. 호산나. 이제 바뀔 것이다. 변화가 있을 것이다. 변혁이 일어날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잘 아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하신 일은 성전을 똑바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즉 잘못된 관행, 삐딱한 일들, 옳지 못한 관습들, 더럽고 추잡한 일들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득권 세력들을 모두 내어 쫓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을 위한 특별한 정원과 뜰과 방들과 강단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누구를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고 마태가 말하고 있습니까? 어린 아이들과 절름발이 불구자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들, 즉 권력과 힘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배제되었던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근본적 변혁을 추구하는 교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어야 한다면,

     · 돌봄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세대(어린아이들)를 귀하게 여기는 은혜로운

       긍휼의 장소이어야 합니다.

     · 상하고 깨어진 마음을 고쳐주는 은혜로운 긍휼의 장소이어야 합니다.

     · 절망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자들에게 희망의 비전을 주는 은혜로운 긍휼의

       장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은혜로운 긍휼이 베풀어져야 할 장소는 우리 자신의 깜깜한 절망에서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구원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종려주일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볼 수 없도록 여러분을 막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합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막연하게나마 불만스런 인생()으로 충분하다고 말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여러분들도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 사소한 논쟁들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재조정하려는 계획이 진짜로 작동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요점은 진정으로 기독교인이 되려면 여러분이 병들거나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들이나 가난한자들이 구원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듯이, 우리도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나를 구출해내실 수 있습니다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삶을 스스로 통제하거나 조정하려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인생을 바꾸겠다고 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여러분은 호산나,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의 삶의 비용이 얼마나 들든, 우리가 지불해야할 인생의 비용이 얼마나 되든, 우리의 성전에 바쳐야할 비용이 무엇이든지간, , 주님 제발 부탁이니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라고 외치는 자들의 위대한 종려주일 퍼레이드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무리들과 함께 할 수 있기 전까지 여러분은 거룩한 주간을 제대로 시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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