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23]

“입 다물고 있어! 웬 말대꾸야?”

 

 

[본문: 로마서 9:14-23]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롬 9:20)

But who are you, O man, to talk back to God?” (Romans 9:20)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당신이시라면 저는 그저 당신의 처분만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이런 고백을 겸손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의 손으로 지음 받지 않은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분의 수공예품들이며 그분의 탁월한 작품들입니다. 그러므로 지음 받은 것들이 지은 자에게 뭐라고 말할 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토기장이십니다. 그가 흙으로 사람 모형을 빗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숨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흙덩어리가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인간이 우리네 사람됨에 털끝 하나라도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께 이러쿵저러쿵 하며 대꾸할 할 처지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신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즐기고 땀 흘려 일하는 인생살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생명 때문에 가능합니다. 인생이란 대여(貸與) 받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가 대여해 주셨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당신의 자유로우심 가운데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음 받아야할 마땅한 당위(當爲)나,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야할 필연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따라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과 삶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번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에 따라 우리가 그분의 피조물이 되고, 한 걸음 더나가 그분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자유롭게 결정을 하신다고 해서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은 변덕스럽게 일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우리들 가운데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세상도 이상하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분 내키는 대로 은하계의 별들과 태양계의 행성들을 돌리신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숨을 쉬고 살아 있는 것만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유와 주권을 함부로 사용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이 우리가 기댈 그분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주권을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시기 위해 결정하시고 집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시는 모든 일들은 공평할 뿐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결정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종종 그런 결정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우리 눈에는 좋지 못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시라고 믿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 가뭄과 풍년, 더위와 추위, 병과 건강, 심지어 잎사귀 하나라도 - 궁극적인 선(善, 좋음)을 만들어 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의 하나님’으로 알려지기를 기뻐하신 것으로 보아 사실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애씀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눈도장을 받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애를 써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면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잘나서, 자기기 잘해서, 자기가 똑똑하고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된 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입니다.”(17절)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혹은 “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월감이나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겸손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높입니다.”는 뜻도 됩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 즉 “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그 말 속에는 마치 자기가 특권을 갖고 있는 사람인양, 달리 말해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훈장이나 특별한 배지를 달고 있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 말고 야곱을 선택하였다는 것은 에서를 싫어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야곱이 선택받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는 표현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비도 내가 베풀고 긍휼도 내가 베푸는 것이야”라고 하신 말의 본뜻입니다. 결정권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은혜를 입은 자들이 그분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고백은 “정말 고맙습니다” “저를 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던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생각이 슬그머니 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저 옆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된 거야?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을까?” 한 걸음 더 나가 “이방인인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왜 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 그들은 다른 사람을 쳐다보며 은근히 비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일종의 자만심과 우월감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에게 그가 짊어질 영광스런 순교에 대해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예수께서 자기를 알아주시고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자 뛰는 듯이 기뻤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 은근히 비교의식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요한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그였습니다. “예수님, 그런데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비교의식에 발동이 걸린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나 잘해!”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수혜자가 되고 시간이 흐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집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까?” 궁금증이 많아집니다. 전에는 감사와 고마움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이제는 이것저것 조목조목 따지는 습관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습관이 조금씩 쌓이다보면 나중에는 스스럼없이 하나님께 대들기까지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은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왜 누군 사랑하시고, 누군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십니까?”

 

이 때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아들아, 너나 잘해!” “은혜입고 선택받음에 대한 고마움이 점점 시들해져 가는구나?” “입 닥치지 못해? 웬 말대꾸야!” 이에 대해 사도 바울도 말을 거듭니다. “사람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문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하나님께 말대꾸 할 수 있단 말인가?”(롬 9:20)라고.

 

그러자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네가 구원받고 선택받은 것은 전적으로 내 자유로운 주권 때문이야. 네가 보여주어야 할 반응은 감사와 고마운 마음이 아닌가?” 그러자 사도 바울 역시 차분한 어조로 한 말씀 보탭니다. “한 진흙덩어리는 꽃을 담는 병을, 또 다른 진흙덩이로는 콩 조리용 항아리를 만들 수 있는 권리가 토기장이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노여움을 보여줄 목적으로 한 모양의 도기를 특별히 고안하시고, 당신의 영광스런 선을 보여줄 목적으로 또 다른 모양의 도기를 정교히 제작하셨다는 것에, 대체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자나 후자나 또는 두 경우 모두에 유대민족이 해당될 때가 있었고, 이는 다른 민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바울께서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여보세요! 엿장수가 가위질을 몇 번하는 줄 아십니까?” “엿장수 마음대로지요!”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깊은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최종적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살면 무슨 일을 만나도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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