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때

이사야 11:1-9

 

그 위에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2,5)

 

불공평하고 억울한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악한 일들이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되어버릴 정도로 일상화가 되어버린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다보면 이런 세상 말고, 좀 더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은 없을까?”라는 생각이 문뜩 듭니다. 권력이 있으면 어깨에 힘을 주고, 좀 배웠다고 하면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기고, 돈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을 동정의 대상으로는 생각하지만 동료 인간으로는 생각지 않고, 힘이 있으면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크면 작은 것을 쉽게 잡아먹는 세상입니다. 이런 일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뿐 아니라 직장과 사회와 국가 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개할수록 정의”(Justice)에 대한 인식이 확연하게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 3장 이후로 우리 모든 사람은 타락한 세상 안에 살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추락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롭고 은혜로운 세상에서부터 추락하여 엉망진창이 된 세상을 신학에선 타락한 세상”(fallen world)이라고 부릅니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일그러지고 굴절되고 상처입고 왜곡된 세상입니다(broken world). 사람의 생각과 이성, 감정과 정서, 가치관과 세계관 등 모두가 다 비정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 역시 무질서, 혼란, 혼돈과 무법 등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안에서 힘이 없는 자들, 못 가진 자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희생자 명단의 맨 앞줄에 들어 있습니다. 구약에선 이런 사람들을 고아, 과부, 이방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취약적인 사람들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불의하고 모순투성이의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일까요? “정의”(正義)입니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꿈입니다. 억울한 일이 없는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입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 세상입니다. 학대와 착취와 압제가 없는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입니다. 정의가 사회의 기둥이 되고 공의가 가정의 기초가 되는 세상입니다. 빈부귀천의 장벽이 무너지고, 노사(勞使) 간의 갈등이 사라지고, 더 이상 갑과 을이 비대칭 불균형 상태로 이어지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이야말로 낙원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는 이와 같은 잃어버린 낙원(실낙원)을 다시 회복하고자 수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유토피아(Utopia)라 부르는 이상향(理想鄕)을 꿈꾸었습니다. 인류의 정신적 지도자들로부터 이단과 사교집단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해, 유토피아를 찾기 위해 온갖 계획을 다 세워봅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실패할 것입니다. 미국의 작가 토마스 월프의 유명한 문구처럼 여러분은 결코 집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you cannot go home again!)

 

도연명이 꿈꾸던 유토피아

 

중국 동진(東晉, 주후 4세기 후반기)때 대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등장하는 이상향 무릉도원 이야기입니다. 도화원기는 도연명이 중국 후난성 북서부에 상덕이란 도시의 도화원현을 모티브로 쓴 작품이라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진나라 시대에 무릉사람으로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물길을 따라 갔다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도 모를 무렵, 홀연히 복숭아꽃 숲(도화림, 桃花林)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양쪽 강을 끼고 복숭아나무가 가득했으며 나무 밑으로는 향기로운 풀들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자랐으며 복숭아 꽃잎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부는 이상하게 여기고 계속 앞으로 나가 그 복숭아 숲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했습니다, 숲은 강 상류에서 끝이 나고 그 곳에 산이 나타났는데, 멀리서 보니 산에는 작은 동굴 하나가 어슴푸레 보였습니다. 어부는 즉시 배에서 내려 동굴 속으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동굴 입구는 매우 좁아 간신히 사람이 통과할 수 있었지만 수십 보를 더 나가자 갑자기 탁 트이고 넓어졌습니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 것입니다. 들판은 평평하고 넓었고, 집들은 질서정연하게 늘어섰으며 기름진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사방으로 길이 트였고 닭과 개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의 옷차림은 다른 고장 사람들과 별 다를 바가 없었지만 노인이나 어린아이 다들 즐거운 듯 안락하게 보였습니다.

 

어부를 보자 크게 놀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부가 자세히 대답하자 그들은 그를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와서 그에게 이런 저런 일을 물었습니다. 어부를 영접했던 집 주인이 말했습니다. “우리 선조가 진나라 때 난을 피해 처자와 마을 사람을 이끌고 이 절경으로 와서 다시는 나가지 않았으므로 결국 바깥세상 사람들과 단절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부는 지금은 어느 때냐?”고 물었습니다. 묻는 것을 보니 그는 한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은 물론 그 뒤로 위나라 진나라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어부가 지난 역사를 하나하나 자세히 알려주자 모두들 놀라며 감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잘 대접하였습니다. 어부는 그곳에서 며칠을 보내고 작별하였습니다. 그 때 마을 사람은 그에게 바깥사람들에는 말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어부는 마을을 벗어나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군데 표식을 했습니다. 이곳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생각에서 그랬습니다. 읍에 이르자 태수를 찾아 그대로 보고 하였습니다. 태수는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어부가 표식한 곳을 찾아가게 하였으나 결국 길을 잃고 무릉도원으로 통하는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낙원”(paradise)에 대한 그리움을 도연명은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낙원은 결코 다시 찾을 수 없다는 불행한 그리움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무릉도원으로 통하는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상향에 대해 어떤 그림을 그려주고 있나요?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낚싯대를 들이고, 사시사철 풍성한 과일을 먹을 수 있고, 무아지경의 절경을 구경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삶을 누리는 곳이 이상향일까요? 도연명의 무릉 도화원처럼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사야가 꿈꾸던 세상

 

하나님이 꿈꾸시고 그의 예언자들이 소망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왜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이 그리고 있는 낙원적 샬롬의 나라를 보여주시는 것일까요?(6-9절을 반복해서 읽어보십시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얼마나 환상적인 내용입니까? 꿈에도 그리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런 예언자의 환상은 우리가 장차 가게 될 하늘나라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예언자들이 꿈꾸고 그려내고 있는 에덴(낙원)적 세상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불의한 세상에 대한 대안(代案)의 세계로 주어진 것입니다. 달리 말해, 에덴(낙원)적 세상을 꿈꿀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이 도래하도록 우리에게 사명을 재충전시키고 임무를 맡겨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천들은 혼자 구원받고 하늘나라에서 달콤한 파이를 먹겠다는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 구원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먼저 우리는 그런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양육강식의 통화(通貨)가 유통되는 세상입니다. 정글의 법칙, 적자생존의 원리, 무엇이든지 크고 강해야 하고 힘이 있어야 성공하는 세상입니다. 반면에 약자, 병자, 장애자, 어린이는 언제나 취약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불행한 세상입니다. 맹수는 언제나 무력한 먹잇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정의가 실종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공의와 공평은 더 이상 중요한 덕목도 가치도 아닙니다. 오로지 성공만을 최상의 가치로 여깁니다. 그리고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교회나 사회나 국가나 철저히 잔혹한 사각의 링 안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눌러야 내가 올라갈 수 있고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고 믿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곳에는 공평이니 정의니 평등이니 공의니 하는 단어들은 고대 유물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오셔야

 

예언자가 꿈꾸는 세상은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성령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2). 세상 나라의 권력자들과 왕들은 전쟁의 말을 타고 군사력을 강화하고 음모와 술수로 나라를 통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 왕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십니다. 그는 지혜롭고 이해력이 있고 분별력이 있으며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왕입니다. 그 나라의 기초는 공평과 정의와 공의입니다. 그는 성실과 진실로 백성을 인도합니다(3-5). 정의와 공의가 수립될 때, 비로소 평강과 샬롬은 도래하게 됩니다. 진정한 평화를 원합니까? 가정, 학교, 사회, 국가에 샬롬이 있기를 바랍니까?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들은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곳에는 안정과 평화와 번영과 풍성함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의가 도래하는 세상을 꿈 꿀뿐 아니라 그런 나라의 도래를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하고 공부하고 일해야 할 것입니다. 샬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gift)인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책무(task)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평화로 들어가는 유일한 대문입니다.

 

| 기도 |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고 포옹할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시드니의 Harbour Bridge를 Opera House쪽에서 찍음]

하버브릿지1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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