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02 15:25
[2] 이사야 1:18-31
제목: 신실한 도시와 창녀의 도시
묵상 포인트: 공평과 정의로 가득한 삶을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살라는 부탁과 소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말에 “이름값도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어디를 가든지 대한민국 사람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어디서든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어떻습니까? 그 이름 안에는 ‘평화’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평화의 도시로 의도되고 디자인되었다는 것입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샬롬’입니다.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소극적인 평화의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샬롬은 모든 것이 가득하고 넉넉하고 번성하고 건강하고 모든 것이 올바르고 질서가 있는 적극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왜 이런 평화가 가능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안에 보좌를 정하시고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정의롭고 공평해야 진정한 평화가 도래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통치 수단인 정의와 공평이 살아 숨 쉬는 마을이며 도시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에 충실하게 존재할 때 예루살렘은 이름에 걸맞은 도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가정과 사회와 교회와 국가와 세계는 정의로워야 하고 공평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착취나 학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억울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란 어떤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사회에서 억울한 일들을 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약자들이었습니다. 돈이 없거나, 연줄이 없거나, 학벌이 없거나, 문벌이 좋지 않거나, 신분이 낮거나 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의 대표로 아버지가 없는 고아와 남편이 없는 과부와 외국인 노동자들을 뽑습니다. 그들은 언제라도 착취와 학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모두 법적 보호의 대상에서 취약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보호해야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권력을 쥔 고관들이거나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이 아닙니까? 문제는 권력자들과 판검사들이 뇌물을 밝히고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정의로워야할 예루살렘에 탐관오리(貪官汚吏)들로 득실거렸다는 것입니다.(23절) 그들은 살인자였고 도둑놈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가정들과 학교들과 교회들과 나라들이 정의롭기를 바라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정의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을 창녀에 비견합니다.(21절) 스스로를 더럽힌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의는 거룩성을 요청합니다. 정의로워야 거룩해집니다. 깨끗하고 성결하고 거룩한 삶이 되려면 정의는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정의로운 나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24-26절)
| 기도 | 하나님, 정의를 추구하는 삶이 되겠습니다.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