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천추에 빛나는 별이 되리라!”

행전 7:1-60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에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명의 리더 중 하나인 전도자 스데반에 대해 배웠습니다. 아니 스데반이란 인물에 대해 배웠다기보다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온갖 박해와 저항을 뚫고 힘 있게 전파되고 있는지를 가슴 벅차게 관찰하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은혜와 권능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 스데반,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의 증인이 된 전도자 스데반, 천사의 얼굴을 가진 하나님의 대변인 스데반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그를 통해 하나님의 큰일(Magnalia Dei)이 거침없이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스데반의 당당한 사역 활동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기도 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과 근본적 차이

 

오늘의 본문은 유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는 전도자 스데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게 된 것은 복음의 흥왕을 시기하는 상당수의 유대인들의 험담과 비방과 모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디아스포라로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들에 흩어져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귀국한 유대인들 가운데 열혈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민”이라 불렸는데(6:9) 그들 중에 몇몇 사람들이 스데반과 심한 논쟁을 한 것입니다. 논쟁의 주제는 분명한 듯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유대인 당신들이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는 부활 승천하셨으며, 부활 승천하신 그분은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며 만유를 다스리십니다.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런 말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메시아(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 자신이라는 스데반의 말은 신성 모독적이었으며 유대교에 대한 악의에 찬 공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대교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는 동일한 성경(기독교인에겐 구약성경, 유대인들에겐 히브리 성경)을 갖고 있었지만, 그 성경이 유대인들의 입장처럼 그 자체로 충분한지,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처럼 그 성경이 그 이상의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상이한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회는 구약 성경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내시는 구원에 대한 것이고, 이 구원의 장대한 이야기의 최종점에 예수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즉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구약 성경의 이야기가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고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구약성경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갈라놓는 중앙에는 예수라는 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스피치(연설)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스데반에게 대제사장이 어제 일어난 논쟁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묻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라고. 이에 대해 스데반이 차근차근하게 답변해 내려갑니다. 7장 1절부터 53절까지는 어제 일어났던 유대인과의 논쟁의 이유와 그에 대한 답변을 변증적 입장에서 밝힌 스데반의 긴 연설 전문입니다. 편의상 스피치(speech)라 하겠습니다. 우선 스피치의 마지막 문단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당신들도 당신들의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에 박해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사람들(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그 의인을 잡아 준 자들일 뿐 아니라 그 의인을 살인한 자들입니다. 당신들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습니다!”

 

스피치의 마무리치고는 무시무시한 결론입니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마무리입니다. 비수를 들이대는 결론 적용부분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있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과 열혈 유대교인들의 얼굴은 어둡게 일그러졌을 것입니다. 회중석의 분위기는 분노와 살기로 살벌했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여러분은 그 다음에 스데반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날 것인지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곧 이어지는 스데반의 처형은 당연한 귀결이 될 것입니다.

 

스피치의 칼날 선 결론부분에 앞에 있는 스피치 본체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데반의 스피치를 들었던 청중은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유대교 지도자들과 열혈 유대교 청장년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스데반의 스피치를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유대인이었다면 스데반의 스피치를 어떻게 들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말입니다. 한 스피치에 다양한 반응들은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긴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과 스데반의 설교에 대한 청중의 반응이 극명하게 다른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하기야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막 4장)를 살펴보면 서로 다른 토양들이 뿌려진 씨앗에 대해 서로 달리 반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스피치(연설)의 내용

 

스데반의 스피치는 구약의 구원 전(全) 역사를 일갈하듯 낭송합니다. 스데반의 스피치는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소명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지방(메소포타미아)에서 이주하여 하란 땅으로, 하란 땅에서 다시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으로 옮겨온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정작 아브라함은 자식을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이야기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또 다른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면서 고생한 이야기로, 다시 그곳 애굽에서 떠나게 되는 이야기로 계속됩니다(1-7절).

 

이처럼 구약의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와 애굽으로의 이주와 거기서의 고난에 대해 큰 윤곽으로 서두를 꺼낸 후,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 이야기를 항목별로 자세하게 이야기해 나갑니다.

    · 할례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야기(창 15:18; 17:1-4, 10-14, 19-22).

    ·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의 고난과 회복의 이야기(창 37장; 39장-42장),

    · 가족과 민족을 위해 일하는 요셉 이야기.

    · 요셉이 죽은 후에 닥친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과 모세의 출생 이야기.

    · 모세의 열정과 실패와 좌절 그리고 미디안으로의 도주 이야기.

    · 미디안에서 나그네가 되어 살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이야기.

    ·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선택하여 “관리(ruler)와 속량하는 자(deliverer)”로

      삼게 되었다는 이야기.

    · 모세는 “광야교회”에서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살아있는 말씀들

      (예, 십계명 등)을 받아 그들에게 주었다는 이야기.

    ·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황금송아지 사건으로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는 이야기

      (출 32장).

    ·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증거의 장막(성막)을 직접 설계하셨고 그 설계도에

      따라 만들도록 하셨다는 이야기.

    · 사십년의 광야 여정 끝에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이게 되었다는 이야기.

    · 세월이 흘러 다윗에 이르러 성막 대신에 성전을 솔로몬을 통해 건축하게 하셨다는 이야기.

 

구약성경 전체에 해당하는 분량을 요약 형태로 풀어간 스피치였습니다. 물론 각 항목마다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스데반의 스피치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스데반이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회고문 형식으로 연설하는 이유는 자신의 복음 전파(“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시다”) 행위를 변호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스피치 결론 부분(52절)을 보면 스데반의 스피치는 결국 예수에게로 귀착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스데반이 이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통으로 일갈하며 강조하는 바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한 족보가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는 마태복음의 족보가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스데반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까지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장구한 구원 역사를 말하는 또다른 이유는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유대인 청중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척하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 펼쳐 가시는 구원행위에 대해 이스라엘이 갈수록 완악하고 패역해져서(“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레를 받지 못한 자들” 51절) 마침내 하나님께서 보내신 최후의 구원자 예수를 배척하고 죽이게까지 되었음을 스데반은 만천하에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스피치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

 

스데반의 스피치를 들은 청중들은 어떻게 반응해야했을까요? 54절은 청중들의 반응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 그냥 지나칠 문장이 아닙니다. 이 문장은 두 구절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기분이 크게 상했다.”) (2) “그를 향해 이를 갈았다.” (“복수심에 불탔다.”)

 

1번 문장과 2번 문장은 분명 다릅니다. 1번 문장에서 2번이 아닌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3) “회개하였다.” 아니면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가슴치며 말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비수 같이 찌르는 스데반의 강력한 메시지에 대해 2번 반응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결국 살인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죄 없는 전도자 스데반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치게 됩니다. 추악한 행동이며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돌에 맞아 죽게 되기 전으로 돌아가 봅니다. 즉 스데반이 스피치를 마친 직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스피치를 마친 직후의 스데반의 표정과 태도를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라고(55-56절).

 

아마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 안의 떠있는 차디찬 살기를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의 스피치에 대해 청중들이 어떻게 나올는지 알았습니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비참한 죽음 말입니다. 굶주린 늑대들처럼 자기를 잡아먹을 앞에 앉자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열혈 추종자들의 눈에서 죽음의 광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임박한 처형 앞에서 그는 초연했습니다. 그는 흑야와 같은 현실 너머에 있는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소름끼치는 장면입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었을까요? 살기에 찬 수많은 눈동자들 앞에서, 임박한 죽음 앞에서 어떻게 스데반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부가적 설명: “성령 충만”의 본뜻

 

[흔히들 “성령 충만”이라면 잘못된 연상을 하곤 합니다. 공중 예배 시에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따발총 쏘아대듯이 소리치는 사람, 다름 사람 아랑곳하지 않고 쇳소리를 내며 소리 질러 기도하는 사람, 생각 없이 방방 뛰면서 열정적으로 찬송을 부르는 사람, 언제 어디서나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 찬송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믿음이 연약한 다른 사람들을 은근 무시하는 사람, 소위 “영 빨”이나 “기도 빨”이 센 사람, 뭐 이런 사람들을 종종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을 다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사도행전)에서 누군가 성령 충만 하다고 할 때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직설적으로 말해, 성령 충만한 사람이란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온전하게 내어맡기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들, 즉 자신의 실패나 성공, 약함이나 강함, 행복이나 불행, 삶과 죽음 모두를 성령께 맡기며 사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께서 자신의 삶 전체를 이끌어주실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스데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과 죽음 너머의 삶 모두를 관장하시고 통제하시는 “성령의 이끌어 가심”에 자신을 온전하게 내어맡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본뜻입니다. 여러분도 성령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울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서 계신 예수”를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묘사할 때는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셨다.”라고 합니다. 지상에서의 모든 구원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본 하늘 광경에선 예수께서 서 계셨습니다. 마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데반을 영접하려는 듯한 모습입니다. 어서 달려 나가 스데반을 맞이하려는 예수님의 초급한 심정을 읽어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지금 스데반이 누구 땜에 이런 고생과 박해를 받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때문 아닙니까? 그렇다면 누구보다 예수님은 스데반의 고통과 눈물과 수고를 얼싸 안아야 할 분일 것입니다.

 

죽음이 영광스러울 수 있다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이를 갈던 유대인들은 담담하면서도 위엄 있는 스데반의 모습을 보자 분노했습니다. 온전한 정신으로는 반응할 수 없었습니다. 스데반을 예루살렘 성 바깥으로 끌어다가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군중의 살기에 찬 광기에 소름이 돋습니다. 스데반의 인생 마지막 장면은 처절하기 그지없습니다. 돌에 맞아 죽다니요! 그러나 그의 죽음이 결코 비극적이진 않다는 점이 우리의 마음을 강렬하게 움직입니다. 결코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영광스런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영광스럽다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다니요! 그건 죽음이 죽음으로 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데반은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처럼 그렇게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로 비록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지게 되었지만 신비하게도 흩어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스데반의 피를 머금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여기저기 알찬 곡식으로 자라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조차 예수님처럼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죽음이라고 모든 죽음이 똑같은 가치의 죽음은 아닙니다. 비참하였지만 영광스런 죽음이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스데반의 죽음을 생명을 낳는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더 많은 생명들이 태어나게 되었으니, 그의 죽음은 복된 죽음이었습니다. 영광스런 죽음이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런 찬송을 불렀으리라 상상해봅니다. 아니 스데반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스데반과 함께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부르고 싶은 열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내가 염려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나 쉬고 싶도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찬송 493장)

 

 

이 이해하기 힘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열혈 유대교 청년이었습니다. 그에겐 이 장면은 참으로 기이하고 이해불가의 광경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 인간으로 하여금 저렇게 천사의 얼굴로 마지막 고백을 하게끔 하는가?” 그는 평생 이 기막힌 광경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1.스데반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역사를 일갈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두 가지로 설명해 보세요.

 

2. 스데반의 스피치의 내용과 특징은 무엇이며, 이런 설교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예수에게까지 내려온 구원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혹시 구약의 구원역사에 대해 우리가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4.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 말해보세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던가를 생각해 보세요(눅 24장).

 

5. 스데반의 설교에 대해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설교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6. 마음을 찌르는 설교와 내려치는 설교와 어떻게 다릅니까?

 

7. 혹시 설교자(목회자)가 감정을 섞어 교인을 치는 설교를 하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8. 죽음에 직면한 스데반의 경우와 예수님의 경우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나요?

 

9. 어떤 죽음이 잘 죽는 죽음인가요? 어떤 죽음이 영광스런 죽음입니까?

 

 Serene Sunrise in Marquette, MI. by hemikeklein

serene sunrise in Marquette. by hemikeklei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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