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12]

“죽었다 살아나다”


[본문]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개역개정, 로마서 6:1-11)



[요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In the same way, count yourselves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Romans 6:11)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어떤 사람들은 복음 설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시합니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일이라는 강박관념이 박혀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누군가 나오게 되면 주님을 위해 일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그것이 여전도회 일이나 각종 예배 참석이나 성가대원이 되는 일이나 성경공부모임에 가입하는 일이나 상관없습니다. 일단 교회에 들어오면 주님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크리스천들은 마리아보다는 마르다를 좋아합니다(참조, 눅 10:38-42). 비록 예수님께서 분명한 어조로 마르다에게 “마리아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을 택했다. 그러니 마리아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도 그렇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일’을 하려했지만, 마리아는 먼저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기독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무엇인가를 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가 그 일에 대한 보답으로 그분을 위해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일(구원)에 대한 선포가 복음 설교입니다.


복음의 설교가 어떤 사람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갖게 하는 근본적 이유는, 보다시피 은혜는 그 어떤 행동이나 노력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의 교리가 교회생활에 위험하다고 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강조하면 교인들이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게 되고,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마치 마르다가 마르아의 행동에 대해 표현했던 불만과 흡사합니다.


복음의 선포는 모든 강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에 두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의 일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불행하게도 우리가 하는 일들은 언제나 일을 잘못되게 만들거나 더욱 악화시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책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하시고 인내하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들을 다시금 고치십니다. 죄가 클수록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 역시 큽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교회당이 필요했습니다. 낙후된 아파트 단지 뒤쪽에 위치한 상가 건물 3층을 빌리게 되었습니다. 그 장소는 동네 목욕탕으로 사용하던 곳이었습니다. 교인들이 합심하여 내부를 개조하고 수리하여 아담한 예배처소로 꾸몄습니다. 그로부터 교인들은 교회의 비공식 이름으로 ‘목욕탕 교회’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가 목욕탕이어야 하는 신학적 이유를 롬 5:20에서 찾았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목욕탕에 갈 때 어떤 사람이 본전을 뽑습니까? 만일 몸에 때가 너무 많아 부끄러울 지경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집에서 먼저 어느 정도 때를 닦고 목욕탕에 가십니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때가 많을수록 목욕탕에 갈 의미가 더 있게 됩니다. 때가 많은 사람일수록 목욕탕에 대해 고마워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목욕탕 교회이어야 합니다. 괜찮은 죄인들이 오는 교회가 아니라 몹쓸 죄인들이 오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교리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이 이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술을 끊고 담배를 끊고 교회에 나오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소리입니다. 깨끗하게 씻고 목욕탕에 가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에는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지는!”(마 17:15)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들이야 말로 절실하게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절박하게 필요한 거지 떼만이 그리스도에게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더 지어야 한다는 말입니까?”(1절)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는 이 질문을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은혜에 대한 가르침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무정하거나 악해지는 것이 아닙니까?”(64번 질문) 그건 아니지요! 목욕탕에서의 따스함과 포근함을 얻기 위해 다시금 시궁창에서 뒹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의도는, 하나님의 율법과 사람들의 죄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5: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은혜에 대한 가르침 때문에 사람들이 무정하거나 악해지는 것”은 교회가 ‘싸구려 은혜’를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헐값에 은혜를 팔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가 올바른 복음을 선포하고 설교한다면, 이런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들이나 교사들은 종종 ‘그리스도 없는 은혜’를 헐값에 팝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그런 은혜를 좋아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실제의 생활에서는 무정하거나 악해지거나 추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물(은혜)을 주시는 분은 빼 놓고 선물만을 챙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들의 자화상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할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에 따르면, 한 사람은 많은 사람을 대신하고 대표합니다. 그러나 역으로 많은 사람이 한 사람 안에 속하게 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아담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능력, 즉 구원하는 능력, 그리고 새롭게 하는 능력의 지배아래 새롭게 형성된 ‘새 몸’(new body)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우리는 지체들로 구성된 ‘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무엇이든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가 부활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부활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지체들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본뜻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는가?” “세례가 그저 말과 물을 가지고 한 장난이 아닌 이상, 여러분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한 것이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실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죄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죽은 자처럼 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처럼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달리 말해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은 일상에서 신앙을 실제로 연습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습니다! 죄가 무슨 소리를 하여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가 지배하는 나라의 언어는 우리가 새롭게 살게 된 나라의 언어와 너무 달라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죽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도 다시 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도래했습니다. 새로움이 온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새 생명을 향해 부활한 것입니다. 이 새 생명은 자기 힘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신앙으로 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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