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로마서 묵상 (15): “종교와 복음”

2010.01.28 15:11

류호준 조회 수:8287

[15]

“종교와 복음”

 

 

[본문]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개역개정, 로마서 7:14-25)

 

 

[요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8)

 

“I know that nothing good lives in me, that is, in my sinful nature. For I have the desire to do what is good, but I cannot carry it out.” (Romans 7:18)

 

 

모든 인간은 종교적입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종교심이라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여기서 ‘종교’란 인간이 신(神)을 찾아가려는 성향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종교는 인간의 행위며 인간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를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사닥다리와 구명줄의 차이입니다. 종교는 마치 사닥다리와 같아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려는 모든 노력들과 수고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복음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진 구명줄과 같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성벽으로 내려진 빨간 로프(줄)를 연상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복음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이 종교가 되도록 하는 모든 노력들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개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우리의 교회(신앙)생활이 '종교적 달리기'를 부추기는 가을 운동회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복음 안에 드러난 신앙의 길은 사닥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려는 모든 인간적 종교행위와는 근본적으로 트랙이 다릅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구원의 길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를 구원의 길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고,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참 종교’(true religion)는 구원의 열매일 뿐입니다. 여기서 '참 종교'란 요한 칼빈에 따르면 '참된 경건'을 말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에 대해 감사하는 반응이 ‘참 종교’이며 '참 경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는 한명의 영혼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주 나쁜 종교들도 있고 괜찮은 종교들도 있습니다. 전도관이나 통일교 같은 구닥다리 이단들이나 신천지 같은 신식 이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점성술, 토정비결, 뉴에이지 운동, 초월 명상교 등과 같이 아주 나쁜 종교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사이비 종교들입니다. 불교, 힌두교, 유교, 이슬람교와 같은 기성 종교들은 그나마 괜찮은 종교들입니다. ‘괜찮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 나쁜 종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회적으로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 착하고 선하게 살라고까지 가르칩니다. 종교의 사회적 순기능이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나쁜 종교든 괜찮은 종교든 어느 종교든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종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종교들 말고 현대인들이 만들어낸 종교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아계발' 종교가 그런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슬로건 아래, 사람들은 자아계발(self-development)이니 자아실현(self-realization)이니 하는 현대적 종교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Help-Yourself-Relig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종교에서는 자기 확신과 자기 신념을 강화시킵니다. 요즈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는 ‘긍정의 힘’ 따위의 조류가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과 힘은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괜찮은 종교들에서 밀어주는 사회사업이나 복지운동으로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구절을 많이 암송한다고 해서, 열심히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종교적 절망감(religious despair)입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복음을 알기 전에 경험했던 종교의 비극적 절망감이었습니다. 도무지 어디에도 구원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입니다.

 

로마서 7장은 우리에게 종교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善)이 낭비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선함’(goodness, 히브리어로는 ‘토브’라고 하는데,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어다)을 자기 고집대로, 자기를 위해, 삐뚤게 사용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개혁신학(칼빈주의) 전통은 이것을 가리켜 ‘전적부패’(total depravity)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통과 교제가 두절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사람에게 일반적인 선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신자에게도 창조적인 재능들이, 착하게 살려는 의지와 행실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파손되었고, 하나님에게 이르는 전화선이 훼손되어 통화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리저리 애쓰고 힘써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의 뜻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도 우리를 새로운 종류의 삶을 살도록 만들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를 위해 제정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들을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자신이 얼마나 못되고 몹쓸 인간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된 성품(sinful nature)과 더러움들을 폭로하고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깨끗하고 완벽한 거울 앞에 설 때 우리의 얼굴에 있는 아주 작은 잡티까지 드러납니다. 그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자괴감에 빠집니다. 어디 얼굴만 그렇습니까? 왜 내 몸매는 이렇게 형편없는 거야? 특별히 자신의 얼굴에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여성들은 ‘으악!’ 하며 비명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참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인 것을 어쩝니까? 비극적 사실입니다. 삼키기 어려운 큰 알약과 같은 진실입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몸소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 안위든지 영원한 구원이든지 그래서 종교에 발을 담급니다. 술에 취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들의 내면적 고통과 죄책감은 더 악화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로 가져 오십니다. 이것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 누구도 창조하지 못한, 창조할 수도 없는 위대한 시작입니다. 창세기(genesis)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 가장 고상한 사람들이 펼치는 영웅적인 노력들은 기껏해야 옳은 것을 하려는 의지에 불과했지 그것을 성취하거나 이룰 수는 없습니다. 모든 종교적 순례자들은 이 사실을 새롭게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이시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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