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예언자 아모스의 "종교제의 비판"

2009.11.13 13:42

류호준 조회 수:8408

“생명력을 잃은 종교 비판”
- 아모스서 5장을 중심으로 -

류호준 목사


* 아래글은 필자의 저서 [아모스: 시온에서 사자가 부르짖을 때]에서 발췌하여 쉽게 쓴 글이다*


구약 성경에서 최초의 문서 예언자로 알려져 있는 아모스는 주전 8세기경에 사역했던 분이다. 남왕국 유다 출신이었고 상당한 식견과 재력도 있었던 분이었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게 된다. 하던 생업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선교사가 된다. 정치적 이유로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의 북쪽 땅으로 가라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그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벧엘 지역으로 가게 된다. 그가 직면한 북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형편이 없었다. 종교는 철저하게 제도화되었고, 교단은 호구지책으로 성직에 임하는 불량 사역자들이 적지 않았으며, 교인들을 무지했고, 종교지도자들은 정치권에 안테나를 높이 세웠으며, 종교지도자들이나 교인들은 역사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삶은 성과 속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일요일에는 하나님을 찾았으나 평일에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마음대로 살았다. 십일조와 각종 기도생활은 잘하였지만 그들 삶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가득 하였다. 종교적 열정은 가히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지만 신앙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착취하는 일은 비일비재하였다. 한마디로 생명력을 잃은 종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특정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모스라 이름하는 예언자를 북 이스라엘로 보내어 그들의 잘못과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자의 포효처럼 외치게 하셨다.

오늘 우리가 다룰 본문은 아모스서에서 대표적인 “종교예식 비판” 구절이다. 본 구절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종교적/신앙적/신학적 일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며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반성하려고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외치심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필 본문은 아모스서 5장의 두 곳이다(4-6절; 14-15절). 이 본문을 선택한 이유는 두 구절이 모두 ‘생명의 길’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5장의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두 단락이 서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외침: “종교 예식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찾을 분을 찾아야지!(4-6절)

본 단락은 “여호와를 찾으라”는 두 개의 반복적인 권고문을 중심으로 직전(1-3절)의 애곡 단락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생명’과 ‘죽음’의 대칭이다. 동시에 본 단락은 내부적으로 다음과 같은 중앙 집중형 대칭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a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러면 살리라(4절)
          b 너희는 벧엘을 찾지 말라(5절)
                    c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라(5절)
                             d 너희는 브엘세바로 건너가지 말라(5절)
                    c'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5절)
          b'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5절)
a'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6절)

이상의 구조가 보여주듯이 여호와를 찾는 일과 성소를 찾는 일을 대조적으로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소가 곧 하나님의 임재 장소라는 잘못된 신학을 배격하고 있다. 또한 구조의 중심 부분에 브엘세바에 대한 언급을 위치시킴으로써, 북 이스라엘 성소(벧엘과 길갈)가 아닌 남방 유다의 성소까지 찾아가는 종교적 열심이 여호와를 찾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잘못된 신학과 그릇된 신앙적 열정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찾아야한다. 그리고 그분이 누구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호세아가 그의 동족을 향해 애절하게 부르짖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그는 무엇을 좋아하시는지를 배우고 실행하는 것이 그의 백성들의 마땅한 본분이 아닌가? 모든 종교적 센터들은 - 교회든지, 신학교든지, 총회든지 -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주는 곳이 아닌가? 종교적 전통을 고집하고, 형식에 집착하며, 기관 운영과 직책에만 신경을 쓰는 교회와 성소라면 그곳들은 생명의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암 4:4에 등장한 벧엘과 길갈에 대한 언급이 다시금 본 단락에서 반복된다. 북 이스라엘의 대표적 성소로 알려진 곳, 벧엘과 길갈, 그 곳은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안녕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그 곳을 찾기만 하면 불확실한 미래가 보장되고, 그곳에서 기도만 드리면 어려운 난국을 타개해 나갈 수 있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었다. 아니 그들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그렇게 믿도록 조작하고 가르쳤다. 대중들은 어리석게도 그러한 잘못된 신학에 중독되었고, 본질보다는 형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종교는 이제 우상 숭배가 된 것이다.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들’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배도의 소굴이 된 것이다.

예배란 무엇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아니던가! 그분의 위엄과 거룩하심 앞에 전율하며, 자신들의 죄들과 악행들을 회개하는 것이 아닌가? 진정한 구원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가 아닌가? 거룩한 하나님이 떠나 버린 벧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벧엘)이 아니었고, 그들이 찾아간 길갈은 돌로 지은 건축물에 불과하였다. 심지어 북 이스라엘 백성 중 어떤 이들의 종교적 열정은 그들로 하여금 국경을 넘어 남방 유대 지방에 있는 또 다른 성소, 브엘세바까지 종교적 순례를 하도록 하였다(참조, 8:14). 그러나 당신들은 기억하시오. 인간이 자기의 욕심을 따라 조작하는 그 어떠한 종교 센터들도 더 이상 그들에게 구원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렇다. 성지를 순례한다고 해서 당신들의 신앙이 깊어지는가? 종교적 절기들을 잘 지킨다고 해서 구원이 주어지는가? 십일조를 잘 바친다고 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성수 주일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로소이다! “길갈은 잡혀갈 것이요,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이다.” 자, 들으시오,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시오, 그래야만 살 것이다.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 말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듯이, 선지자 아모스가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여호와를 찾아보라. 그러면 살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 그러므로 살 수 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적 지도자들이나 정치적 지도자들에 의해 어리석게 조작당하는 불쌍한 이스라엘 대중들을 향한 권고도 아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진지하게, 심각하게 이스라엘에게 살 기회를 제시하고 있는 중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다. 잘못된 종교와 신학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 하나님을 진정으로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는 엄중한 심판선언의 메신저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동시에 자식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대변자로도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두 번째 외침: “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하라, 그것이 생명의 길이로다!”(14-15절)

[본문]

(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추구하고
       악을 추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위에서 말했듯이, “여호와를 찾으라!”는 첫 번째 권고 단락(4-6절)은 다시금 두 번째 권고 단락인 14-15절에서 계속된다. ‘착함’(善)을 추구하라는 권면이다. 앞서서 “여호와를 찾으라”(4,6절)고 권고한 아모스는 이번에는 ‘선’을 추구하라고 권면한다. 이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외친다. 여호와를 찾는다는 뜻은 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선지자는 말한다. 종교와 윤리, 신앙과 도덕은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비윤리적인 사업이나 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종교인이요, 교회라는 단체의 충성스런 일원은 될 수 있어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신앙은 구체적 삶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표현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이 아니다. 교회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주되심과 왕권사상을 널리 선포하여야 할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교회 일에 몰두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웃의 불행에 대해 무관심하면서도 십일조를 잘 드린다고 칭찬 받는다면 그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예배란 경건하게 사는 일이며, 도덕적 뒷받침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무엇이 ‘선’(善)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구체적으로 말한다. 이스라엘 성문에 ‘공의/공법’을 회복하는 것이 선이라고 규정한다.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일, 부당한 처우를 받고도 호소할 곳이 없는 약자들의 자괴감(自塊感),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눈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는 고아와 과부들의 처절한 무력감, 온갖 신체적 폭력과 정신적 압박 속에서 비천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연약한 자들, 돈이 없어 정당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의 한숨 등은 이스라엘 사회에 정의와 공법이 얼마나 최저 수준이었는가를 반영해 주는 예들이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곳에, 여호와의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 곳에 ‘진정한 삶’ ‘참된 생명’(authentic life)이 가능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접받는 사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왕관을 쓴 존재’(시 8장)로 인정받는 사회가 유지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성문’은 그 존재 가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정의가 중단되지 않도록 힘쓰는 것만이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임박한 극렬한 심판의 때에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며, ‘여호와의 날’에 피신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선언된 심판을 전적으로 유산시키지는 않는다 하더라고, 적어도 ‘그 날’이 그들 위로 넘어 갈(passover, 유월[逾越]) 있도록 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선을 추구하고 악을 미워하라’는 권면에 진심으로 응답하여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혹시’ 구원을 제공하실 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모스의 제안이다. 아모스의 유명한 ‘혹시’는 암울한 심판 선언 속에 한줄기 희망의 광선처럼 드리운다. 다시금 우리는 진노 중에서라도 자식을 돌이키시려는 단장(斷腸)의 부성적(父性的) 권면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14절)는 문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종종 벧엘에서, 길갈에서, 그들의 성소에서 부르짖었던 구호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제의를 통하여, 종교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보장된다고 어리석게 믿었던 자들이었다. 아니 그렇게 잘못 인도되었고 교육되었고, 조작되었던 백성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지자 아모스는 말한다. 성전과 종교 제의적 열정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의 구원’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당신들이 그렇게도 입에 담아 외우고 외쳐대었던 ‘선택 신앙’(election faith)의 구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는 기도는 당신들이 선을 추구하고 악을 증오해야 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에게 자동적인 구원을 보장하는 열쇠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언약적 책임 의무들(covenant obligations)을 요구하며, 겸손히 그의 뜻을 추구하기를 요청한다. 아모스와 같은 세기를 살았던 한 선지자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6:8)

다시금 우리는 아모스의 ‘혹시’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최후통첩에 귀를 기울이고 그 행위를 고친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속에서도 보호함을 받아 ‘요셉의 남은 자’가 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그러한 엄청난 재난과 심판의 날 속에서도 살아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은총의 표지가 될 것이다. 눈물겨운 그들의 ‘남아 있음’ 자체 속에 새로운 미래와 생명이 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진이 지나간 곳에 솟구치는 샘물과 폭풍이 스쳐간 곳에 움트는 새싹은 신의 은총의 살아있는 실체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하겠으며, 공의를 행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행하겠는가? 사람의 의는 더러운 옷이라고 그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한 후에 우리는 겸허하게 그분의 처분만을 기다릴 뿐이다. 심판과 형벌의 때에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호의가 ‘혹시라도’ 주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구원받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호의와 은총에 달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모스의 메시지는 현대의 한국 교회들에게 매우 적실성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앙의 본질이시고 주체이신 하나님을 찾는 일이 생명으로 가는 길이며, 이런 길이 신앙과 신학과 교회의 존재 목적이며 목표여야 하는데 혹시 그렇지 못한 것이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고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신학과 종교가 그 자체에 목적을 두면, 다시 말해 몸집 불리기나 체제유지를 위해 존재한다면 반드시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교훈 역시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이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드러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신앙적 열심과 정의로운 삶의 방식이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공의를 강물같이 도도하게 흐르게 하고 정의를 끊임없이 흐르는 개울같이 흐르게 하라”(암 5:24)는 하나님의 외침이 그냥 귓가에 흘려지나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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