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그분의 발을 붙잡고”

마태 28:1-10

 

[성경본문]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설교전문]

 

“두려움과 큰 기쁨”(8절)이라니 도대체 그것이 어떤 느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최초의 부활의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이름의 마리아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났습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이라?

 

두려움의 순간

 

→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던 그 밤을 기억하십니까? 밤에 그 지역의 목자들은 자기들의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목자들 앞에 주의 천사(전령)가 섰습니다. 주의 영광이 그들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목자들은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물론 천사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약속하였지만 그 순간 목자들은 너무 두렵고 무서워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 장면에는 ‘두려움과 큰 기쁨’은 없었습니다. 두려움만 있었습니다.(누가 2:8-14)

 

→ 매우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서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 오신 사건을 기억하십니까?(마태 14:22-33)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어떤 물체를 보고 공포에 질렸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귀신인 줄 알았습니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는 “그들이 두려워 소리를 질렀다”고 말합니다. 그곳에는 그 어떠한 ‘큰 기쁨’도 없었습니다. 두려움만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어떤 기쁨도 없었습니다. 오직 두려움과 공포만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의 순간들

 

그 날, 예수의 부활의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은 ‘두려움과 큰 기쁨’을 갖고 무덤을 떠났습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입니다. 언제 두려움과 큰 기쁨이 함께 일어납니까? 그런 경우를 댈 수 있습니까?

 

→ 아기를 분만하기 직전의 여인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와 같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저는 아이를 낳아본 일이 없기 때문에 말할 자격은 없지만, 아기를 낳기 직전의 어머니들의 일반적인 느낌을 잘 표현한 말일 것입니다. 그렇지요?(‘예’, 감사합니다!. 묵묵부답인 경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군요!”). 두려움과 큰 기쁨이 함께 오는 경우로 무엇이 있을까요?

 

→ 19세의 소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생전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나 먼 미국으로 유학 간 소은이가 미국에서 보낸 첫날의 심경일지도 모릅니다. 좀 무더운 8월의 미국 미시간 주의 한 공항에 내렸을 때, 그리고 차를 타고 입학할 학교의 아름다운 캠퍼스를 방문했을 때의 그 큰 기쁨 말입니다. “아! 이렇게 멋진 곳이 있구나!” 하면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꿈꾸면서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잠겼을 때의 큰 기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리고 몇 시간 뒤에 제가 소은이를 기숙사에 내려놓고 “이제 잘 지내고 잘 적응하기를 바란다.”라고 했을 때 소은이의 심정을 상상하시겠습니까? 홀로 남겨진 기숙사의 창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저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의 소은이의 심정 말입니다. 어떤 감정이겠습니까? 두려움이겠지요. “나 홀로 견디어 낼 수 있을까?” “내가 해 낼 수 있을까?”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여 옵니다.

 

→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두 연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너무 먼 곳에 떨어져서 살아야만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재회하는 시간이 가까워 왔습니다. 두 사람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을까, 혹시 그 사이에 변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이 함께 피어오릅니다.

 

→ 두려움과 큰 기쁨이 함께 올 때가 또 어느 경우가 있을까요? 자녀를 키우면서 그런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딸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하여 생전 처음으로 학원 버스를 태우던 날을 기억해 보십시오. 첫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던 그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는 성년이 되었구나 하는 뿌듯함과 기쁨, 그리고 잘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함께 교차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린아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커서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부모의 입장에서는 두려움과 큰 기쁨입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의 교차로(交叉路)

 

이것은 마치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정말로 그는 일어나셨습니다!”라고 노래하는 것과 같습니다. 달리 말해 경제가 흔들리고 구직의 줄은 길고, 전쟁은 끝이 없고, 공인들은 추락하고, 교인 한 사람이 죽고, 가족 한명은 아프고, 친구의 마음은 상처로 고통하고 있는데, 동시에 부활절에 노래하고 외치고 즐거워하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입니다.

 

일주일의 첫 날 새벽이 밝아올 때 두 여인이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갔을 때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이 뒤로 물러갔으며 천사가 그 위에 앉아있었는데 그의 옷은 번개 같이 밝고 환했으며 눈 같이 희었습니다. 이런 경황에 무덤을 지키고 있던 경계병들은 질려 버렸습니다. 사색(死色)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두렵고 떨려 죽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 위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천사가 두 마리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를 찾고 있는 줄 안다.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다. 일어나셨기 때문이다.” 그 전령은 무덤 안을 들여다보라고 한 후에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르라고 했습니다. “그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너희가 거기서 그를 볼 것이다.”

 

그들은 부리나케 떠나 제자들을 찾으러 갔습니다. 바로 이 때 두려움과 큰 기쁨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이 광경을,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길’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복음을 전파한 최초의 선포자들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진실을 목격한 최초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분은 정말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정말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외친 최초의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말하기를, “그 때 예수께서 그들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둘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더니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풀이 죽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가서 만나게 되었다는 식이 아닙니다(누가 24:13-35).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가던 두 여인에게 갑작스레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이 교차하던 그 중간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신 것은 바로 이런 시간이요 이런 장소였던 것입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말입니다. 한쪽의 두려움과 다른 한쪽의 큰 기쁨이 교차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발을 붙잡는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이 예수께 다가서더니 땅에 엎드리면서 덥석 예수의 발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경배하였습니다. 매우 이상한 장면입니다. 다리를 붙잡다니요! 발을 붙잡다니요! 그 두 마리아들이 예수의 발을 움켜잡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무릎을 꿇거나 혹은 허리를 숙였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혹은 “라보니!”라고 했다면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경배하는 그들의 행동이 겸손한 행동도, 복종하는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면 말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발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붙잡는다.’는 용어는 이 이야기보다 몇 장 앞선 이야기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입니다(26:47-56).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계셨던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들, 요즈음 말로 하자면 용역 깡패들, 돈 주고 사온 조직폭력배들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를 ‘잡으러’ 왔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경우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그렇게 잡았다는 것입니다. ‘꽉 잡다’, ‘꼭 붙잡다’, ‘움켜잡다’ 그런 것입니다. 두 마리아들이 예수님의 발을 그렇게 움켜잡았던 것입니다. 우리말로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지 않은 것입니다. ‘두려움과 큰 기쁨’ 가운데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꽉 잡은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많은 경우에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발을 잡는 경우: 요한복음서의 경우

 

요한복음을 읽는다면 발을 잡는 행동은 세족식이 열리던 수난 주간 목요일에나 적합한 일입니다(12:1-8). 요한의 ‘부활 이야기’에는 누군가 예수의 발을 잡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요한의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기가 아버지께로 올라갈 때까지는 자기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20:17). 그러나 요한은 그의 독자들에게 예수님을 만지려던 마리의 행위가 정말로 ‘소중한 생명’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행위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려고 했던 것이 그저 ‘슬쩍 지나치면서 만졌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어떤 환자가 외롭게 지내다가 병문안 온 사람이 있으면 빨리 가지 못하게 그의 허리춤을 꽉 붙잡는 것이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마태는 두 마리아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을 붙잡고 있는 장면을 클로즈업 시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발을 잡는 경우: 누가복음서의 경우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두 여인이 주님의 발을 붙잡고 있는 장면과 비슷한 장면이 찾는다면 아마 죄인이었던 한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장면을 떠올릴 것입니다(7:36-50). 그녀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젖은 발을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로 발을 발랐습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즉 그녀가 너무 ‘진한 사랑’의 표현을 예수님께 했다고 비난하고 불평하던 사람들 모두에게 들으라고 하시면서, 큰 소리로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죄들이 용서함 받았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고 있는 사건 즉 마리아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있는 사건이 누가복음서에 있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이 이야기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작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묘사와 목적이 다른 복음서의 경우와는 특이하게 다릅니다.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께서 향유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사건은 문등병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 여인은 옥합에 담긴 매우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 전부에 부었습니다(26:6-13). 그의 발에 부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 아침에 등장하는 이 두 여인은 그분의 발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두려워 말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일러라. 그곳에서 그들이 나를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매우 빨리 끝납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인 28장은 ‘위대한 위임 명령’(Great Commission)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으니.

                  그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나라들을 나의 제자들로 만들라.… ”

 

이런 위대한 위임 명령이 주어진 장소는 갈릴리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라고 하신 그 갈릴리의 한 산 위에서 예수께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갈릴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갈릴리가 어딥니까? 왜 갈릴리 입니까?

 

갈릴리가 어디인가?

 

갈릴리라? 아시다시피 그분의 삶, 그분의 증언, 그의 사역들, 이 모든 일들은 대부분 갈릴리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 갈릴리가 어딥니까?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면서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마태 4:23) 곳입니다.

 

→ 갈릴리가 어딥니까? 예수께서 한 산에 올라앉자 “큰 무리들이 그에게로 나오는데 절름발이, 눈먼 사람, 간질병자, 중풍병자 벙어리 그리고 그밖에 많은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모두 예수의 발 앞에 놓으니 예수께서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놀랐습니다. 그들은 벙어리가 말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깨어진 사람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걷지 못했던 사람들이 걷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소경이 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리들은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발 앞에서 고침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 갈릴리가 어딥니까? 큰 무리들이 인간의 절실한 궁핍을 예수의 발 앞에 가지고 나왔던 장소였습니다. 바로 그곳 갈릴리에서 예수의 발 앞에서 공짜 파티처럼 풍성하고 넉넉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붙잡으라!

 

그러므로 마태에 따르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을 붙잡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충성하겠습니다!”, “헌신하겠습니다!”, 아니면 “권세에 대해 복종하겠습니다!” 라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비롭거나 순박한 경건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생명과 가르침과 긍휼과 자비를 통해 지금 여기, 갈릴리에, 우리의 두려움과 큰 기쁨 한 가운데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를 오게 하시는 그분을 꼭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분은 어린 아이들을 환영하셨던 분입니다.

·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신 그분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던 분이십니다.

· 자신의 죽으심으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놓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장을 허무신 분이십니다.

· 그분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음식을 잡으시던 분이었고, 사회적으로 버림 받은 자들을

  감싸시며 위로해 주시고, 마지막이 되는 것이 첫째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이었습니다.

·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은혜의 보좌에 앉으시기 전에, 영원히 함께 있겠다는 약속과

  함께 위대한 위임 명령을 하시기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와 함께 갈릴리로 가자”고

  말씀하신 분이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분의 탄생, 그분의 생애, 그분의 죽음, 그분의 부활, 그분의 다시 오심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지금 여기, 즉 깨어지고 상처입고 일그러진 우리의 인간성 한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숨 쉬고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삶의 현장, 두려움과 큰 기쁨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서 주님의 삶 전체가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 우리의 삶들,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일어나셨습니다. 정말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크리스천들은 부활절의 환호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덤에 서서 무엇이라 소리 질러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이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지금 이런 공간(교회당) 안에 모여 있을 때 그렇게 외칩니다.(다같이!).

 

‘예배 의식적 혼돈’

 

그러나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멀게는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깝게는 우리 주변과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세계경제, 국내 경제가 지진을 만난 듯이 흔들립니다. 은행들이 불안합니다. 가정들이 깨어집니다. 전쟁은 끝이 없고 전쟁의 화염은 계속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지구 한편에서는 가뭄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고, 종족간의 내전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인(公人)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몰락합니다. 가까이는 잘 믿던 교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가족 식구 중 하나는 병이 들고 친한 친구의 가슴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습니다.

 

자,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때야 말로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외쳐야 하는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의 교실에서, 우리의 삶에서,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라는 예배(경배)의 외침 말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가리켜 ‘혼돈에 쌓인 예배’ 혹은 ‘정신이 없는 예배’ 혹은 ‘예배 의식적 혼돈’(liturgical chaos)이라 불렀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 예배는 아름다운 합창이 들려오는 예배가 아닙니다. 잘 정돈된 예배의 아름다움, 지휘자의 정교한 손가락 끝에서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합창이 아니라, 여기 저기 들쭉날쭉 터져 나오는 외침들, 두려움과 큰 기쁨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외치는 고백적 함성들, 즉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라는 외침의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 예전(禮典)적 혼돈’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갈릴리에서, 우리의 두려움과 큰 기쁨의 교차하는 가운데서 터져 나오는 외침들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그분의 발을 붙잡고 있습니다. 저는 ‘소중한 생명’, ‘부활의 생명’을 굳세게 잡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나는 부활생명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저와 저의 구원을 위한 부활생명의 힘을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생명을 주시고 죽음을 깨어 부수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는 꼭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고 일하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장차올 나라를 위해 그리고 그 나라가 속히 오기를 위해 그분을 꼭 붙잡고, 기도하고 일하고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무지개 교회 2009년 부활주일 설교전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류호준 2020.08.24 4395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928
649 신앙교육(9):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류호준 2009.03.15 8641
648 신앙교육(26): "주님과 교제하는 여러 길들" 류호준 2009.08.07 8615
647 로마서 묵상 (16) : “성령에 이끌리는 삶” 류호준 2010.01.28 8614
646 로마서 묵상(1): "복음의 능력" 류호준 2010.01.03 8610
645 설교: "남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1] 류호준 2009.05.10 8610
644 로마서 묵상(14):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류호준 2010.01.28 8590
643 허둥대는 형님들, 치밀한 동생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6 8587
642 신앙교육(12):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하는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류호준 2009.04.11 8584
641 얍복 나루에서 있었던 일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4 8577
640 신앙교육(20): "교회를 위한 하늘의 은사들" 류호준 2009.06.28 8567
639 설교: "햇빛과 비" 류호준 2009.05.09 8564
638 고향으로 떠날 준비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4 8557
» 설교: “그분의 발을 붙잡고”(부활주일) 류호준 2010.04.04 8540
636 설교: "약속에서부터"(대림절 넷째주일) 류호준 2009.12.27 8535
635 감옥에서 일어난 일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05.16 8535
634 신앙교육(21): "교회의 직분들" 류호준 2009.07.05 8506
633 로마서 묵상(3) : "괜찮은 죄인들" 류호준 2010.01.06 8502
632 (1)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 (창 1:1-23) 류호준 2007.09.27 8484
631 [예수님을 따르는 삶: 마가복음서 묵상]의 서문 류호준 2007.07.22 8476
630 로마서 묵상(13): "아직도 전투는…" 류호준 2010.01.25 8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