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13]

“아직도 전투는


[본문]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개역개정, 로마서 6:12-23)



[요절]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롬 6:13)


“Do not offer the parts of your body to sin, as instruments of wickedness, but rather offer yourselves to God, as those who have been brought from death to life…” (Romans 6:13)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죄와의 전쟁이 이미 끝났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보시오, 이미 끝난 이야기요! 과거 이야기란 말입니다. 당신들은 이미 과거에 죽었던 사람들이고 그 후에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에게 죄의 지배력은 상실되었습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은 이미 지난 이야기란 말입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영문입니까? 12절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끝까지 잘 싸우라는 것입니다. “죄가 너희 안에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시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이 신앙 안에서 새 삶을 산다는 근본적인 뜻입니다. 복음은 선언하기를, 모든 것이 단번에 다 끝났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본래적 의미입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라고 합니다. 부연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죄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형벌을 받았고, 그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가 지배하던 옛 시절은 지나갔고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는 중입니다. 복음은 이런 좋은 소식이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할 메시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런 메시지를 명령 형식으로 말씀하기도 합니다. “너희 지체를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 서술형의 복음이 명령형의 복음과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려면(정체성),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삶의 방식)를 보여주려면, 우리는 우리의 옛 주인(죄와 마귀)이 아니라 새로운 주인이(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들, 우리의 마음들, 우리의 생각들, 우리의 말하는 방식들, 우리의 행동하는 양식들 등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새로운 주인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반영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메시지’인 동시에 ‘명령’이란 뜻입니다. 여러분이 이 메시지를 믿는다면 그 명령 역시 순종해야할 것입니다.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여러분은 여러분이 그 메시지를 믿고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내용과 그에 따른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지 = 명령)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복음의 선언은 결코 마술적 주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들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의 갈등과 싸움이 전혀 없어지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하고, 행복하고, 고민과 갈등도 없고, 항상 죄에 대해서 승리한다는 발상은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이것은 경박한 승리주의자가 되는 첫 발걸음입니다. 그러다가 큰 코 다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메시지의 다른 면은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났으니 가만히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전투로 이어집니다. 즉 믿음을 갖는 순간부터 영적인 전투에 투입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악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 자신 전체를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그가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말게 하여 주시고, 다만 악(마)에서 구출하여 주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팽팽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에 전운이 감도는 것입니다. 그러나 긴장 그 자체는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항상 죄와의 전투 중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지금 진짜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생활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대세를 가름한 ‘그 전쟁’(The War)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능력과 힘으로 굳세게 설 것이며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의 후렴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 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찬송 150장)


        “So I'll cherish the old rugged cross

         Till my trophies at last I lay down

         I will cling to the old rugged cross,

         And exchange it someday for a crown”


우리가 얻은 새로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할 값이 있습니다. 끈임 없는 경계입니다. 정신 차리고 깨어있는 일입니다. 마치 군사 분계선의 철책 선에서 근무하는 보초병들의 경계 근무처럼 말입니다. 매 순간 기도하고 정신 차리고 앞을 응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누가 진정으로 우리의 주인인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와 함께 자기의 길을 걸어가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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