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26]

“하나님 도와주세요!”

 

[본문: 로마서 10:5-13]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요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9,13)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Jesus is Lord,'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will be saved. ……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Romans 10:9,13)

 

 

유대인들에게는 ‘토라’라 불리는 구약성경이 주어졌습니다. 보통 ‘토라’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율법’으로 번역됩니다만 문자적으로는 ‘가르침’ ‘교훈’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이런 것들은 꼭 알고 지켰으면 좋겠다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토라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에게 혹은 스승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교훈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토라는 올바로 사는 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들에 대한 자세한 안내자입니다.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서부터인지 유대인들은 이 안내책자가 말하고 있는 정신과 내용보다는 그 세부지침사항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 것은 보통의 유대인들, 평신도 유대인들이 아니라 토라를 공부하고 열정적으로 토라를 연구했던 랍비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토라에 주석까지 달면서 그것이 말하는 정신보다는 그것에 대한 세부적인 규례들과 법규들을 덧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두꺼운 규례 집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인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이 유대인들처럼 살려면 이 모든 규정들과 율법들과 규례들을 철저하게 지켜야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열정과 열심에 대해 뭐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점점 도가 지나치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안내 책자(토라)는 유대인들을 얽매거나 짓누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안내해주는 지침서였습니다. 그러나 보통 유대인들은 이 토라(율법)의 목적과 정신을 잘 알지 못한 상태로 모든 율법의 세부사항까지 문자적으로 잘 지켜야 뭐가 되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율법의 정신에 따라 율법을 잘 지키면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에게도 유익과 평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것이 율법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있다는 사실을 잊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율법주의자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많아지다 보니 서로를 경계하고, 누가 더 잘 지키는지 한번 보자 하는 식이 되었으며, 어느 단체나 그렇듯이 공동체 안에는 광적인 율법 준수자들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보통 유대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부족함을 느꼈고, 속으로 우리도 저 정도는 되어야하는데 하며 자신들은 이등 시민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 율법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은 점점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을 때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보통의 선량한 유대인들은 우리가 율법의 기준에 한참 모자라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꾸로 말해 유대인들 대부분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의 눈도장을 받을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마치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에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일종의 공로 사상(功勞思想)입니다. 노력과 애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와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노력과 수고로 버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버는 것과 받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줄이지 우리가 타고 올라가는 사닥다리는 아닙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모든 “종교적 달리기”를 멈추어야 합니다. 열심히 달려서 하늘에 까지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율법을 다 지킬 수는 없다!” “한사코 율법 조문을 이용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겠다는 자들아 그게 쉬운 줄 알아?”, “깨알 같은 계약서 조항들에 일일이 얽매여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몰라?” 이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5절)는 말은 본뜻입니다. 달리말해 바울의 논조는 이렇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그러한 의로움으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어. 그 말은 맞는 말이야. 그런데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가? 당신들 가운데 수백까지 되는 율법의 사항들은 하나도 어기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어? 없잖아!”

 

모든 사람 -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 은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참선을 한다고 해서, 수행을 한다고 해서, 도를 터득한다고 해서,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애를 많이 쓴다고 해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죄를 씻지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544장 1-3절)

 

그럼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려 하늘에 올라가거나 예수님을 모시려 저 스올(죽음)의 세계까지 내려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의지가 있어도 그런 힘은 없을 겁니다. 마치 날개가 부러진 새가 날고 싶은 의지는 있겠지만 실제로 날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날개 부러진 새가 날려면 누군가의 등에 업혀 날거나 아니면 부러진 날개가 회복되어야 할 겁니다. 즉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엄마와 함께 대공원 놀이터에 갔던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행락(行樂) 철이라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요! 어떻게 하다 그만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이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엄마를 찾아 나서야 합니까? 아니지요.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우는 것입니다. 엄마를 부르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자기를 구원하려고 이리저리 백방으로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점점 일이 꼬일 것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엉엉 울며 엄마를 부르면 됩니다.

 

이것이 구원 받는 지름길입니다.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것입니다. 구원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당신만이 나를 구원해주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구세주시며 주님이십니다!” 라고 말입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엄마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절실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외칩니다. “예수님, 당신만이 나를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라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나도 살려 주세요”라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소경 걸인 바디매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리쳐 도움을 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자유인이든 종이든, 남자든 여자든 - 믿을 수 없을 만큼 동일하게 풍성히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13절)는 말의 본뜻입니다.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가의 마지막 절을 소박하게 마음을 담아 불러보십시오.

                      “믿으면 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힙 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당했네.

                       나를 구원 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544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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