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는 것”

요한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유언과 기억

 

살면서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는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일까요? 아니 누구의 말이 잊히지 않고 가슴속에 살아남아 있을까요?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가장 깊숙이 남는 말은 어떤 사람이 죽기 전에 여러분에게 남긴 말일 것입니다. 임종 시에 남긴 유언이지요. 종종 그 유언은 나를 향한 그 사람의 진한 마음이 축약되어 있을 겁니다. 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소 젊은 나이인 42세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시면서 아버지는 16살의 어린 장남인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들아, 너는 약(弱)해!” 물론 당시는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몰랐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고 매우 당황스러웠던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노도광풍 몰아치는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여리고 약한 어린 아들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었습니다. 사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제가 어른이 되어가면서였습니다. 한길 가는 순례자처럼 똑바로 걸으려고 부단히 애를 쓰긴 했지만 이런 저런 일로 휘둘림을 당할 때마다 그 말이 기억 속에 새로웠습니다. 그 때마다 나는 “내가 정말 약하기는 약하구나!”하고 탄식하곤 했습니다.

 

상상하건데 오늘 말씀 속에 담긴 예수님의 고별사에 대해서 아마 초기 제자들이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들은 그 당시 예수께서 고별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생뚱맞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식사 자리가 불편했을 것입니다. 어쨌건 가룟 유다를 빼놓고 그들 모두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남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앗아가는 위기가 점점 고조되면서 그들의 마음과 앞길은 매우 어두웠습니다. 초초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식탁 주위를 감싸고 있었을 때 주님께서 입을 열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라.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했던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단순하고 명확한 그러나 비수처럼 그들 마음에 꽂히는 충격적 말씀이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두고두고 마음에 떠오르곤 하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고별사

 

“서로 사랑하라!”

        · 이것이 이 세상에서 너희 삶의 특징이다.

        · 사람들이 너희의 진정한 정체성, 너희의 참 본질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길이

          이것이다.

        · 이것이 궁극적으로 너희가 존재해야하는 이유이다.

 

물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구태의연하거나 식상한 상투적인 말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빼면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흔히 듣는 말이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가 아닙니까? 게다가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사랑을 빼놓은 기독교는 영혼이 떠나간 육체와 같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셨을 때 그 선언은 매우 창의적이고 아주 새로운 가치 선언도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독창적 사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보다 훨씬 앞선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다시금 반복해서 암송되고 기억되는 주제들 중에 하나가 ‘사랑’입니다.

 

아마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을 하시면서 반복해서 이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명령과 부탁(“서로 사랑하라”)이 특별하고도 기억이 될 만한 유별난 뉘앙스라도 있단 말입니까?

 

예, 있습니다. 예수께서 남기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독특하고 기억할 만한 문구가 되는 것은 그 문구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한정짓는 말씀이 덧붙여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던 것처럼”이란 한정구입니다. 달리 말해 옛적부터 내려오는 이상적 상태(“서로 사랑하라”)를 친히 몸으로 실현하신 예수님의 성육신 방식이 우리를 포함한 그의 제자들이 따라야할 패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상형, 즉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보여주는 이상(ideal)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본문 중에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이 분이 어떻게 실제로 사랑했습니까? 우리처럼 되셔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충분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신 그분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셨나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이 정도 되면 우리는 비로소 신앙의 핵심부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개별화된 사랑

 

이런 질문에 대해 어거스틴은 우리에게 두 가지 힌트를 제공합니다. 어거스틴은 예수께서 자기가 만났던 사람을 사랑할 때 마치 이 세상에서 사랑할 사람이 그 사람밖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달리 말해 예수는 다른 사람을 향해 보이셨던 애정과 사랑을 철저하게 그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개인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마치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쳐다보는 사람처럼 그분은 기꺼이 그렇게 어리석게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은 각 개인 속에 있는 독특하고 유별난 ‘개별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특별한 헌신과 훈련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듯이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만났으며 따라서 그들을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대우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역시 사람들을 만나거나 대할 때 종종 ‘범주화’시켜 만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즉 인종, 성별, 직업, 신분, 외모 등으로 범주화시켜 상대방에게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숲만을 보는 사람처럼, 각 개인들이 갖고 있는 독특성, 즉 그의 필요와 궁핍, 그만의 생김새와 처지 등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이상적 상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이 우리의 가능성 바깥에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 이런 ‘개별화된 사랑’, ‘맞춤형 사랑’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용량과 능력이 커지고 자라기를 소원합니다. 물론 거룩하신 분께서만 이런 이상(理想)을 완전하게 실행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을 암송하려고 무던히 애썼던 어떤 아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사랑의 ‘개별화’를 유머 있게 들려줍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주기도문을 하면서 그의 입에서 불쑥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 …

              그런데, 하나님은 제 이름을 알고나 계시는지요?”

 

물론 하나님의 대답은, “귀여운 내 자녀야, 나는 네 이름을 알고 있거든!”일겁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매우 개인적이고 친밀하고 개별적이라는 사실을 감동 있게 말하는 예언자가 있습니다. 이사야입니다. 그는 이사야서 4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밤마다 그의 하늘 창고에서 별들을 이름으로 불러내어 밤하늘 자막에 걸어놓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자기가 사랑하는 자녀들의 이름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분은 각 사람의 개별적 사정과 형편을 아시고 그들 각각에게 개별적인 사랑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무명(無名)의 스타(star)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유명 스타들입니다.

 

 

모두를 감싸는 사랑

 

어거스틴이 알려주는 두 번째 힌트가 있습니다. 각 개인을 ‘개별적으로’ 사랑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개별화된 사랑으로 사랑하셨던 예수님은 동시에 우주적 사랑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보듬어 품에 안으시는 하해(河海) 같은 사랑을 하신 분이십니다. 이 두 가지 사랑의 특성들(‘개별화된 사랑’과 ‘포괄적 사랑’) 중에 어느 것이 더 놀라운 것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네 복음서 안에 묘사된 예수님에 대해 어거스틴이 잘 말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계시면서 그가 사람들을 바라보셨던 눈은 결코 누군가를 경멸하는 눈이거나 사람들의 궁핍에 대해 매몰차게 바라보는 비정한 눈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사람들을 향해 야단치시거나 심하게 꾸짖을 때에라도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미움이나 증오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반대는 분노가 아니라 무관심(indifference)이나 무정(無情, apathy) 혹은 냉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여러분은 단 한 경우도 예수께서 누구엔가 고개를 돌려대시거나 무섭게 대하신 경우라도 그에 대해 무관심하다거나 “이제부터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없다!”는 식으로 대하신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독특한 방식을 정말 탁월하게 묘사한 것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이 사람을 사랑했던 방식으로 사랑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사랑하시되 세상에 오직 ‘나 혼자’만 존재하듯이 그렇게 사랑하셨으며, 우리 각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모두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사랑을 따라서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 따라서 하기”입니다.

 

 

필요사랑

 

이러한 놀랍고도 탁월한 사랑의 특질을 묵상하고 곱씹어 볼수록 저는 루이스(C. S. Lewis)가 사랑에 대해 가르쳐준 놀라운 가르침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저서 가운데 하나에서, 이 놀라운 학자는 ‘사랑’에 해당하는 유명한 헬라어 단어들을 모두 조사한 다음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사랑으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필요사랑”(need love)이고 다른 하나는 “선물사랑”(gift love)입니다. 필요사랑은 필요를 채우기 위한 사랑이고 선물사랑은 선물로 주는 사랑입니다

 

루이스는 말하기를, 필요사랑은 언제나 공허와 텅 빔과 허전함에서 태어나는 사랑입니다. 필요사랑은 꼬치꼬치 캐어묻고 파고드는 성향의 사랑입니다. 궁핍한 애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대상이나 사람 안에서 그가 꼭 갖고 싶어 하는 가치만을 봅니다.

     · 필요사랑은 자기를 위해 움켜잡거나 맛보거나 즐기려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 필요사랑은 욕심쟁이입니다.

     · 필요사랑은 달라고 하는 사랑입니다.

     · 필요사랑은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는 사랑입니다.

     · 필요사랑은 자기 안에 채워야할 공간이 있기 때문에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도형으로 표현하자면 필요사랑은 언제나 원형(circle)입니다. 즉 사랑받는 자에게로 나아가 그 안에 있는 좋은 것(가치)을 빼내어 다시 자기에게로 가지고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 필요사랑은 진공청소기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자기에게로

       빨아들입니다.

     · 필요사랑은 문어발의 흡착기입니다. 타인의 좋은 것에 꽉 달라붙어 쭉 빨아들입니다.

 

루이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실제로는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당신을 원합니다.” “당신에게는 내가 꼭 갖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갖고 싶습니다.” 라는 뜻이 아니겠는가라는 것입니다.

 

선물사랑

 

자, 이런 영상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전혀 다른 실체가 있습니다. 루이스가 ‘선물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필요사랑이 ‘달라고 하는 사랑’이라면 선물사랑은 ‘주려고 하는 사랑’입니다. 이 선물사랑은 결핍이나 비어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이 아니라, 충만함, 가득함으로부터 태어나는 사랑입니다. 선물사랑의 목표는 사랑받는 자를 풍성하게 가득 채워줍니다.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가치를 빼어내지 않습니다.

          · 선물사랑은 원(circle)이 아니라 아치(arc)입니다.

          · 선물사랑은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인가 얻어내거나 줄이지 않습니다.

          · 선물사랑은 그를 축복하고 증가시키고 자라게 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 선물사랑은 수맥까지 내려간 우물입니다. 언제나 철철 넘칩니다. 각박한 세상의

            가뭄에도 흘러넘치는 우물입니다.

          · 선물사랑은 진공청소기나 블랙홀과 같은 필요사랑이 아닙니다.

          · 선물사랑은 무지개 사랑입니다. 동과 서, 남과 북, 하늘과 땅을 감싸는 사랑입니다.

 

조영남과 패티킴이 부른 ‘우리 사랑’이란 노랫말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선물사랑의 통속적 표현일 겁니다.

 

                 내가 빗속을 걷고 싶다면 당신은 소나기 되었고

                 당신이 눈길을 걷고 싶다면 나는 눈보라 되었네

                 내가 해변을 걷고 싶다면 당신은 수평선 되었고.

                 당신이 별을 보고 싶다면 나는 밤하늘 되었네.

 

루이스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실체에 대한 성경적 비전이 독특하고 유별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필요사랑이 아니라 선물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 3;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로다.” (요한1서 4:10)

 

루이스의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들입니다.” 선물사랑에 대한 루이스의 묘사는 어거스틴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사랑의 방식의 기초입니다. 영원하고 무조건적 하나님의 사랑 위에 기초를 두고 예수님은 우리를 ‘개별적으로’ 동시에 ‘모두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가장 좋은 소식은 우리가 이러한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절체절명의 정체성(“사랑받고 있는 자”)이며 우리가 살아야 가야할 삶의 길(“사랑하고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따르기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13:1). “끝까지 사랑”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사랑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라는 종(種)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분에 관련하여 그에게 속하여 존재하는 ‘인간에 가까운 존재’ 즉 ‘하류인간’ ‘원인’(遠人)(subhuman)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그분처럼 참 인간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불가능하였더라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원형이시고 전형이시고 인류의 종(種)이신 예수님을 닮아 비로소 참 인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무던하신 은혜, 끊임없는 은혜, 실패하지 않는 은혜의 도움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놀라움 안으로까지 자라갈 수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당신밖에’ 아무도 없듯이 그렇게 사랑할 것이고, 그런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데 까지 자라야 할 것입니다. 아멘.

 

                                 [9월 19일 무지개 교회 주일 아침 설교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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