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그리스도인, 영광스런 호칭”

행전 11:19-30

 

들어가는 말

 

초대 교회라는 씨앗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싹을 틔우고 새순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폭포수와 같은 성령의 강권적 사역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좋은 소식)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산불이 바람에 번지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목격했던 사도들은 당시 동족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한 예수를 하나님은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를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는 마침내 온 세상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제 그를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를 당신들의 구원자로, 주님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이 초기교회가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만이 세상의 소망이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초기의 복음 전파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유대 땅에 살고 있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 지역에서 살다가 귀국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당대 유대교는 새롭게 탄생한 기독교회가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교는 구약시대로부터 시작된 오래된 전통적 종교였고,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유대교인이었습니다. 그들에겐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가 볼 때 신흥 유사 종교와 같은 기독교회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유대교를 온통 뿌리채 흔들어 놓을 뿐 아니라 수많은 유대교인들을 미혹하여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과 동급이라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그들은 분을 삭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 박멸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예 초장에 싹부터 잘라내야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대표적 박해의 표본이 된 것입니다(7:54-60).

 

흩어진 사람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8:1b) 여기로부터 “흩어진 사람”(diaspora)이란 용어가 유별나게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박해의 회오리바람으로 복음이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날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리저리 날려 다니다가 사라지거나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의 씨앗은 이곳저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생소한 곳, 척박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게 된 복음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더라.”(8:4)

 

오늘의 본문은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분명 행전 8장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흩어진 자들”이란 용어가 양쪽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핵심 고리입니다. 그들은 환난의 회오리바람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입니다.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어디론가 날아간 사람들입니다. 뿌리가 뽑혀 버려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곳에 편안하게 정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은 바람을 타고

 

그러나 복음은 바람을 타고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복음은 바람을 타고”라는 문구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람이라? 어느 바람입니까? 흥미롭게도 히브리어나 헬라어에는 ‘성령’이나 ‘바람’이나 ‘숨결’이나 ‘호흡’이 모두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신다면, 여기서 바람은 “성령의 바람”이라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성령의 바람을 타고 넓디넓은 지중해 연안 여러 지역에 안착하게 됩니다.

 

(1) 베니게는 세계사에서는 페니키아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레바논과 시리아 지역입니다. 구약에서 두로와 시돈은 페니키아 제국의 대표적 도시국가들입니다. 페니키아 출신으로 악명 높은 인물을 들라면 구약 왕정시대의 이세벨이 있습니다. 그녀는 페니키아 제국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정략 결혼한 여인이었습니다(왕상 16:31). 또한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떠나 사르밧 지역에 가서 한 불쌍한 과부를 도운 사건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르밧은 시돈(페니키아 제국의 도시국가) 지역에 있는 마을입니다(왕상 17장). 또한 신약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수로보니게는 시리아 페니키아를 합성한 한글 번역입니다(막 7:26). 복음이 유대 땅을 넘어 이방의 땅인 페니키아 지역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2) 구브로는 지금에 키프로스 혹은 사이프러스(Cyprus)입니다. 구브로는 터키의 남쪽, 시리아와 레바논의 서쪽, 이스라엘의 북서쪽, 이집트의 북쪽, 그리스의 남동쪽에 위치한, 지중해 동쪽의 섬입니다. 지금의 구브로는 단일 독립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서로 앙숙인 그리스인과 터키인들이 섬을 양분하여 살고 있습니다.

 

(3) 본문에 언급된 안디옥은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오론테스 강변에 위치한 시리아의 안디옥은 후에 “기독교의 요람”으로 알려집니다.

 

종합하자면, 복음은 핍박으로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자들”의 어깨에 실려 성령의 바람을 타고 이스라엘의 지중해 연안 도시인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다시 가이사랴에서 해변을 타고 북상하여 페니키아(베니게)와 서쪽 지중해 섬인 구브로, 그리고 다시 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시리아 안디옥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로 인해 “흩어진 자들”이 참으로 멀리까지 날려 온 것입니다. 아마 그들 대부분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안디옥에 왔을 때 이미 그곳에는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시리아 안디옥은 로마제국의 도시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어(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문화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언어인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고 그 때문에 복음 전파는 오로지 유대인들을 상대로 했습니다. 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파했는지는 추측할 뿐입니다. 언어장벽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효과적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 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흩어진 자들은 그곳의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몇몇 사람들이 시리아 안디옥에 왔다는 것입니다. 구브로는 앞서 소개한대로 동 지중해의 큰 섬입니다. 반면에 구레네는 지중해에 접한 북 아프리카(지금의 리비아) 지역입니다. 그곳에도 이미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구레네하면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갔던 구레네 출신 시몬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태 27:32; 마가 15:21; 누가 23:26).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몇몇이 “헬라인들”에게도 주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이라기보다는 인종적인 헬라인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여 복음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인종적 장벽을 허물고 모두에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행전 2장의 유대인을 위한 오순절 성령강림과 행전 10장의 이방인을 위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백성의 모습이 나오듯이, 오늘의 본문에서도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흩어진 자들의 헌신과 열정에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 예수께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21절)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파송하다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 복음 전파에 대한 흩어진 자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열정에 대한 소식이 다시 바람을 타고 예루살렘 교회까지 들려오게 됩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는 복음 확산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대표를 파송하기로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심사숙고 했을 겁니다. 누가 적임자인가? 누가 그곳에 가서 사람들을 격려하고 복음의 증진을 권면할까? 그들이 선택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이미 4:36-37에는 바나바에 관한 보고가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이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기에 그 쪽 지역 정서를 잘 알았을 것이고, 또 그가 만날 사람들도 동향인들인 관계로 교제하기도 쉬울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택받아 파송된 결정적 자격요건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인물됨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24절) 이런 묘사는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 지도자들의 영적 품성과 흡사합니다.(6:5)

 

그가 안디옥에 가서 권면한 내용을 보면 그의 이름(위로의 사람)에 딱 맞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시오!”라고 권면하였다는 것입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권면입니다. 먼저 “굳건한 마음”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마음의 목적”입니다. 신앙의 길에 들어와 마음을 두기로 한 것을 가리킵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기로 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기로 한 것입니다. 일편단심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변치 않고 끝까지 주님이신 예수님께 헌신과 충성을 바치라는 권면입니다. 그게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는 뜻입니다.

 

안디옥에서 다시 해안을 타고 북서쪽으로 가면 “다소”라는 지역이 나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사울을 찾으러 나섭니다. 다소는 사울이 태어난 고향입니다. 근데 왜 사울이 고향 다소에 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추측하건데 개종하고 회심한 후에 사울은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첫 번째 복음전파 노력과 설교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심한 박해를 불러왔습니다. 이 내용은 사도행전 9장에 자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죽음에 몰리자 사울은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 야반도주해야했습니다. 참으로 굴욕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게다가 갓 개종한 사울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의심의 눈초리가 많아졌습니다. 이에 대해 사울은 기를 쓰고 해명해야했습니다. 또 다시 심기일전하여 복음 전파에 애를 쓰지만 그를 죽이려는 세력들이 도처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신앙의 형제들이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시 다소로 보냈던 것입니다.(9:30)

 

아마 상심한 채로 고향에 은둔해 있었나 봅니다. 첫 열정이 사그러드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위로와 권면과 격려가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간 것입니다. 정말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낙심한 사람을 격려해주는 사역,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가는 헌신, 넘어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워 부축해서 같이 걷는 사람. 이런 사람과 사역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의 인품과 영성이 돋보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위대한 사울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열정적인 사울의 뒤에는 조용한 바나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소의 사울을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데려옵니다. 둘은 일 년 내내 함께 교회에서 만나 큰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공동사역이었습니다. 누가 당회장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교회의 대표인가는 하찮은 문제였습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에 큰 울림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복음의 전초기지가 안디옥입니다.

 

안디옥 교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일 년 내내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은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들은 예수쟁이들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들은 그리스도쟁이들이었습니다. 안디옥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을 보면서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예수쟁이!”라고.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믿고 따라는 추종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호칭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붙여준 호칭입니다. 그들이 박수치면서 붙여준 호칭이든 아니면 빈정대는 투로 붙여준 호칭이든 상관없습니다.

 

“안디옥에서 비로소~”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우리의 삶이 안디옥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직장과 가정과 학교와 일터가 안디옥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관계들이 안디옥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곳에서 인종적 지역적 신분적 장애와 경계들이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사울과 바나바의 협력과 상생과 격려와 화평의 꽃들이 만발하는 우리의 안디옥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구제헌금을 들려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보내는 안디옥의 선교적 교회이기를 바랍니다(30절). 무엇보다 안디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일편단심으로 하나 된 그리스도인들의 지상적 주소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6절)

 

[생각해 봅시다]

 

1. 사도행전에서 “흩어진 사람들”이란 용어가 주는 뜻을 다양하게 설명해보세요.

 

2. 사도행전을 읽고 배우면서 지리와 지명을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요? 베니게, 구브로, 구레네, 안디옥을 지도에서 찾아보세요. 성경지도를 한 권 정도 장만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인터넷을 통해 관련된 지리에 관한 자료화면을 찾아보면 좋을 것입니다.

 

3.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관계를 본문은 어떤 방식으로 보여줍니까? 이것은 “교회의 일치”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일까요(참조, 22절)

 

4. 바나바라는 사람의 영적 성품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특별히 다소 출신의 바울과 구브로 출신의 바나바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5.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해보세요. 어떤 상황에서 그 호칭이 유래되었나요? 여러분은 그 호칭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6. 안디옥에서 비로소~”라는 문구로 다양한 문장을 만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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