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신학함의 의미와 목적”

 

류호준

 

 

 

오래전 나의 신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들려주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교의 신학자로서 그분은 40년 이상을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신 분이시고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연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학자이다. 자신의 신학 하는 일의 의미와 목적을 이야기하면서 말미에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학문의 세계에서 명예와 평판을 얻어 유명해지기보다 무명하더라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신학자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야기의 의미는 분명했다. 신학자건 신학도건 신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순히 학문적 업적과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교회를 위한 신학”이다.

 

현대 서구 신학계를 둘러보면 신학의 학문성 진보를 위한 노력이 여간이 아니다. 특별히 학문 연구기관인 대학 안에서 신학이 한 분과를 자리 잡으면서 치열한 경쟁에 조인하게 되었고, 과학으로서 학문이란 기조아래 신학도 이성의 철저한 조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신학의 기준이며 표준인 성경마저도 인간 이성의 성역 없는 조사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데카르트 이후 계몽주의의 지배아래 모든 것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의심하는 자신마저도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것 하나도, 어떤 진리 하나도, 어떤 전통하나도, 어떤 권위 하나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거나 인정받는 일은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철저한 이성의 비판과 조사의 대상이 되었고, 여기서 성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어떤 철학자들은 신학을 순수이성 너머 다른 ‘방’에 잘 모시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사실은 논리의 필연성 때문에 편의적으로 그렇게 하게 된 결과였다. 어쨌든 철저하게 조사하려는 자아와 인간 이성 자체가 정말로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1980년에 들어와 서구의 주류 신학계, 특별히 주류 성서학 분야에 잔잔한 파도가 치기 시작하였다. 지금 와서 보면 매우 획기적인 사건으로 회상될 수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저 주목할 만한 시도였다. 예일대학교의 신학부의 구약학 교수인 차일즈가 구약 총론을 저술하면서 붙여진 제목(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1979) 때문이었다. 의도성이 있는 제목이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성경을 단순히 지적 호기심이나 학문적 발견이나 성취를 위한 필요한 자료나 도구로서 사용하지 말고 지난 이천년 이상 존속해오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경전’(성경)으로 인식하라는 제안이다. ‘성경’(聖經)을 단순히 인간 이성의 조사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이성에게 말씀하시는 ‘주체’로서 경(經)으로 공부한다는 말이다. ‘경’(經)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를 요구한다. 성경에 의해 마음의 습관과 세계관이 다듬어지고 만들어져 가는 것이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경을 조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일이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 하는 첫 걸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금번호의 특집 주제는 매우 도발적이고 명제적인 선언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절대적 진술로 읽혀질 것이 아니라 도전적 수사학적 진술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달리 말해 “신학이 학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하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강력한 진술이다. 그리고 이런 선언이 있게 된 한국의 신학적 풍토와 교회적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본지에서 김진섭 교수는 “신학이 학문이 아니다.”는 명제가 태동하게 된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할 뿐 아니라 신학활동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신학사의 포괄적 흐름 가운데서 명쾌하게 보여준다. 특별히 죄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는 인간 이성의 한계와 제한성을 설파하면서 신학 함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점은 중요한 공헌이다. 장동민 교수는 구약 이사야서 안에 나오는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신학 함’과 ‘신학도 됨’의 의미와 목적을 살핀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하는 자들, 즉 신학함의 자세는 “받아들임”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이 세상을 향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찬호 교수의 논문은 그 영어 제목이 함의하듯이 “오로지 일개의 학문으로만 신학 작업을 할 때 오는 성공과 실패”를 철학적 신학자의 눈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신학함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어야 한다. 그 생명이 소위 한 개인의 영적생명이든, 혹은 교회적 생명이든, 혹은 피조세계의 회복을 말하는 생명이든 모든 것(萬有)의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고 회복되고 통일되어야 한다. 신학자와 신학도와 목회자들은 생명회복 운동에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상아탑의 굴레에서 벗어나 교회와 세상과 온 피조세계를 위해 일해야 한다. 신학은 단순히 학문이 아니다. 신학은 생명의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온 천지에 현시되도록 봉사해야 한다. 신학저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을 다방면에서 알아가기를 바란다. 이것이 새로 취임한 편집인의 기도요 바람이다.

 

 

 

[백석신학저널] 2011년 봄호(6월에 간행)에 실리는 편집인의 권두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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