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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에세이: "하나님이 분노하실 때"

2011.05.27 17:57

류호준 조회 수:9000 추천:1

“하나님이 분노하실 때”

 

류호준 목사

 

 

하나님은 사람처럼 질투하시고 분노하시는가? 그렇게 하신다면, 왜 하시고 언제 하시고 어떻게 하실까? 질투나 분노는 사랑이나 긍휼처럼 매우 인간적인 정서입니다. 이런 정서가 없을 때 “무정하다” “비정하다” 혹은 “차가운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인간관계만 보더라도 서구는 법이 우선합니다. 시부모나 시동생들, 시댁 식구를 가리켜 “in-law"라고 합니다. 법적으로 연결된 관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양 문화권에서, 특별히 한국에서는 정(情)을 매우 중요시 합니다. 오죽하면 부부지간을 말할 때도 “사람이 (서양식)사랑으로 사는가? 그놈의 정 때문에 살지!”라고 합니다. 아마 한국인들의 정서에만 있는 특이한 문구인 듯합니다. “미운 정 고운 정”이란 말입니다. 정이면 정이지 뭔 미운 정 고운 정인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단련된 관계라는 뜻일 겁니다. 사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본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묘사하거나 표현할 때 혹은 그분과의 관계를 말할 때 히브리인들은 법적인 용어보다는 정서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 사실은 특별히 한국의 신학계가 서구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매우 철학적이거나 개념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좋은 보완책 내지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 분노하실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하나님의 명예와 평판이 더럽혀질 때”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명예, 평판과 관련이 있는 단어로 그분의 ‘이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중 제3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그 이름은 곧 평판과 명예를 가리킵니다.

 

오래전 제가 미국에서 박사과정에 진학하려고 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제가 다녔던 미국 신학교의 선생님에게 추천서를 부탁했습니다. 한참 후에 지원한 대학에서 입학 허락을 받았고 며칠 후에 추천서를 써 주셨던 교수님으로부터 축하의 편지도 받았습니다. 그 편지의 끝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공부할 때 자네 혼자 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공부하는 것일세. 그곳에 가면 자네는 내 제자로서 공부하는 것이야.”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잊어버릴 수 없는 문구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Don't put my name down!” 아이고! 이게 웬 말입니까? 뜻을 살려 번역하자면 “내 이름에 먹칠하지 마라!”라는 것이겠지요.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갖는 사항 중의 하나가 자신의 명예와 평판과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정(不淨)과 정결에 관한 일에 관심이 많은 레위기나 제사장 출신의 예언자가 기록한 에스겔서가 이 사실을 그 어느 성경보다 잘 증언해 줍니다. 레위기의 경우는 하나님의 거룩성이 훼손되는 일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수많은 제사법에 관한 구절들은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평판과 그분의 신성과 위엄이 침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제정하신 방식대로 예배를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출애굽기에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성막 건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법을 어겼을 때 하나님이 분노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뜻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에 대한 나쁜 행실에 관한 논평에서 사무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 2:17) 이어지는 엘리 가문의 비극은 하나님의 명예와 이름이 무시되었을 때, 아니 노골적으로 그를 조롱하고 멸시했을 때 따라오는 자동적인 결과들이었습니다. 우리 사람도 무시당하면 분노하듯이 하나님이 일개 피조물에 의해 무시당하신다면 그냥 넘어가실 리가 있을까? 우리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서의 경우,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문구가 자주 등장합니다. 일명 여호와의 “자기 현시(顯示) 공식” 어구라고 합니다. 이 문구는 특별히 유다의 심판과 관련하여 또한 열방심판신탁에 관련하여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과 회복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언약백성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시는 자기의 구원역사를 하나님의 자기 현시로 규정하면서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징적인 사실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하나님의 분노의 표출인 심판 가운데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가르침을 우습게 여겼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분노하셨고, 그 분노는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하는 일로 결말지어졌는데,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 되심과 주권을 만천하에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패역한 자와 내게 범죄한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 것이다. 그들을 그 우려하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겔 20:38)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의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시의 평행법을 사용하여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에 대한 간구입니다. 주기도문의 첫 세 가지 간구들은 사실상 히브리시적 평행반복 어구입니다. ‘이름’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평판’과 ‘명예’, ‘나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뜻’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계획’이 서로 융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문의 핵심은 하늘에서는 세 가지 간청내용이 모두가 실현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 땅에서는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탄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요즈음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교단적으로, 교회연합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고 그분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 뒤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세속주의, 교권주의, 개교회주의, 예능화되어 가는 교회, 자기중심적 신앙 행태들, 물신 숭배적 기복신앙, 각종 단체장에 이름을 올리는 일을 무슨 가문의 영광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단세포적인 목회자들 등 하나님의 명예와 위엄을 경시하고 훼손하는 일이 없는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잘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존재감을 상실한 교회가 되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그런 하나님을 “가벼워진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길 때

 

하나님은 언제 분노하시는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길 때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말할 때는 언제나 이스라엘 사회에 있었던 두 가지 죄를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는 우상숭배요 다른 하나는 불의(不義)한 행동과 삶이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요, 후자는 동료 인간을 향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불가분리의 문제입니다. 정의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일이 없고,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삶은 언제나 정의로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우상숭배를 종종 불륜(不倫)에 비유합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언약을 맺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부부지간에 비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혼 은유를 가장 많이 사용했던 예언자로는 호세아, 예레미야, 에스겔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출애굽 한 후 시내산 밑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자기 마음대로 다른 신들을 찾아다녔던 이스라엘의 행보를 지조도 정조도 없는 천박한 여인에 비유했습니다. 때로는 그들을 창녀보다도 더 못하다고 심하게 질타했습니다.

 

언약백성 됨의 근본은 한 분 하나님만 섬기고 그분만을 따르겠다는 것 아닙니까? 마치 결혼식장에서 우리가 종종 듣는 결혼서약문 가운데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잘 살 때나 가난할 때나, 비 올 때나 햇빛 비칠 때나, 마침내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겠습니까?”라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이런 사랑에 대한 헌신을 가리켜 히브리어로는 ‘헤세드’라고 합니다. 언약적 사랑입니다. 한글 성경은 ‘인애(仁愛)’, '사랑', '자비' 등으로 번역합니다. 한편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는 이 단어를 ‘견고한 사랑(steadfast love)’, 혹은 ‘실패하지 않는 사랑’ 혹은 ‘끊임없는 사랑(unfailing love)’으로 번역하여 좀 더 그 의미를 잘 반영합니다.

 

우상숭배 행위는 배도(背道)입니다.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가는 것이 배도입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라는 배도는 단순히 종교적 행위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는 행위만을 가리켜 우상숭배라 하지 않습니다. 미개했던 고대인들은 그런 미신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분노하게 했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는 좀 더 미묘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우상을 숭배합니다. 바로 재물과 지혜와 힘(렘 9:23)입니다. 그것들이 자기를 충족시켜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에게서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환영(illusion)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지혜, 힘 그리고 부는 무엄하게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호적수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상숭배 행위들에 분노하실 것은 당연합니다.

 

예언서에서 예언자들이 우상숭배라고 질타할 때는 종종 두 가지 경우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일차적으로 우상숭배는 당시 가나안의 토속적이고 미신적인 종교였던 바알제의를 가리켰습니다. 바알종교는 일종의 풍산(豐産)종교였는데,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바알종교는 근본적으로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종교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남성의 정자와 같고 대지는 여인의 자궁과 같아서 풍요로운 수학을 얻으려면 넉넉한 비가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알종교는 바알이 비와 폭풍과 번개의 신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바알에게 제사 드리고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면 풍성한 추수를 얻게 된다는 자연주의적 종교였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건강과 번영의 복음’을 파는 종교였습니다. 확대하여 말하자면, 다른 신들과 세력들이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보장한다고 할 때, 혹은 궁극적 도움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에게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이런 자연주의적 종교를 보고 좋아하실 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바로 이런 데서 출발합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가 누구인지, 누가 비를 내리고 누가 복을 허락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타오르는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상숭배는 종교적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들이 우상숭배를 질타하는 또 다른 경우는 정치적 영역을 가리킬 때입니다. 달리 말해, 이스라엘의 왕들이 그들의 나라를 이끌어갈 때 종종 주변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분명히 나라들의 창조자요 역사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지만, 또한 그렇게 배워 왔지만 강대국들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자 그들은 하늘을 쳐다보는 대신에 주변국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북쪽의 아시리아와 바벨론의 위협이 있을 때 애굽으로 도움을 청하러 가고, 애굽이 위협적 세력이 되면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에게 붙으려 했습니다.(예, 호 7:11) 정략적 결혼도 그런 예들 중의 하나입니다. 예언자들은 이런 정치적 행태를 가리켜 우상숭배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본질적인 문제는 누구에게 궁극적 충성을 바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나라와 민족과 역사의 키를 잡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누가 인봉된 역사의 두루마리를 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계 5장).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고백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분노를 초청하였고, 그 분노는 자연재해나 염병이나 적국의 침입 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조작하거나 이용하려 들 때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조작하려 들 때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웃사 이야기입니다(삼하 6장). 삼십 년 전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포획했을 때, 그들은 언약궤를 수레에 실었습니다. 아마 행운이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부적같이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가 그들에게 슬픔과 골칫거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수레에 실으려는 일은 것은 언제나 좋지 못한 계획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대박을 터뜨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손에 하나님은 결코 잡히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블레셋인들이든, 이스라엘의 기름 부음받은 왕이든, 우리 시대의 정부들이든, 혹은 우리가 하나님을 내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러분이나 저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용당하지도 않을 것이며 포획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래전에 블레셋인들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던 계획을 겁니다. 언약궤의 송환 도중 웃사가 즉사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을까? 왜 하나님은 언약궤의 귀환이라는 장엄한 행렬에 분노하셨을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분노하시게 된 것은 다윗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갖고 있었던 마음의 성향, 마음의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다윗은 그가 세운 새로운 수도 다윗 성에서 한번 멋지게 나라를 통치하고 싶었습니다. 언약궤의 귀환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행사를 통해 다윗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언약궤의 귀환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그는 언약궤를 조작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조작하여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하는 일이 어찌 다윗에게만 국한되는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다윗에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웃사에게 더 분노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웃사는 하나님을 수레에 안전하게 모시고 하나님을 자기방식대로 보호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을 수레 위에 만든 박스 안에 안전하게 묶어 둘 수 있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이 구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웃사든 혹은 오늘날 교회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계획 안에 집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박스 속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 놓은 그 박스들이 무엇이든지 - 학문, 자신의 프로젝트, 고정관념, 신학적 판단 등 - 간에 하나님이 잘 들어맞지 않으면 여러분은 실망할 겁니다. 아니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사회적 불의가 만연할 때

 

하나님은 언제 분노하시는가? 역사서와 예언서를 놓고 볼 때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심판을 내리실 때는 자기의 언약 백성들의 삶 속에 불의가 가득할 때입니다. 달리 말해 정의롭지 못한 행위들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만연할 때 하나님은 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회적인 불의는 언제나 종교적 열정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그러진 신앙 행태가 만연했습니다. 종교에 몰두하고 교회생활에 열정적이면 비록 일상의 삶에서 불의한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봐주실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종교의 영역에 가두어 놓은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생활의 센터인 성전에 대한 그들의 애착은 가히 맹목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의 유명한 성전 설교(렘 7장)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외형적인 예배행위나 제사의식, 혹은 성전에 대한 맹목적 신뢰, 광적 믿음이 당신들을 구원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위가 뒷받침되지 않는 종교, 윤리와 도덕이 따르지 않는 제의, 정의와 공의가 기초가 되지 않는 예배는 자기기만이며 인권침해며 궁극적으로는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촉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외침은 한마디로 삶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문제의 대상은 단순히 종교적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종교적 영역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오늘날의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은 하나님을 종교적 영역에 제한시키어 가두어 놓고, 온갖 뇌물성 예물들을 그분에게 바치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의 환심을 뇌물로 살 수 있다는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를 단순히 옛날이야기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이 그렇게도 기름진 것에 걸식이라도 들렸던 적이 있는가? 이사야 선지자도 종교제의에 집착하면서도 실제적인 일상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비아냥거리며 외칩니다. “무수한 제물들이라고 그것이 도대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나는 너무도 많은 제물들에 배불렀다. 나는 수송아지, 어린 양, 그리고 숫염소들의 피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마라. 분향은 내가 가증스럽게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1-14) 그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5-17)

 

그들은 적어도 제사의식, 종교예식의 본질과 그 의미를 잊어버렸습니다. 제사의식과 각종 종교집회의 목적은 의로우신 하나님, 거룩하신 그들의 주님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들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였고, 그들의 주머니에는 떳떳하지 못한 돈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그들은 정의로우신 하나님께 나올 수 있었단 말인가요? 그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 영적 예민성과 도덕적 불감증에 걸린 중환자들이었던가, 아니면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이 마음이라던 예레미야의 탄식을 증명하기라도 할 살아 있는 증거물들이었던가? 아니 그들 눈에 비친 하나님은 뇌물과 예물과의 차이도 구별 못하는 신이었단 말인가?

 

문제는 그들의 터널비전에 기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과 다스림을 바라볼 수 없었던 그들의 좁은 시야 때문이었습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들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무엇을 그들의 백성들에게 바라시는지를 명쾌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인애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으며, 번제보다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바란다.”(호 6:6) “사람아, 착한 것이 무엇인지 그분이 너에게 이미 보이셨도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과 자비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리고 겸손히 너의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미 6:8)

 

정의와 공의를 상실할 때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 학교, 직장, 사업, 정치, 경제, 문화, 인간관계 등 - 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우심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찾아오심’의 궁극적 목적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분노의 표현으로서 ‘심판’을 이야기할 때 종종 사용되는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파카드’라는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찾아오다’, ‘방문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경우 즉 “하나님께서 방문하시다”로 번역이 되는 경우, 달리 말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찾아오시거나 방문하실 때는 그냥 심심해서 옆집에 마을을 가듯이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문은 언제나 목적이 있습니다. 심판하시기 위한 방문이거나 돌보고 위로해 주고 싸매 주시기 위한 방문입니다. 첫 번째 의미의 방문 즉 심판하러 오실 때가 곧 자기의 분노를 쏟아 붓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저명한 구약학자인 아히히로트(W. Eichrodt)는 말하기를 “분노는 결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속적인 속성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지 못합니다. 진노는 단지 말하자면 언약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과의)교제에 대한 의지에 달린 각주(footnote)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백성과 진정한 사귐을 갖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약도 구약처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종말론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살전 1:10; 5:9; 롬 2:8; 3:5; 5:9).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義)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미워하고 불쾌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다른 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해 “그건 아니거든!” 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NO!"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에 의해 거절될 때라도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으로 남아 계신다는 증표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노는 ‘의(right)와 공의(justice)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형벌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본래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부차적인 의도로 죄인을 개심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범죄를 방지하고 억제하는 데 기여합니다. 부차적인 의도를 좀 더 확대하여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자녀와 백성을 회복시켜 살리려는 목적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집을 뛰쳐나간 탕자의 귀가를 독촉하는 채찍질이며 그의 영혼에 찌든 더러움과 죄들을 불태워 정련하는 도구가 됩니다. 시편의 한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를 회고적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 당신의 분노는 잠깐이지만 당신의 은혜는 평생입니다.”(시 30:5)

 

 

[그말씀] 7월호에 실리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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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신학 에세이: “예언자들의 소명과 우리의 소명”(그말씀 12월호 게제) 류호준 2010.11.09 34307
277 로마서 묵상(26): “하나님 도와주세요!” file 류호준 2010.11.03 20374
276 로마서 묵상(25): “넉넉한 용돈과 해야 할 일들” 류호준 2010.10.13 14824
275 설교: “환대의 향기” file 류호준 2010.10.11 20122
274 로마서 묵상(24): “제발 싸우지 마!” file 류호준 2010.10.06 18091
273 로마서 묵상(23): "“입 다물고 있어! 웬 말대꾸야?” file 류호준 2010.09.29 17085
272 설교: “하나님의 일등석” [1] file 류호준 2010.09.26 15836
271 설교: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는 것” 류호준 2010.09.23 21089
270 설교: “성경의 기본적 가르침으로 돌아가시오.” 류호준 2010.09.12 10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