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재앙과 심판은 함수관계인가?”

류호준 목사

 

 

신정론(神正論)

 

신학자들은 이 세상에 발생하는 불행들과 악들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그 문제를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정의(正義, Justice)에 관해 던지는 질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정의로우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악이라는 것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악이란 도덕적 악들 뿐 아니라 자연재해와 같은 불행들도 포함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악들에 대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종종 악한 사람들은 번성하고 착하고 신실한 사람들은 고난의 풀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불행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안에 미끄러져 나온 것들인가? 달리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정말로 통제하시고 통치하시고 계시는가?”(神政論)라는 고민스런 질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우리 전(前)시대에 유럽대륙에서 일어났던 인류역사상 최악의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유대인 대학살(Holocaust) 말입니다. 독일 나치 정권의 히틀러는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단순히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했습니다. 그중 150만 명 이상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독일 다카우(Dachau)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Auschwitz)의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와 고문실과 독 가스실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영화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알려진 캄보디아의 내전으로 폴 포트 정권은 자국민 2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도덕적 악의 극한 과시였습니다.

 

2002년 성탄절 전야에 전 세계의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산타클로스와 휘황찬란한 쇼핑몰의 도움을 얻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전무후무한 대 해일(쓰나미)이 인도네시아 해안을 강타했습니다. 20만 명 이상의 사람 목숨을 탈취해 갔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008년도에는 동남아시아의 빈민국 미얀마에서는 적어도 20만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의 이재민을 낸 사상 최악의 사이클론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인간의 작은 두뇌로 어떻게 소화해 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해 5월, 중국 쓰촨 성 대지진으로 알려진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일어났습니다. 리히터 규모 8.0의 대지진이 발생하여 사망자만 7만 명에 이르렀고 실종이 약 1만 8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글을 쓰고 있는 현재 이웃 일본에서는 리히터 규모 9.0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가히 피해를 측정할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지 실황 중계를 보듯이 우리는 무서운 속도로 밀려들어오는 바닷물과 무력하게 지푸라기처럼 쓸려 내려가는 장난감 같은 차량들과 가옥들과 가축들과 사람들을 화면을 통해 목격했습니다. 그 후 후쿠오카 지방의 무너진 원자력 발전소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들과 방사능의 유출 공포는 우리가 더 이상 안전지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소박한 사실을 재 확인시켜 주고 있을 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천재지변 혹은 자연재해라고 불리는 무시무시한 재앙들입니다. 괴물 같은 자연재해 앞에서 우리는 무력하게 넋을 잃고 쳐다볼 뿐입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할 말을 잃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위험천만한 세상 안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질지 모르는 지뢰밭 위에서 광란의 춤을 추는 어리석은 자들이 우리 인간들일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크리스천들로서 우리는 이런 일들(자연재해)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할까요? 아마 완벽한 이해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청동거울(銅鏡)로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일뿐입니다(고전 13:12). 어떤 분들은 자연재해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우상숭배를 많이 하는 이교도 나라들에 퍼붓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비극이나 자연재해의 피해자가 모두 우상숭배자는 아니거든요? 인재(人災)든지 천재(天災)든지 모든 재앙과 불행이 그 불행의 피해자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단세포적인 사고발상입니다.

 

물론 인간의 타락이후로 세상과 피조세계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샬롬의 세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재를 포함하여 자연재해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반역한 인류가 초래한 불행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재해는 누구 한 사람이나 한 부족이나 한 국가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인류가 함께 짊어져야하는 공동의 죄 값인 것입니다.

 

그러나 재앙을 당한 사람이나 국가를 가리키며 “당신들은 지금 죄 값을 받고 있는 것이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으니 빨리 회개하라!”라고 한다면 하나님도 기가 막혀 “너도 한번 맛 좀 볼래!” 하실 찌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 주위에 그런 불행이나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있거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인종과 종교와 성별과 신분에 상관없이 그들을 보살피고 도움의 손길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인도주의적(人道主義的, humanitarian) 도움은 언제나 기독교인들이 앞장 서야 합니다. 끈이 달리지 않는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필요한 것이지 빠진 이유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구약의 욥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어째 그런 비극적인 일이 그처럼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섬뜩하고 고민스런 질문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욥 1:1)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코스가 그렇듯이 전혀 예기치 못한 재앙이 그와 그의 가족을 덮쳤습니다. 평생 모은 재산과 수많은 관리인들과 하인들을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그런 비극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비보가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열 자녀들과 그들에게 속한 온 가족들이 한 곳에 모여 파티를 하고 있을 때 태풍이 집을 덮쳐 일가족이 몰사했다는 비보였습니다.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욥기는 ‘흑야’(黑夜)의 이야기입니다. 앞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아무런 빛도, 걸어가야 할 어떤 길도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는지 의심스런 세상입니다. 악독한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나마 그럴 것이야 라고 생각이라도 하겠지만 이건 아닙니다.

 

게다가 욥의 주변에는 그런 재앙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욥의 친구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융통성 없는 교조주의자(敎條主義者)들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들은 친구 욥의 곤경과 비참을 위로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착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요즘 그런 친구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친구의 불행에 대해 신학적 해석을 내리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중요한 신학적 질문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친구 욥에게 내린 자연재해는 무슨 의미일까?” “세상에 우연은 없을 것이야. 그렇다면 욥에게 온 재앙들은 욥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죄)가 있기 때문일 거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야!” 그들이 갖고 있던 신관(神觀)의 자연스런 표출이었습니다. 이즈음 되었을 때 그들은 친구의 결백을 옹호하기 보다는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옹호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매우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천히 변신론(辯神論)자들로 변신(變身)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에 일어나는 재앙과 불행은 반드시 죄를 지은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친구 욥에게 회개하라고 윽박지르게 됩니다. 그들의 신학적 논리는 욥의 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잔인스런 공격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홍위병(紅衛兵)이 되겠다는 열심당원들이었습니다.

 

고통에 참여하는 길

 

지진, 해일, 화산폭발, 홍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는 인류 역사의 초기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인간은 가공스런 자연재해의 위력 앞에 ‘인간 됨’의 한계와 조건, 즉 흙으로 지음 받은 연약한 존재(mortal being)임을 절감할 뿐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그들에 대한 정죄나 신학적 판단을 내리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재난의 현장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고통하며 신음하고 절규하고 있는 수많은 동료 인간(이웃)들을 위해 말없이 애틋한 도움의 손길을 펴는 일입니다. 이것이 ‘긍휼’(compassion)의 참뜻일 겁니다. ‘함께(com) 고통(passion)’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됨의 비참함을 친히 겪으시고 함께 고통에 참여하셨던 것(성육신) 처럼 말입니다.

 

누가복음 13:4-5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곱씹어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시 발생했던 유명한 시사적 사건을 들어 회개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심판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거든!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생각해 봅시다

 

깊이 있는 토론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입니다.

 

(1) 재앙과 불행들이 모두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들인가? 대답이 ‘예’라면 그 이유는 뭐고,

      ‘아니오’라면 어떤 이유 때문인가?

(2) 자연재해 앞에서 우리 인간이 겸손해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3)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연구하여 인류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크리스천) 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보시오.

(4) 재난지역 구호를 포함하여 피조세계의 회복을 위해 우리 크리스천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개인적인 차원과 지역교회 차원과 교단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말해

      보시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류호준 2020.08.24 4725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936
» 신학 에세이: “재앙과 심판은 함수관계인가?” 류호준 2011.04.02 16495
28 신학에세이: "설교와 목회자" file 무지개 2005.11.23 16679
27 로마서 묵상(23): "“입 다물고 있어! 웬 말대꾸야?” file 류호준 2010.09.29 17074
26 신앙교육(3): "창조신앙이 왜 중요한가?" 류호준 2008.11.16 17345
25 신학 에세이: "성경읽기와 성경해석" file 류호준 2011.02.03 17423
24 설교: “나는 나다!” 류호준 2010.06.29 17428
23 “참말이여!” 유감 [1] 류호준 2014.04.04 17762
22 로마서 묵상(24): “제발 싸우지 마!” file 류호준 2010.10.06 18064
21 출애굽기 4장 해설 류호준 2009.01.10 18165
20 번역에세이: 희망 (바라는 것) 류호준 2007.12.07 18690
19 신학 에세이: "겸손과 교만과 정의"(그말씀 3월호 게재예정) 류호준 2011.01.20 18862
18 일상 에세이: “친구 하덕규 이야기” [4] file 류호준 2011.01.09 19456
17 “희망 없이는 살 수 없어요!”(묵상의 글) [2] 류호준 2008.02.19 19547
16 신앙 에세이: "버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6] 류호준 2008.08.12 19604
15 설교: “거인을 죽이는 강심장” file 류호준 2010.12.05 19678
14 설교: “환대의 향기” file 류호준 2010.10.10 20085
13 강해논문: "예레미야의 새 언약" (렘 31:31~34) file 류호준 2006.05.21 20311
12 로마서 묵상(26): “하나님 도와주세요!” file 류호준 2010.11.03 20348
11 회고 에세이: " “쓰지 말아야 했던 편지” [7] file 류호준 2010.07.23 20834
10 설교: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는 것” 류호준 2010.09.23 21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