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출애굽기 3장 해설

2009.01.10 12:17

류호준 조회 수:16419

 출애굽기 3 장

 

[1-6절]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세가 미디안 지역에 거주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의 일과는 장인의 양떼를 치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미디안 족은 구리 광산업이나 대장장이들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목축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내레이터는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고 보고 한다. 호렙산은 시내산의 또 다른 명칭이다.1) 호렙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부름으로써 내레이터는 모세에게 무엇인가 범상치 않는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한다. 호렙 산을 하나님의 산으로 부른 이유는 그 산 자체가 신성한 산이었다기보다는 후에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또한 한참 후에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곳이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폐허’라는 뜻을 지닌 호렙에서 새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나님의 산 호렙’이라는 말로 서두에서 알림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한다. 호렙의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전통적인 위치인 시내반도 남단이 가장 유력하다. 성경의 전통도 시내산의 정확한 위치에 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스라엘은 시내산이 가나안의 남쪽 어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도우러 오실 때 바란 광야나 세일 지방, 아니면 막연하게 남쪽 그 어디에 있는 산들에서 오신다고 묘사하고 있다(신 33:2). 이러한 표현은 가나안 족들의 견해와 정면으로 대조되는데, 그들은 아득한 북쪽 산(‘짜폰’)에 신들이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2) 본문에서 모세는 호렙산이 하나님의 산인 줄을 알고 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양 무리를 돌보기 위해 간 것이었다.

 

 

하나님의 메신저가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타나심(theophany)을 가리키는 용어로, 보통 사람의 형체로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불의 형체 가운데 나타난다. 불은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더러운 것을 태워 정화하거나, 어둠을 비춰 조명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매우 강력한 능력과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을 상징하기도 한다.(참조, 창 15:17; 출 19:18; 신 4:24; 시 104:4; 겔 1:27).

 

 

일상의 삶을 영위하던 모세에게 매우 비범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양떼를 먹이고 초원을 찾아야 하고 들짐승에게 공격을 받지 않도록 보살펴야하는 매우 일상적인 일과 중에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의 형상 가운데 그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모세는 가까이 가서 사태를 살피려 하였다. 그러자 불꽃 가운데서 모세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브라함(창 22:1), 야곱(창 31:11), 요셉(창 37:13), 사무엘(삼상 3:4,6,8)을 부르실 때처럼 하나님께서 긴급히 모세를 부르시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비로소 모세는 그가 거룩한 면전에 서있게 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신성의 현존 안에 서 있는 모세는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된다. 먼저 우리의 관심은 불에 붙었으나 타버리지 않는 떨기나무에 관한 것이다. 이 사건은 모세를 비롯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위해 놀라운 표적(sign)을 보여주셨다. 불에 붙었으나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였다. 하나님의 ‘현존(現存, Presence)’이라는 가시적 징조였다. 하나님은 불 가운데 현존하셨다. 불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모세는 분명히 보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료하였다. 이스라엘의 고통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상징이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보여주셨다. 이 폐허의 산에도 계신다! 이방의 영토가운데서도 계신다! 도저히 하나님이 계실 곳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그런 장소에도 하나님은 현존하신다! 특별히 그분은 이스라엘의 고통 속에서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다. 자신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고통을 지나쳐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들의 부르짖음 속에 거하시고, 그들의 절규 안에서 고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비천한 나무, 불에 타버리면 재로 휘날릴 수밖에 없는 나무, 그 나무 안에 거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한다. 더욱이 놀랄만한 징조는, 결코 그 나무는 불에 태움을 당하나 타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스스로 태움을 당하나 타지 않는 나무로서 서 계신 하나님, 그분이 있기에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분 자신이 스스로 고통당하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그분은 기꺼이, 자발적으로 고통 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고통 속에서, 우리의 울부짖음 속에서 함께 통곡하며, 절망하며 절규하는 분이시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의  믿을만한 친구요, 남편이요, 아버지요, 하나님이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모세에게, 아니 ‘모세 안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궁극적 승리와 미래를 보여주신다. 불이 붙어도 결코 불에 타 버릴 수 없는 생명,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생명을 누가 감히 태울 수 있단 말인가! 이스라엘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 사실을 매우 강력한 어조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고후 4:8-9). 왜냐하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모세와 불에 타는 떨기나무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본문은 하나님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날이었다. 모세는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결코 타지 않는 한 가시덤불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기이한 광경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는 놀랐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 비밀을 알아내리라!” 마치 어떤 신비한 것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 들어가는 듯이, 모세는 그 가시덤불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덤불 속에서 모세를 부르시기 시작한다. “모세야, 모세야,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라. 너의 신발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이다.”

 

 

이 광경은 매우 잘 알려진 친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이야기인가? 대답은 분명하다. 첫째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는 그 장소에 대해 우리 마음대로 통제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폐허의 산’, ‘황폐의 산’이란 뜻을 지닌 호렙산 밑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계신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가시덤불은 키가 작고 왜소한 나무로 황폐한 언덕바지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그러나 이 황량한 언덕바지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일하도록 하신 장소가 된다. 얼마나 놀라운 장소인가?

 

 

이와 연관하여 우리는 족장 야곱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가 아버지와 형의 눈을 피해 도망하던 때를 기억한다(창 28장). 야곱은 그가 도망자의 신세로 브엘세바의 황량한 벌판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잤던 그곳을 가리켜 ‘장엄하고 놀라운 곳’이라고 말한다. 야곱은 그곳을 가리켜 ‘하나님의 집’(벧엘)이라고 한다. 야곱은 그곳을 가리켜 ‘두렵고 떨리는 장소’라고 말하였다. 그곳을 가리켜 야곱은 ‘하늘의 문’, 즉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면서 소스라치며 놀랐다. 야곱이 베개 삼아 잠잤던 그 돌베개는 하나님의 집이 되었고, 하늘 문이 되었다. 이와 같이 ‘폐허의 산’(호렙산) 위에 있었던 그 작고 왜소하고 앙상한 가시덤불은 야곱이 베고 잤던 돌베개와 같다.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소’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 되었으며, ‘하늘 문’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는 일상적인 장소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가장 평범한 장소가 하나님께서 그분을 위한 봉사로 우리를 부르시는 거룩한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모세와 타오르는 가시덤불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소명의 시간에 대해 아무런 통제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게 되는 ‘시간’이 우리가 계획하고 정해놓은 시간표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모세의 나이가 팔십 세가 되었을 때 그를 부르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인 동시에 의아심이 생기는 사건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셨는가? 하나님은 왜 모세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를 부르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왜 모세가 사십 세가 되었을 때, 즉 그의 전성기에 그를 부르시지 않으셨는가? 모세 자신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였던 것 같다. 모세 나이 사십이었을 때, 그는 자신의 힘과 의도대로 하나님이 지금 그이 나이 팔십에 이루시려고 부르시는 것을 하려고 노력했었다. 즉 모세는 그의 나이 사십이었을 때, 한 히브리인 노예를 구타하고 있는 애굽인 한명을 살해하였다. 의분(義憤)에 못 이겨 모세는 애굽인을 죽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의 폭발은 아무런 효력도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가 한 히브리인 노예를 위해 애굽 사람 하나를 죽였지만, 어느 히브리인들도 모세를 그들의 지도자로 세우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모세에게, “누가 당신을 우리를 다스리는 사람으로 삼았는가”하며 대들기까지 하였다. 애굽인을 살해한 모세의 행위는 아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아니한 사람 편에서 행한 폭력의 행위일 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가르침이 있다면, 외형적으로 볼 때 모세가 가장 강하고 열정적이었던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울 사도께서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독특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일이 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선택(選擇)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선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의 삶의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애를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일 강에서 구출되었던 일, 바로의 궁정에서 교육받은 일 등이 그것들이었다. 모세는 이런 일들이 결코 우연한 일들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은 즉각적인 행동들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계획과 그것의 실행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사십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떼들을 돌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철저한 낭비처럼 보이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사역과 임무를 모세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를 준비시키기 위해서는 이 모든 세월들, 즉 무료하고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했던 이 모든 세월들은 필수적이었다. 그는 ‘광야의 학교’에서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필수과목을 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림과 인내란 과목이었다. 이 모든 세월은 그에게 인내를 가르쳤다. 그리고 이 모든 세월은 그에게 광야의 길들, 광야의 방식들을 가르쳤다. 광야, 벌판, 황량한 들판은 그저 모래나 돌들이나 바위들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지면에 널려있는 것들일 뿐이다. 그것들은 ‘광야의 비밀들’을 숨기기 위한 덮개들일 뿐이다. 광야의 비밀들을 알기 위해서, 광야가 주는 놀라운 자원들, 광야에 숨겨져 있는 물줄기들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세월동안, 정말로 수많은 세월동안 그곳에 살았어야만 한다. 따라서 사십년 생활은 결코 낭비된 세월이 아니었다. 오히려 광야 사십년의 생활은 ‘발견’과 ‘훈련’의 기간들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현현을 기록하고 있는 본 단락의 첫 번째 부분이 앞서 이야기한 시각적 사건, 즉 불에 붙었으나 불에 타버리지 않는 떨기나무에 관한 것이라면(2-3절) 두 번째 부분은 불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것이다(4-6절). 모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다. 첫째는 주권적 부르심이 있다. 모세의 이름을 두 번에 걸쳐 긴박하게 부르신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시간에 자신의 계획에 따라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주권적이고 그분의 자유에 기인한다. 둘째는 거룩한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엄위하신 경고의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감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 감히 누구도 그분의 거룩성에 가까이 갈수 없다. 존경과 경외의 표시로 그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야한다. 그분을 함부로 다루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서 모세는 신발을 벗어야만 했다. 그러나 신발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면전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기도 하다. 고대 중동의 풍습에 따르면 집안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는다. 집안에 깔려 있는 양탄자의 부드러운 촉감을 맨발로 느낄 수 있다. 누군가의 천막이나 집에 들어가면서 그 집안의 주인의 청에 따라 신발을 벗고 발을 씻고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 풍습은 곧 손님에게 환대를 제공한다는 표현이다. 그러한 환대를 받아들이려면 손님은 먼저 집주인의 공간이 거룩하고 신성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존중해야하며 동시에 그에 따라 예의 있게 그 공간 안에서 움직여야한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세는 거룩하고 신성한 현존 앞에 자신이 서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분에게 존경과 경외를 보여드려야하며, 동시에 집에 온 것 같은 평안한 마음을 주는 그분의 초청과 환대를 경험하게 된다. “이방 땅에 사는 낯선 나그네로 자신을 인식했던 모세가 이제는 하나님의 손님이 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3) 셋째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신다. 그는 모세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신다. 이 말씀은 떨기나무의 장면을 애굽에서 고난당하는 이스라엘에 관한 기사인 2:23-25와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사건이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린다. 다시 말해 족장과 맺은 언약의 관점에서 모세의 소명 이야기와 출애굽 이야기를 바라보아야 할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신의 현현)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그는 얼굴을 가리었다. 그는 감히 하나님을 쳐다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을 쳐다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주권적 자유성을 범하는 무례한 일이기 때문이다.

 

 

[7-10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를 왜 부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신다(7-10절). 애굽에 있는 자기의 백성들의 고난과 고통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구출해 낼 결심을 하였다는 것과 그 일에 모세를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특별히 7-8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출 2:23-25에 기록된 내용과 상당히 유사하다. 2:23-25에 사용되고 있는 네 개의 동사 중 세 개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가 이스라엘의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고 그들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알고 있다.” 여기서 내레이터는 하나님의 '파토스'(激情, pathos)를 드러낸다. 옥황상제처럼 무념(無念)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삶 특히 자기 백성의 고난과 고통의 역사 속에 기꺼이 참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자기 백성의 고난의 역사 속에 동참하여 그들을 구원해 내시겠다는 의지를 잘 보여주는 단어가 “내려오다”(8절)는 용어다.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죽어가는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내려오셨다는 이 구절이야말로 기독교 신학의 정수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과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이유를 두 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애굽인들의 손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건저내기’ 위함이고, 또한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올려내기’(한글 개역에는 “인도하여 이르게 하다”라고 번역됨) 위함이다. ‘건저 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나짤’)는 출애굽 2:19에서 모세가 목자들의 손에서 이드로의 딸들을 건저 내었을 때 사용된 동일한 단어이다. 특별히 ‘올리다’는 히브리어(‘알라’)는 출애굽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용어다.

 

 

9절에서 하나님은 다시금 이스라엘이 처한 쓰라린 압제상황과 고통을 상기하시면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이 당한 압제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이것 역시 출 2:23-25를 상기시킨다. 이제 모세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가야할 때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으로 가야할 충분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할 순간에 서 있게 되었다. 구체적인 책임과 의무와 사명감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해야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대리인이 된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시기 때문이다(“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리라!”, 10절).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던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에게 사명과 임무를 맡겨 보내시기 위해서였다. 무슨 사명인가? 설교학적으로 말해, 인간이 좀더 ‘인간적’(humane)이 되도록 하는 사명이다. 사람이 사람처럼 살도록 만드는 사명이다. 사람의 삶을 품위 있게 만드는 사명이다. 사람을 온갖 종류의 압제와 억눌림의 상황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일이다. 예수께서 그의 첫 설교를 하셨을 때(참조, 누가 4:16-30), 그가 택한 성경본문은 이사야서 61장을 여는 첫 절들이었다. 이 구절은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삶을 ‘인간적’이 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사렛 지방의 회중(會衆)에게 행한 예수의 설교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하신 사명, 즉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행하라고 하신 소명과 임무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괴롭힘을 받고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깨어진 마음들, 상처 입은 영혼들을 싸매고 치료하는 일이었다. 포로 되어 있는 자, 잡혀 있는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결박되어 있는 자들에게 감옥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은 인간의 삶을 고귀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부르짖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을 보호해달라는 부르짖음이다. 인간의 삶에 축복해 달라고 요청하는 부르짖음이다. 이것이 제2의 모세로서 예수가 받은 소명이요 사명이었다.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고통의 절규’라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모세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러한 고통을 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소명(召命)들은 인간의 고통을 완화하고 덜어주라는 부르심이다. 인간 이하의 삶을 인간적인 삶이 되게 하라는 부르심이고, 깨어진 마음들을 다시 추스르고 묶으라는 부르심이고, 얻어맞아 쓰러진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부르심이고, 비참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구출해내라는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하늘에는, 공중에는, 우리의 주위에는 그러한 부르심으로 가득 차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고통과 압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고통들로 가득 차 있는 한,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그러한 ‘해방’에로의 부르심은 더욱 큰 소리로 우리의 귓가에 울리고 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통의 부르짖은 소리로 가득 찬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귀(耳)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완화하고 통증을 가라앉혀 주는 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고통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고통들에 대해 응답할 때 비로소 우리는 크리스천들로서 그러한 부르심에 부응(副應)하여 사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고통들에 대해 응답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도구들이다.

 

 

[11-12절]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모세는 거절의 뜻을 드러낸다. 모세는 “저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런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자신이 부적격자란 것이다. 아마 예전에 동족 히브리인을 도와주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오히려 살인자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미디안으로 도주했던 사실을 연상했을 것 같다(2:11-14). “내가 누구입니까?”라는 모세의 대답은 자존감을 잃어버린 패배자의 자조 섞인 목소리였다. 이 질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이 대답했던 질문이기도 하다. 기드온이 그랬고(삿 6:15), 예레미야가 그랬다(렘 1:6).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과거 지향적 사고방식에 대해 새로운 미래를 향해 눈을 뜰 것을 요구하신다.4) 모세의 과거 행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앞으로 이룰 일에 대해 눈을 뜨라는 것이다. 그 미래는 하나님이 친히 이끌어 가실 일이며 그는 그분과 동행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12절). “내가 있으리라”는 히브리어 한 단어로 표현되는데(‘에흐에’)5) 이 단어(‘에흐에’)와 ‘야웨’라는 이름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점은 14절과 15절에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새롭게 탄생할 민족의 정체성에 관해서도 분명하게 밝혔다. 그들은 “예배하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것이 출애굽의 궁극적 목적이다. 출애굽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 백성을 가게 하라!”는 유명한 출애굽의 문구는 목적이 있는 해방임을 기억해야한다. 그들이 애굽의 폭정에서 벗어나는 출애굽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는데 있다. 이전에는 바로가 그들의 주인이었으나 출애굽 이후로는 야웨 하나님이 그들의 주인이 된다는 선언이다. 출애굽은 다스리는 주인이 바뀌는 ‘신(神)-정치적’(theo-political) 사건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시내산(호렙산)에서 새로운 언약 공동체가 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시고 계신다.

 

 

[13-15절]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에게 애굽의 폭정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라고 부탁한다. 물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일은 하나님 자신이 하실 것이고 너는 나의 대리인 역할을 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모세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청을 완곡하게 거절한다. “이제는 열정도 정열도 다 시들었습니다.” “나는 지난 수십 년간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양 무리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제 인생의 시간을 잘못 읽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는 입이 둔하여 말을 잘 못합니다. 대중 연설도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동적 연설은 더더욱 못합니다. 그러니 저는 당신의 일에 적격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끈질기셨다. 구부러진 막대기로도 똑바로 내려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니 구부러진 막대기가 더 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곧은 막대기였기 때문에 똑바로 내려치실 수 있었다고 하나님께 대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세는 마지못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마음에는 확신이 서 있지 못했다. 다시 그에게 의심이 들었다. “제가 애굽에 가서 당신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에게 ‘무슨 권한으로 네가 그런 일을 하느냐? 누가 너를 보내었느냐? 너를 보낸 신이 누구냐?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모세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애굽에 가는 일을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막바지에 당돌하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하나님, 당신의 명함 한 장 주세요!”라고 청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명함! 

 

하나님은 당돌하게 이름을 묻는 모세를 향해 친절하게도 그리고 모세에게는 기대하지 않은 놀라움으로 명함 한 장 건네었다. 그 명함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명함을 받아본 모세는 비로소 그 때서야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을 알게 된다. 한국 사람의 이름이 세 글자로 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도 세 글자로 되어 있었다. “에흐에 아쉐르 에흐에”(14절). 이것이 하나님의 존함이었다. 이름 풀이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다시금 왜 하나님이 자기의 명함을 주시게 되었는지를 기억해야한다. 하나님의 이름 이야기는 애굽에 있는 고난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즉 애굽에서 고통하고 신음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도대체 누가 너를 이곳에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려고 한단 말인가? 어느 신이 우리의 구원자가 된단 말인가? 어떤 종류의 신이 우리를 구출한단 말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명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시 말해 용광로 같은 불길 속에 있었던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 이름이 주는 메시지를 통해 큰 위로와 힘을 얻어야만 그 명함의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에흐에 아쉐르 에흐에.” 보다시피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는 동일하다(‘에흐에’). 가운데 글자인 ‘아쉐르’는 문법적으로 관계사다. 두 단어를 연결 짓는 연결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에흐에’라는 단어의 뜻만 알면 이름풀이가 가능할 것이다. ‘에흐에’는 문법적으로 “…이다”, “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영어로는 be 동사)의 일인칭 단수 미완료 동사다. 쉽게 설명하자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존재 한다” “나는 현존 한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흐에)를 관계사 아쉐르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사용하여 지은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다. 우리가 지닌 한글 성경번역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개역개정, 쉬운성경) 즉 “나는 자존자”, 혹은 “나는 곧 나다”(공동번역),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표준새번역)라고 번역한다. 매우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이름 같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에서 온갖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이론을 추출해낸다면 그것은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진공 상태에서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이름은 학문적 상아탑에서 논의되는 이름도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구체적이고 절실하고 절박한 상황 아래서 주어진 신학적 이름이고 ‘복음’이다. 고난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생수와 같은 좋은 소식을 담고 있는 이름이다. 그분의 이름 자체가 복음이며 희망이며 미래이며 위로의 원천이다. 어떻게 그럴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름 세 글자를 담고 있는 명함을 건네 주셨을 때, 모세도 알았고 고난의 풀무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도 알았고 우리도 알아야만 했던 메시지가 그 이름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명한 윤리학자 루이스 스메데스(Lewis Smedes)는 이 광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너와 함께 그곳에 있을 하나님이 바로 나다! 이 사실을 믿어라!”6) “네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그곳에 너와 함께 있을 하나님이 바로 나다!” 에흐에 아쉐르 에흐에!” 여기서 우리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본다. 죽음과 학대와 어둠의 땅 애굽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복음, 들어야만 했던 좋은 소식, 즉 “너희가 어느 곳에, 어느 환경에 있다하더라도 너희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곳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이야 말로 ‘능력과 신실하심과 현존’을 말하고 있다. 부르그만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한다. “이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분,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신실한 방식으로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은 새로움의 능력 그 자체이시다. 애굽의 죽음의 상태 바깥에 이스라엘을 위한 새로운 삶을 만들어주시는 새로운 능력이다.”7)   

 

 

이러한 새로운 이름의 하나님(‘에흐에 아쉐르 에흐에’)이지만 사실은 이미 창세기의 내러티브 안에 계시된 족장들의 하나님이다(15절). 그리고 내레이터는 창세기의 족장들의 하나님을 ‘야웨’라고 부른다. “조상의 하나님 야웨”라는 명칭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 차일즈에 따르면 애굽의 박해와 압제라는 현재 당면한 위기의 상황 아래서 이스라엘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웨라는 이름은 앞서 나온 하나님의 이름인 “에흐에 아쉐르 에흐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두 명칭 모두 히브리어 동사 ‘하야’(‘있다’, ‘존재하다’)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오, 생명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새로움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분은 이스라엘을 위해 새로운 생명과 미래를 열어 가실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이스라엘의 조상과 언역을 맺으신 ‘과거’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그 언약의 하나님께서 ‘현재’ 고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이스라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한 줄기의 선 위에 서게 된다. 이스라엘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돌봄의 손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된다. 그들에게 희망과 미래가 있다. 그들 홀로 엮어가는 역사가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역사가 펼쳐질 것이다.

 

 

‘에흐에’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야웨’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칼의 양날과 같다.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주권적 자유의지를 천명하는 ‘에흐에’, 누구의 속박도 받지 않으시고 자유자재로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에흐에 하나님, 이 이름 안에서 이스라엘은 참된 미래와 희망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언약에 신실하신 야웨, 무슨 일이 있어도 한번 맺은 언약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는 야웨 하나님, 이 이름 안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며 미래를 향한 역동적 힘과 용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이름은 영원히 이스라엘의 모든 세대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될 것이며 동시에 ‘기념 칭호’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하려면 그분의 이름을 떠올리라는 것이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또한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그리고 공동체적 예배를 통해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기억해야 한다면 그분의 이름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기억’하는 것이다. 교회는 ‘기억 공동체’이다. 창조 때에 행하신 일과 출애굽 때에 행하신 일들과 갈보리 언덕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정규적으로 기억하기 위해 모이는 공동체가 교회다. 영어에 ‘기억’(remember)이란 단어가 ‘다시’(re) ‘멤버’(member)가 된다는 것처럼, 역사 속에 이루어진 사건에 다시 멤버가 되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억이다. 특별히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만찬을 통해 이천년 전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원 역사 속으로 다시 들어가 그 사건의 멤버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기념칭호와 이름을 함부로 의미 없이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제 4계명의 참 뜻이기도 하다.

 

 

[16-22절]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이제 출애굽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은 모세에게 서너 가지 전략을 제시한다. 첫째로,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아 그들이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16-18a절). 여기서 장로라 함은 가족이나 씨족의 어른이나 원로를 가리킨다. 이미 애굽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일종의 내적 자치 기구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모세는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중심으로 출애굽 계획을 실현하려고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들을 되새겨준다. 그 하나님은 창세기의 족장들의 하나님이시다. 그 언약의 하나님,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처한 이스라엘의 곤고와 괴로움과 압제를 보셨다는 것이다. ‘돌보아’로 번역된 히브리어(‘파카드’)는 ‘방문하다’ ‘찾아오다’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애굽의 현장을 방문하여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괴로움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 구절 역시 출 2:24-25의 용어를 상기시킨다. 출애굽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리시고 그들을 번영과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다. 창세기의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하나님 되실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모세에게 확신을 주신다. “그들이 네 말을 들을 것이다.”

 

 

둘째로,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바로를 만나야 한다(18b-19절). 바로에게 야웨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야웨가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해야한다. 매우 단호한 선언이다. 노예 공동체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길 여정으로 광야로 가서 그곳에서 야웨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허락하라는 최후의 통첩과도 같은 결연한 선언이다. 삼일 길을 광야로 가게 해 달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 마치 도주하기 위한 정치적 위장 전술인 듯 보인다. 아니면 애굽 제국의 신들이 요구하는 모든 종교적 주장들에 대해 대항한다는 매우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종교적 행위일 수 있다. 그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불투명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표면상 종교적 자유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바로에게 요구한 것은 노예제도를 통한 고역과 착취 등과 같은 사회적 정의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종교적 자유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특별히 애굽과 같은 고대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는 종교의 자유는 정치적 독립을 의미하기도 했다. 본문과 잘 연결되면서도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장례에 관해 바로에게 부탁한 이야기다.8) 야곱이 애굽에서 죽자 요셉은 바로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의 시신을 가나안에 묻고 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한다. 요셉이 아버지의 장례를 고향에서 치루겠다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을 때는, 장례식 자체가 종교적 예식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바로가 야곱의 장례식을 허락했을 때, 그것은 요셉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고 허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의 출현 때문에 히브리 민족의 압제가 시작되었다면 동시에 이것은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억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유롭게 그들의 하나님 야웨를 경배할 수 있는 삼일 간의 여행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가 함께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종교적 자유가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19절). 노예민족의 탈출을 위한 위장이라면 바로가 허락을 할 리가 없다. 애굽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면 더더욱 허락할 리가 없다. 어느 권력이 자신의 권력 누수현상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이 사실을 내레이터도 하나님도 우리도 모두 잘 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권리주장(“내 백성으로 가게 하라”)이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무슨 방도가 필요하겠는가? 힘과 무력으로 그 주장을 관철시키지 않겠는가? 좋게 말로 해도 듣지 않는다면, 바로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즉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하나님의 강하고 매서운 손맛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맛을 본 후에야 그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야웨라는 이름의 새로운 의미를 나타내 보이실 것이다. 다시 말해 압제하고 학대하는 제국들에 대항하여 싸우시는 전사(戰士)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림으로써 하나님은 야웨라는 이름의 참 뜻을 만방에 드러내실 것이다.”9)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방식과 길도 여러 가지라는 사실이다. 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누군지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그분의 선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분의 손맛을 통해 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때론 고난이라는 그분의 손맛을 맛본 후에 뒤늦게나마 그분을 알지도 모른다. 좋은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출애굽의 또 다른 측면은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을 감동시켜 노예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기적이며 이적이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노예 여자들이 그들의 애굽 전 주인이나 이웃들에게 송별 선물로 귀금속 패물들과 의복들을 달라고 하면 그들이 기꺼이 주겠다는 것이다. 좋게 말해서 달라고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취하는 것이고, 좋게 표현해서 받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반강제적으로 잡아채어가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본문의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여기서 ‘취한다’(‘나짤’)는 용어는 강제적으로 재물을 빼앗아 재분배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유유하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강하신 손’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이기도 하다(창 15:14).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이렇게 여유 있고 풍족한 것이다.”10)


1) 오경의 문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호렙’은 엘로힘 자료와 신명기적 자료에 사용되는 용어이고 ‘시내산’은 야웨 자료와 제사장 자료에 사용되는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2) 참조, R. A. Cole, Exodu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73), p. 63.

3) J. Gerald Janzen, Exodus, Westminster Bible Compan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p. 29.

4) Brevard S. Childs, The Book of Exodus: A Critical, Theological Commentary, OTL (Philadelphia: Westminster, 1974), p. 72.

5) ‘있다,’ ‘이다‘(i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야’이다. 이 ‘하야’ 동사의 일인칭 미완료형이 ‘에흐에’(“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다.

6) Lewis B. Smedes, "Controlling the Unpredictable: The Power of Promising," Christianity Today (January 21, 1983), p. 17. (“I am he who will be there with you; count on it!")

7) Walter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in 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ume I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p. 714

8) J. Gerald Janzen, Exodus, p. 36.

9) J. Gerald Janzen, Exodus, p. 37. 전사로서 야웨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다는 구절들로 젠슨은 다음 구절을 든다 (출 15:1-3; 삼하 7:23; 느 9:10; 사 63:12,14; 렘 32:20; 단 9:15).

10) 박윤선,『성경주석: 창세기 출애굽기』(서울: 영음사, 1968), p.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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