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29 14:21
"숫자에 얽힌 사연: 12:12"
종종 특정한 숫자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부과합니다. 예를 들어, 12693526(이건 내 군번이다). 342(이건 내 중학교 입시 수험번호다). 3842(신기하게도 미국과 네덜란드에 살 때 동일한 주소 번호다). 3796(유학 신혼시절의 아파트 번호다). 616-956-6339(이건 20년 이상 사용한 미국의 전화번호다). 803-408(이건 20년 정도 살았던 한국의 아파트 동호수다). 6.14(이건 결혼기념일이다!)
특정한 숫자에 대해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내상이 스멀거릴 수도,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나라마다 국민마다 숫자로 상징되는 기념일들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3.1, 4.16, 4.19, 5.16, 6.25, 6.29, 7.17, 8.15, 10.3, 10.9 등이 그런 숫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록에 12.12를 넣어야 일 년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12:12에 관한 이야기를 몇 자 적어보렵니다.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박정희 정권의 불행한 종말(1079.10.26.)의 혼란을 틈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던 날이 1979년 12월 12일입니다. 일명 12.12 사태입니다. 나는 사태가 일어나기 여러해 전 백마사단(9사단)에서 근무했었습니다. 당시 9사단장은 노태우 장군이었고 작전 참모로 허화평 중령이 있었습니다. 9사단과 인접해있던 1사단의 사단장은 전두환 장군이었으며, 이들 사단들을 관리하는 상급부대는 1 군단으로, 군단장은 황영시 장군이었습니다. 이들은 내가 군 생활을 하면서 서너 번 정도 만난 인물들입니다.
그러던 그들이 1979년 12월 12일에 대한민국의 기초를 흔드는 쿠데타 사건의 주인공들로 등장했으니 내가 어찌 그 날을 잊을 수 있을까요. 당시를 회상해보면 탱크를 몰고 위수지역을 넘어 서울로 진입해 들어오는 그들 반란군들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배반의 장미처럼 12.12는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 돌았고, 혼미한 별들의 전쟁에서 우리는 배신의 하극상을 목격했습니다. 결국 한쪽에선 축배를 들었고, 다른 한쪽은 울분에 못 이겨 분노와 좌절의 날들을 보내야했습니다.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는 30경비단 안에는 황영시 1군단장,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9사단장 등 신군부 세력들이 모여 역적모의하였고 불과 몇 시간 후 그들은 쿠데타 성공의 축배의 잔을 돌렸지만, 당시 그들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자신의 직속 부하인 최세창 3공수여단장에 의해 체포되고 옷을 벗고 훗날 술로 분노를 달래다가 89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수경사령관이던 장태완 장군 역시 그의 직속부하들의 배반으로 신군부 쿠데타를 막지 못하고 구금되었다가 강제 전역하였습니다. 그의 가족사는 불운의 슬픈 이야기로 점철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강제전역에 충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서울대를 다니던 그의 외아들은 가출하여 할아버지 묘소로 가는 길에 꽁꽁 얼은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그의 아내 역시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습니다. 모두 화병이 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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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라는 숫자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배반과 배신”이란 주제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배신”이란 주제가 구원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2.12의 암울한 그 밤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반당하시던 그 밤의 내러티브에 신학적 무게들을 더 실어주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12.12쿠데타가 하극상에 의한 배반의 극점을 찍었다면, 유월절 밤 역시 제자에 의해 배반당하던 슬픔의 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여 저지르는 인간의 배신 이야기로 직조되어 있다 해도 과언을 아닐 것입니다. 조무래기 같은 흙덩어리 인간들에게 뺨을 맞는 신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오직 성경의 하나님만이 그런 신이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배신과 배반이 가져다주는 상처보다 더 험하고 고통스런 상처는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60여 평생에 한두 번 배신의 쓰디쓴 맛을 겪어 본 일이 있습니다. 그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은 아직도 완전하게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가끔 그것이 치밀어 오르면 밤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라는 노랫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기도를 드려보아도, 마음을 가다듬어 보아도 별 효과가 없습니다. 앙갚음 하고 싶은 마음, 복수하고픈 심정, “한번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해서는 안 된다는 종교적 계율과 그것에 순복해야 한다는 마음 등이 서로에게 부대끼고 갈등하고 다투기를 반복적으로 합니다. 그러니 심적으로 더 힘들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뿐 아니라 신체적 증상도 나타납니다. 소화불량에 머리카락은 빠지고 의욕이 상실하게 되며 과거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12.12라는 숫자는 적어도 성경의 학도인 나에게 “인간의 배반과 하나님의 용서”라는 도무지 그 역학관계를 이해할 수 없는 복음의 신비와 은혜의 비장함을 깊게 묵상하도록 인도해주었다. 물론 깊은 묵상에도 그 이해불가의 화학적 관계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겐 불가능한 것이 신에겐 가능하겠지”라며 믿어보려고 애를 쓸 뿐입니다. 그러던 중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죄를 짓고 신은 용서하시지요?”라는 말로 그분에게 항의하듯 고백하던 순간 어디선가 물안개 피어오르듯 신비로운 용서가 어렴풋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것을 가리켜 “영혼의 눈을 뜨게 하는 은혜”(eye-opening grace)라고 했나 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신의 용서를 조금씩 경험해가면서 우리는 인간의 용서의 허망함과 연약성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나를, 그리고 내가 해를 끼쳤던 그 사람을, 그리고 내게 해를 끼쳤던 그 사람을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용서는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선물인 셈이지요.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그 선물을 달라고.
["평온" Muskegon River, MI]
예.. 배반과 용서, 많은 일들이 스쳐지나갑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선물 '하나님 은혜'로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