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일상 에세이: “가을 소풍”

2015.10.18 07:35

류호준 조회 수:1437

가을 소풍

 

내 어렸을 적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봄가을로 걸어서 소풍을 갔다. 당시에는 원족(遠足)이라고도 하였는데, 기분을 돌리거나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바깥에 나가 바람을 쐬는 일을 원족 간다고 하였다. 어리고 작았던 초등학교 1학년생에겐 걷고 걸어서 가던 소풍길이 제법 멀었지만 그래도 병아리들처럼 종알대며 손에 손을 잡고 걸었다. 이른 아침에 엄마가 정성껏 싼 김밥에 칠성 사이다에 간식거리로 해태과자 한 두 봉지면 행복했다. 어렸지만 나는 봄 소풍보다 가을 소풍이 기억에 남는다. 양화대교 남단에 있는 당산초등학교에서 출발하여 노들길을 따라 염창이라는 곳에 작은 산으로 가던 원족이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단풍이 물 들던 가을에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숲길을 걸었는데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구름 한 두 점이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가 없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 한적한 구름 몇 점, 살랑대는 가을바람, 휘청거리는 갈대, 주홍빛의 단풍잎들이 어린 눈에는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오늘은 나와 우리 집 사람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어린 손자 둘을 데리고 집 뒤쪽 숲길로 소풍을 갔다. 각각 4살과 3살인 손자들(예섬, 예일)은 숲속으로 산보하는 것을 좋아한다. 모험(adventure)을 떠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마치 허클베리 핀의 모험(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처럼 말이다. 아주 신바람이 났다. 인적이 드문 숲속 오솔길을 가면서 잠자리, 메뚜기, 나비, 벌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가다가 가끔 무릎을 꿇고는 풀 섶의 곤충들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다시 일어나 걷다가 녹 익어가는 가을 숲속 길 좌우를 살펴보며 작은 식물들로부터 바람에 흔들리는 여릿한 풀들과 갈대들을 보며 그것들의 이름을 묻는다. 어린 시절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어린이 동화책을 통해 수많은 이름들을 익혀온 어린 손자들의 무차별 질문에 나는 속수무책이다. 아마 어린 손자들에겐 그들이 보고 있는 숲속은 광대한 우주와 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된 우리에게 숲속 길 저만치 끝이 보일 듯 하겠지만 서너 살짜리 아이들에겐 아득한 밀림일 수도 있겠지! 숲속 오솔길을 지나면 언덕이 나오는데 바로 앞으로 아담한 습지가 보인다. 습지 위로 푸른 어치, 종다리, 딱새나 참새 같은 작은 새들이 지저귀며 나른한 가을 점심먹이를 찾아 날고 있다. “할아버지, 저 새 이름이 뭐에요?” 유구무언이다. 진작 조류들과 곤충과 식물에 대해 공부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다. “, 저건 새야,” “아니 이름이 뭐냐고요?” 서로 말없이 한참을 걸었더니 쉬어가잔다.


애들아, 스낵타임이야!” 할머니가 손자들을 부른다. 소풍을 갈 땐 늘 그렇지만 오늘도 손자들은 할머니의 가방에 관심이 많다. 그 안에는 각종 리즈크래커, 애니멀크래커, 거미베어 캔디들, 피넛버터 초콜릿을 바른 빵과 물병, 물티슈와 기저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동식 식량창고인 셈이다. 점심을 풒 숲에서 먹고 또 걸었다. 일단 숲길로 걸으면 안아달라는 소리는 안한다. 두 녀석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매달려 안아달라고 하면, 이건 대략난감하다. 나나 우리 집 사람이나 체력이 고갈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걷다보니 저만치 노란 단풍나무가 가을 햇살을 타고 하늘로 불타오르고 있다. 바람이 약간 차게 느껴지자 우리 넷은 단풍나무 아래를 피난처로 삼아 꼭꼭 얼싸 안고 앉아 있었다. 나무 아래로 떨어진 낙엽들이 형형 색깔로 나 뒹군다. 손자들이 노란 잎, 빨간 잎, 갈색 잎, 푸른 잎 등을 주워 할머니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가을이 할머니 가방 속에 풍성하게 담겨져 있었다.

 

미국의 중소도시의 외곽에 자리 잡고 있는 전형적인 전원 마을 풍경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동화책을 읽고 숲길을 좋아하는 어린 손자들을 보면서 어른이 된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있나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나무와 새들과 구름과 하늘과 곤충들을 사랑하기에는 턱없이 메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의 전원적 일상의 아름다움을 회화적 필치로 그려낸 로버트 프로스트의 수많은 서정시가 떠오른다. “자작나무”(Birches), “시월”(October)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블루베리”(Blueberries), “사과 따기 후에”(After Apple-Picking) . 지난 세기의 미국의 서정적 시인들과 작가들의 위대한 작품들이 결코 진공 속에서 나오지 아니함을 새삼스레 느낀 하루였다. 자연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위대한 스승인가 보다. 넉넉함과 너그러움, 여유와 자유, 관조와 성찰, 고요와 휴식, 안식과 평온, 아마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지고한 선물들이겠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토브) 세상 말이다. 음유시인 하덕규의 정갈한 문구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입니다.” 적어도 내겐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숲길의 두 형제, 할머니의 가방과 간식시간, Grand Rapids, MI]

숲길.jpg 할머니와 소풍.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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