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law)이라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라’(Torah)다. ‘토라’의 뜻은 ‘가르침’, ‘교훈’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반드시 알아야할 것을 ‘가르친 내용’을 담고 있다. 마치 좋은 부모나 스승이라면 자녀나 제자들에게 그들이 사는데 있어서 반드시 알아야할 것들을 가르치듯이, 하나님도 그의 백성들을 향해 그러하시다.
‘토라’는 하나님의 가르침들을 결집해 놓은 것이며, 이야기체나, 율법(계명, 법률, 규정) 형식이나, 혹은 시(詩)의 형태를 입는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토라’를 ‘율법’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토라의 포괄적 의미를 다 담지는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초기의 한글 성경번역자들이 그렇게 번역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나 가르침이 종종 율법의 형태로 주어졌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아쉬움은 그대로 남는다. 덧붙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한국어 의미상, ‘율법’은 종교적 규율이나 규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문제는 구약 성경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구약의 율법 안에는 제사장들에 의한 의식(儀式)적 정결법이나 제사법과 같은 종교적 규율이나 규례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법률들, 예를 들어 농작물 추수, 토지 대여, 이자 규정, 손해배상, 살인, 간음, 사기사건 등을 다루는 형법, 민법 등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이 공동체로서 평화롭게 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규들의 모음집으로 일종의 “평화로운 공동체적 삶을 위한 가이드라인”이라 생각하면 좋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제정하신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한다. 즉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방식을 반영한다. 그리고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는 목적은 샬롬의 성취에 있다. 평화로운 삶을 이루기 위해 법이 필요한 것이다. 이 사실을 놓치게 되면 율법주의자, 법률지상주의자가 된다. 율법의 문자를 따랐지만 율법의 정신을 놓쳤던 예수님 당시의 율법사들이나 서기관들이 이들에 해당한다. 바울의 표현은 이 문제에 정곡을 찌른다. “문자(儀文)는 죽이는 것이요 영(정신)은 살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의와 공의를 지향하는 율법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도구요 수단이다. 정의는 평화를 바라보고 평화는 정의를 부른다.
그러므로 ‘율법’이 나오는 부분을 읽을 때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 율법(보통 ‘계명’이나 ‘명령’의 형태를 띤다)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려 하시는지를 살펴야한다. 예를 들어 보자.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계명)이 있다. 하나님은 이 특정한 율법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시려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먼저 간음은 합법적인 부부사이에서 일어나는 성교(性交)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교는 부부지간에서만, 즉 합법적인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 가정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결혼과 가정이 정결하고 거룩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또한 결혼은 단순히 남녀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창조질서에 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질서를 깨뜨리면 사회와 가정이 붕괴되고 하나님이 가정에게 의도하신 안식과 평화는 사라질 것이고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며 극심한 혼란과 혼돈 가운데 빠질 것이다. 결국 간음하지 말라는 소극적 표현의 적극적 의미는 가정과 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라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한 가르침인가!
율법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시행되어야할 제도였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 구약시대에 살던 백성들은 오히려 율법 안에서 즐거워할 수가 있었다. 들어보라. “오! 내가 당신의 율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그것이 주야로 나의 묵상입니다.” 모세의 율법 아래서 신자들은 죄의 용서함도 경험하였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의 가림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시32:1). 시편 130장에도 “오직 하나님께 용서함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교수님의 글을 통해 율법에 대한 정의를 다시한번 새겨봅니다. 전시대적 전사회적 편만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그려봅니다. "정의는 평화를 바라보고 평화는 정의를 부른다" 오늘의 명언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