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설교: “하나님의 뒷모습”

2010.05.16 23:05

류호준 조회 수:13259

 “하나님의 뒷모습”

출애굽기 33:12-23


12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이차세계대전 중이었습니다. 프랑스군과 독일군 사이의 전투에서 벌어진 어떤 전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때마침 한 수도원에서 베네딕트 수도승들이 저녁기도시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면서 마리아의 송가(Magnificat)를 읊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탄이 수도원 예배당 천장을 뚫고 들어와 본당 한가운데 폭발한 것입니다.


얼마동안 교회당 안은 연기와 먼지로 자욱했습니다. 얼마 후 연기가 사라지고 자욱했던 먼지가 가라앉자 수도승들은 그 자리에 선채로 계속해서 마리아의 송가(누가 1:46-55)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magnify)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합니다! …”


이 광경을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매우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이 장면에 있을 것입니다.

   ․ 왜 이 수도승들은 숨지 않았을까?

   ․ 왜 그들은 제단 앞에 그대로 남아 있었을까?

   ․ 피할 수도 있었는데 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을까?

   ․ 무엇이 그들로 그렇게 서 있도록 했을까?


분명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현존(現存, presence)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전을 위해 도망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현존'(실재, Presence)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다는 사실만 확신한다면 그 밖에 다른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세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현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만 확신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지엽적이거나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당신의 현존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신다면, 우리를 이곳에서 앞으로 가게하지 마십시오.”(출 33:15)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 당신이 계시지 않는 곳에 왜 우리가 가야합니까?

   ․ 가야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베네딕트 수도승들에게처럼, 모세에게도 하나님의 현존(실재)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현존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것이 우리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보이기 전까지는 그저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 조릅니다. 정말로 이스라엘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가시적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나님을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13절에 나타납니다. “주님, 내가 당신의 은혜를 입었다면 내게 당신의 길들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을 알겠습니다.” 번역하자면, “제가 당신의 은혜를 입었다면, 당신의 미래 계획들을 저에게 말해 주십시오. 저희를 위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말씀해주십시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 나는 너에게 내 길들, 내 방식들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해 줄 수 있지.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갈 것이다.

   ․ 나는 내 미래 계획들을 너에게 펼쳐 보일 수 없다. 그러나 너에게

     한 가지는 확신시켜 줄 수 있어. 즉 네가 지나가야 하는 길들이 어떤

     길들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그 길에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모세는 하나님을 압박합니다. 당신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보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18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자, 저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네게 나의 영광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너에게

         해 줄 수 있어. 네 앞에 나의 모든 선(善)함을 지나가도록 해 줄게.”


모세가 하나님께 한 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간접적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회고하면서, 반성하면서, 성찰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딱 한번만이라도 당신을 직접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얼굴과 얼굴을 직접 보게 해 주세요.”


무지개를 보듯이


이에 대해 하나님이 하신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 얼굴은 안 돼. 그러나 너는 내 선함은 볼 수 있어. 이 선함은 마치 무지개와 같지. 무지개는 태양이 구름들 뒤에서 빛을 비치고 있다는 증거야. 이와 같이 내 영광은 태양과 같아. 태양은 보이지만 간접적으로 보아야하는 것이지. 태양을 직접 보면 눈이 상하지.”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길이 있습니다.

   ․ 무지개의 다양한 색상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 좋은 때나 나쁠 때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 장마와 가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 건강과 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의 심정을 우리는 잘 이해할 겁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저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 당신에 대한 단순한 회상들 말고, 그 뒤에 있는 광채를 저에게 보여

    주십시오.

   ․ 색상들의 프리즘 뒤에 있는 굴절되지 않은 빛을 보게 해 주십시오,

   ․ 당신의 얼굴을, 당신의 영광을 직접 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 내 영광을 네게 보여줄 수 없다.

   ․ 그 대신 네 앞에 나의 모든 선함을 지나가게 할 것이다.

   ․ 너는 나의 선함을 사열해 보아라.


과거를 기억하라


달리 말해, 나의 ‘현존’(실재)은 나의 과거의 행동들을 통해서만 보여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지금 나의 현존을 볼 수 있는 열쇠는 과거에 내가 어떻게 현존했는지를

     돌이켜 보는 것이다.

   ․ 과거에 내가 너에게 베푼 선대(善待)하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현재 너에게 얼마나 선한지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 과거에 내가 얼마나 너에게 선하게 대우했는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너를 선하게 대우하는 지에 대해 의심이 간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돌보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지금 나를 정말로 선하게 대하고 계신가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면,

   ․ 과거에 너를 향한 나의 선하심을 기억하라.

   ․ 어떻게 많은 복들로 너의 삶을 가득 채웠던 지를 기억하라.


이 복들이 어떤 복들이었는가요?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던 복들이었고, 우리가 감히 꿈꾸지도 못했던 복들이 아니었던가요? 그런 복들로 우리의 삶을 채우셨던 그 과거를 돌이켜 보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이런 ‘기억’하는 반복하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 많은 축복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기억하는 일입니다. 교회란 기억공동체입니다. 우리 앞에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과거의 수많은 축복의 순간들을, 하나님의 선함들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축하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기억의 예식: 성찬


특별히 성찬(주님의 식탁)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함을 우리들 눈앞에 펼쳐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현존하심을 부인하거나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찬식 때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이 떡과 잔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먹고 마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죄를 온전하게 용서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 찢기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눈앞에 하나님의 과거의 선함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과거의 선함을 잊을 때,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함을 망각할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를,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라는 정체성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보았던 시사 프로그램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충격적 스토리가 생각납니다. 어떤 천부적 재능을 가진 영국 출신의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심한 정신적 외상(trauma)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그에게는 오직 5분간만의 기억력만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5분전에 일어난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모두 잊습니다. 그가 만났던 사람들은 언제나 낯설고 새로운 사람입니다. 그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이고 낯선 경험이 됩니다.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마음에 간직하지 못합니다.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우리라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치매’는 자아정체성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도 마찬가지입이다. 우리의 크리스천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함을 기억하고 있는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선함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에 의해 구성되고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함을 기억한 것에 따라 우리가 그의 백성, 크리스천으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에 대항하여 우리가 짓는 가장 큰 죄 중의 하나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분의 선함을 잊는 것입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고 할까요? 그러면 우리 자신의 정체성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 연습


지나간 과거에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하심을 새롭게 기억하기 위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일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시편 136장을 읽어 보시라는 것입니다. 이 시편 전체는 하나님의 선하신 행동들을 회상하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매번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놀랍고 선한 행동들 중 하나씩 회상해 갑니다. 그리고 마치 후렴처럼 “그의 사랑(인자)은 영원하도다!”라고 노래합니다. 들어보십시오.


                … …

        신(神)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主)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장의 끝 절에 이르거든,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추억과 기억을 담아 계속 읊조려 보십시오. 시인이 되어 보십시오.


        나에게 사랑스럽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네 자녀를 주신 분,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나는 치명적인 병마에서 치료해 주신 분,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나의 우울증의 어둠 가운데 있었을 때 빛을 창조하신 분,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나로 하여금 나의 최악의 원수도 사랑하게 하신 분,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나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라고 모세가 요청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가까이 있던 바위 틈새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자, 보라. 내 가까운 곳에 한 곳이 있는데 그곳에 바위 위에 서 있으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 내가 너를 바위 틈새 안에 집어넣고 내가 지나갈 때까지 내가 내 손으로 너를 가릴 것이다. 내가 지나간 후에 내 손을 거둬들일 것이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직접 쳐다본다면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도록 허락되었습니다.

   ․ 그분이 지나가신 후에 그분의 등만을 보도록 허락되었습니다.

   ․ 모세는 오직 회고적으로만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 하나님의 발자국만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만지신 것들에 남아있는 손자국만 보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 모세는 하나님의 현존의 후광만을 보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면서 남기신 흔적들만을 보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 그 흔적의 길들, 마침내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그 오솔길만 보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이것들이 모세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흔적들과 발자국들이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보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직접 보면 왜 죽는다는 말입니까?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던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성경들을 읽어보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두려워 떨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사색이 되어 정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고 그의 사자(천사)들을 보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모두가 경악했고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한 가지 좋은 예가 신약성경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어느 날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허사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에게 오셔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 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지 상상치 못할 정도의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 과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미소를 지으면서 “정말 대단한 분이시군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는군요.”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과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본 경험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동일한 경험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하시면 사람들은 자신들과 하나님 사이에 무한한 심연(深淵)이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이런 것은 마치 태양을 직접 쳐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눈이 멀게 됩니다. 시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선지가 말라기가 말했듯이 말입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3:2)


너는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나의 등은 보리라. 나의 뒷모습은 볼 수 있으리라.


하나님의 뒷모습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뒷모습으로 가득 합니다. 뒤에서 바라 본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 여러분의 숨을 멈추게 하는 찬란한 석양의 장관들이 있습니다.

   ․ 어린 아기의 순진무구한 얼굴이 있습니다.

   ․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는 초록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 사람의 눈 안에 들어 있는 그윽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눈물 보를 터뜨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 수천 수억의 은하계들로 이뤄진 무한한 우주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과 그 이상의 수천 수억의 것들이 하나님의 뒷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좀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뒷모습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과 성찬과 찬양들은 예를 들어 모기들이나 방울뱀들이나 태풍들 보다 점 더 분명한 하나님의 뒷모습의 일부분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하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우리가 거룩하고 신성한 것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뒷모습들은, 하나님을 뒤에서 바라보는 것은 결코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을 만족시켜 주지 못합니다.


주님의 만찬에 올려 진 자그만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하심에 대한 갈망을 돋우는 에페타이저(appetizer)일 뿐입니다. 더욱 더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게 할뿐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편 42장).


우리가 절실하게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어디서 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갈망함: 신앙의 역설


쉽게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라고 우리는 대답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믿으라. 또한 나를 믿으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분의 얼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맞습니다.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뒤에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는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어떤 하나님입니까?

   ․ 어린 아기인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 유대인 랍비인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 강보에 싸인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 십자가 위에 달린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역설(逆說)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나가갈 수록, 결국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역설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런 역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 와서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분이 가장 작았을 때, 강보에 싸여 있었을

    때, 말구유 안에서 누워있었을 때, 그 곳에서 하나님을 보시오.

   ․ 와서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분이 가장 비참했을 때, 그가 십자가 위에

    달려있었을 때, 그곳에서 하나님을 보십시오.


이런 역설을 가슴과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는 추구는 이곳에서 끝을 맺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는 추구는 이런 역설 안에 안착할 것입니다. 이런 갈망과 추구는 우리의 배고픈 마음, 추구하는 심령, 갈망하는 가슴으로 끝을 맺을 것입니다.


구유와 갓난아기 침대와 십자가로 대표되는 지극한 비참과 겸손 앞에 우리는 마음의 허리를 수그려 그분을 보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 기독교 신앙은 찬란한 빛을 발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간절한 그리움으로 눈망울이 글썽글썽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지개교회 주일 예배 설교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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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신학에세이: "레위기와 시내산 언약" [1] 류호준 2006.10.03 13685
53 서문: [등불들고 이스라엘을 찾으시는 하나님] [2] 류호준 2007.01.30 13894
52 오호 통재라, "세월호와 한국교회호" [2] file 류호준 2014.04.23 13933
51 프레드릭 비크너,『어둠 속의 비밀』홍종락 옮김 (서울: 포이에마, 2016) file 류호준 2016.02.12 13942
50 신앙교육(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류호준 2008.11.11 13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