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7 21:02
“아합 밑에서 오바댜로 산다는 것”
- 악한 세상 살아내기 -
오바댜는 북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왕 아합 왕 밑에서 궁내대신을 지낸 인물입니다. 오바댜는 이스라엘 왕국에서 제 2인자였습니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의 북쪽에는 페니키아 제국이 있었습니다. 페니키아 제국은 바알 종교의 본산이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페니키아 제국의 대표적 도시 국가들이었습니다. 아합은 페니키아 제국의 왕 엣토바알의 딸 이세벨과 정략(政略) 결혼을 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영적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은 아주 나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이교적 바알 신앙으로 바꾸어 놓은 장본인이었습니다. 바알 종교는 근본적으로 번영과 건강을 추구하는 자연주의 기복종교이며, 그래서 바알종교를 보통 풍산(豐産)종교라고 부릅니다. 현대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건강과 번영의 복음”(gospel of wealth and health)을 핵심적 신학 내용으로 갖고 있었던 종교였습니다. 아합은 바알 제사장들을 동원하여 여호와 신앙의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와의 대결을 서슴지 않았으며, 왕후 이세벨의 간교한 간청에 넘어가 선량한 시민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악질적인 왕이었습니다(왕상 21장).
그런 왕 아래서 오바댜는 궁내대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요? 품안에 지니고 있던 사직서를 하루에도 수없이 내려고 했을 겁니다. 아마 그에겐 심적 고민이 컸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순투성이의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고민스런 전형적 모습을 오바댜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겐 매일같이 궁중에서 일어나는 더럽고 불의한 일들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 크리스천들이 취해야할 태도는 어떠해야할까요? 모형론적으로 말하자면 세 가지 옵션이 가능합니다.
“이민 가다!”
첫째,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악한 왕 아합 밑에서 살지 않으려면 이 길이 제일 수월한 선택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선택도 그 나름대로 더 큰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로 이민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변국을 둘려보아도 이민 갈 만한 마땅한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보다 더 악하면 악했지 덜한 나라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옵션은 접어야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정말로 악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정말로 악합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이며 정글의 법칙이 유통되는 통화입니다. 정의보다는 불의를 통해서만 성공의 정상에 오르기 십상인 모순투성이 세상입니다. 이런 악한 세상에서 크리스천들이 취해야할 태도는 어떤가요? 아마 제일 쉽게 떠오르는 옵션이 하루 속히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단순한 크리스천들은 하루 빨리 하나님나라(천국)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이 썩어질 세상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저 천국”을 사모하고 바라봅니다. 이 세상이야 멸망할 세상이니 가능하면 빨리 세상을 탈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빨리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본 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오늘 빨리 천국으로 보내드릴까요?”하면 펄쩍 뜁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더 살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모순입니까? 많은 경우, 이런 사람들은 이원론적 사고방식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은 악하니깐 빨리 떠나야할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망성(將亡城, 장차 망할 성, city of destruction)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세상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한 생각인가요? 어디선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는 세상 말입니다. 아무리 썩고 불의하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아직도 구속받아야할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그러니 악한 왕 아합이 다스리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이민 떠나야 할 나라는 아닙니다.
“혁명을 꿈꿔라!”
둘째 옵션은 악한 왕 아합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아합이 얼마나 못된 왕입니까?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버젓이 바알 종교를 도입하고 바알 제사장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왕이 아닙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봇을 살해하고 그의 포도원을 왕실 재산으로 귀속시킨 악랄한 통치자가 아닙니까? 이런 왕 밑에서 제 2인자 자리에 앉아 있는 오바댜는 분명 고통스런 날들을 보내지 않았겠습니까? 아합을 제거하면 좀 더 평화로운 나라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럴 경우 아합을 제거하려면 궁중음모를 통해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무혈 쿠데타가 될지 유혈 쿠데타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 피를 흘려야함에 틀림없습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악한 왕 아합을 무력으로라도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한번은 본회퍼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가득 태운 버스가 미친 듯이 거리를 질주합니다. 그 안에 여러분이 타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운전사가 미친놈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이 미친놈의 운전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럴 경우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친 운전수가 계속 운전하도록 내버려둘 것입니까? 아니면 목숨을 걸고라도 운전수를 제거해야합니까?”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미친 히틀러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합니다. 히틀러는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히틀러는 세계 제 2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이었고 그로 인해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매우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본회퍼의 말은 결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용기가 있다면 나라도 미친 운전수를 끄집어 내렸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일 것입니다.
비록 아합이 악하고 못된 왕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히틀러와 같은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바댜의 내러티브를 읽어보면 아합은 국가적인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오바댜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보아도 그는 혁명을 통해 제거되어야할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바댜의 고민 해소 방법에서 아합을 제거하는 혁명방법은 정당한 옵션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의 악에 대해, - 그것이 악덕 사업주이든, 못된 사장이든, 교묘한 수퍼갑들이든, - 그 악이 개인적 악이든 구조적 악이든 상관없이 피를 흘리는 혁명을 통해서는 결코 해결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칼은 또 다른 칼을 불러올 것이며, 피는 피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한계 내에서 살라!”
마지막 옵션은, 한계 내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아합의 악정(惡政) 밑에서 제 2인자로 살아가는 경건한 오바댜는 자신의 신앙적 고민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방법도, 아합을 제거하는 혁명의 방법도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죽으나 사나 주어진 삶의 한계 내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아합과 함께 살되 자신의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앞의 두 가지 옵션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악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마치 불치의 암에 걸린 사람이 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오바댜는 이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 역사의 궁극적 키를 잡고 있다고 믿는 “섭리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혁명이 아니라 누룩과 같은 개혁을 믿는 사람입니다. 고통과 핍박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이 악한 세상 속으로 돌입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을 성경은 “오바댜는 여화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왕상 18:3)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바댜도 엘리야에게 자신의 삶을 간증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종 오바댜는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왕상 18:12)
그는 자신의 한계와 권한 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아합의 서슬 퍼런 여호와 선지자 박해 명령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선지자 백 명을 오십 명씩 나눠 광야의 굴속에 숨기고 매일같이 떡과 물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위험천만한 작전이었겠습니까?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했던 드라마틱한 작전이었습니다. 아합의 철저한 감시를 따돌리면서 펼쳐야만 했던 목숨 건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발각이 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과 권한과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이끌어 가시는 분이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악한 왕 아합 밑에서 가장 선하게 사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준 경건한 크리스천이었던 것입니다. 오바댜! 그의 이름뜻은 "여호와의 종"입니다. 역시 그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름 값을 하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오바댜 크리스천들이여! 힘을 내라! 용기를 잃지 말라. 끝까지 견디는(버티지 말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로다! 아멘.
PS. 이민갈래? 혁명할래? 견딜래?
- 열왕기상 18:1-19을 중심으로-
[거제도에서, 박정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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