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부활절”

요한복음 20:19-29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오늘은 부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로부터 여드레가 지난날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활절 주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에 관한 본문입니다.]

 

 

 

의심과 믿음

 

대부분의 우리들에게,

    · 의심은 문젯거리입니다.

    · 의심은 신앙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 의심은 신앙에서 탈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의심은 우리의 신앙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가 신앙과 의심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까?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는 참된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이며, 동시에 성령께서 복음으로써 내 마음 속에 일으키신 뿌리 깊은 신뢰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의심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참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의심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의심한다면 참된 믿음의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분들이 참된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아마 대답 역시 회의적이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게 되었을 때, 즉 장로, 권사, 집사직분을 받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이렇게 선서했을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틀림이 없는 정확무오한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 또한 교회의 신조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일치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예,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신앙 고백서)

 

여기서도 의심의 자리는 없습니다. 참된 믿음, 가짜 믿음이 아닌 진짜 신앙을 고백하였을 것입니다. 참된 믿음에 대해 말하려면 아마 반드시 고전 15장을 언급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17-19절)

 

자,

    ․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가 참된 믿음에 대해 말한 것을 기억하시고,

    ․ 또 직분자 서약을 했을 때 서약의 내용을 다시금 기억하시고,

    ․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하신다면,

    우리 마음에 찔림이 있을 것입니다.

 

    ․ “정말로 나는 참된 믿음을 갖고 있을까?”

    ․ “의심하는 믿음이 아니라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의심하는 내 자신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 믿음은 확실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언제나 진실하고 참되다고 믿는가 아니면 의심하기도 하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복음서에 도마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도마 이야기는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의심한다고 해서 믿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 의심한다고 해서 믿음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 신앙은 의심보다 더 깊고 강하다!

   · 믿음은 의심보다 훨씬 깊고 심오하고 굳건하다!

   · 내 의심이 아무리 깊다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의심보다 더 깊으시다!

   · 내 의심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나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의 손은 그 의심보다 더

     강력하시다!

 

 

부정직한 의심

 

그렇지만 한 가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의심’은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정직한 의심’이라뇨? 그게 뭡니까? 도피하려는 형태의 의심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 발을 빼거나 뒤로 물러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모인 백여 명이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일에 참여하려면 시간과 물질로 헌신해야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기에게 여러모로 불편하거나 희생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일에서 발을 빼고 싶은데 그러자니 속이 보입니다. 그럴 경우, 이 사람이 발을 빼는 방법은 공동체가 하려는 일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입니다. “그 일은 이러저러해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들이는 노력에 비하면 별로 건질 것이 없습니다. 별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의심하거나 부정적인 이유는 자기가 감당해야하는 짐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적 언어로 말하자면, ‘제자도의 비용’(cost of discipleship)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지불해야하는 비용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정직한 의심입니다. 손과 발을 담그지는 않으면서 말로만 논쟁하고, 이론만 앞세우는 경우입니다. 헌신을 두려워하는 의심입니다.

 

 

정직한 의심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정직한 의심’이 있습니다. 헌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심입니다. 기꺼이 헌신하고픈 의심입니다.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따라가고 싶은 의심입니다. 달리 말해 급진적인 정직함에서 흘러나오는 의심입니다. 이 의심은 이렇게 말하는 의심입니다. “오, 주님! 저는 정말로 믿고 싶습니다. 참된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나의 불신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의심이 많은 저를 도와주십시오.”

 

도마는 이런 식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마는 우리가 볼 때 모범적인 크리스천은 아니었습니다. 소위 ‘모범생 크리스천’은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우리가 모범적인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그런 종류의 크리스천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비주류 크리스천이라고 분류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그렇다고 그는 삐딱한 크리스천, 반골기질의 크리스천, 항상 “왜 그런데요?”라고 발을 거는 그런 크리스천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신앙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갖고 싶어 하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aith Seeking Understanding)을 갖고 싶어 했던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정말 믿고 싶어서 알려고 애썼던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도마는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따로 노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제자 공동체의 기둥 역할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힘든 것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구제 불가능한 고민 습성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성향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그는 거의 정신적 불구자가 될 것 같았습니다.

 

※   ※   ※   ※   ※   ※   ※   ※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여러분이나 저나 의심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의심 정도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심들을 글로 옮긴다면, 그 영향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줄 것입니다. 도마의 의심이 그런 의심이었습니다. 물론 도마가 의심하는 말을 즐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심각한 의심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처를 품고 있는 의심의 말이었고, 그 말은 사실상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의심이었습니다. 의심이라는 것은 이처럼 언제나 상처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믿음의 의심은 더더욱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영화배우이며 극작가인 우디 엘렌(Woody Allen)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난주 내 혀가 전동 타이프라이터 속으로 말려들어갔을 때, 그 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수많은 의심으로 병이 들었다. 모든 것들이 다 허상이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럴 경우, 아마 나는 내 카펫에 너무 많은 값을 지불한 것일 거야.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한 싸인을 주신다면 몰라도 … 내 스위스 은행 계좌에 엄청난 금액을 집어 넣어주시는 것 같은 싸인을 주신다면 몰라도…”

 

우디 엘렌은 심각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의 영혼 역시 심하게 상처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도마의 의심 역시 그러합니다. 진정한 의심은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도마라는 인물

 

도마라는 인물은 요한복음 여러 곳에 스케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동일한 어조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옵니다. 그녀들이 이런 메시지를 예수님께 보냅니다. “주님, 당신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가 계셨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물렀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가 죽습니다. 그제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지방으로 가지고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 지방으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가시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당신께서 지난번에 그곳에 게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당신을 돌로 쳐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바로 이 순간, 도마가 그의 동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주님의 제자로서 용감하게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겠다는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확신에 찬 결의를 가지고 죽으러 가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은 깊이 좌절한 영혼이 내뱉은 실망의 말입니다.

   · 도마는 자기의 전 인생을 예수께 걸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 도마는 예수께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당신의 빛이 가버리면 내게는 빛이 없습니다.”

 

이래서 도마는 “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도마는 절망스러워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 살아야할 이유를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는 자기의 모든 희망을 걸었던 바로 그분과 함께 죽을 준비가 되었던 입니다.

 

예수가 잘못되면 자기도 잘못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분과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이런 말을 한다면,

    ․ 예수님께 나의 삶을 다 걸겠다는 뜻입니다.

    ․ 더 이상 기다릴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 그분만이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뜻입니다.

    ․ 일이 안될 때 다른 데로 갈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의 제자로 남아 있겠다는 뜻입니다.

 

 

의심하는 신앙인

 

진정으로 고민하는, 정직한 회의론자인 도마를 생각하면 러시아의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떠오릅니다. 도마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회의론자였습니다. 철저하게 의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심들을 소화해 낼 수 없는 회의론자였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고통 했습니다.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는 의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의심을 품게 된 것은 이 세상의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데 왜 이렇게 악이 많을까? 어린아이가 고통 중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고 싶었습니다. 믿음을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가 의심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더 신앙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신앙을 갖게 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영웅들의 입을 통해 자기의 의심과 회의를 표현했습니다. 이반 카라마조프가 그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이반 카라마조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혼 속에 있는 의심들을 대변하는 사람입니다.

 

이반 카라마조프는 이 세상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 고통 하는 어린아이들로 가득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이 세상입니다!” 부조리와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의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통 하는 어린아이들의 울부짖음에 그의 가슴은 너무 크게 상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고통 하는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보다 차라리 고통하면서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음은 신앙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디선가 이렇게 쓴 일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보다 더 아름답고 더 심오하고 더 매력적이고 더 완벽한 것은 없다고 믿습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보다 더 위대한 분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 없다고! 누군가 나에게 그리스도가 잘못되었다고 증명한다면, 그분에게 진리가 없다고 증명한다면, 나는 차라리 진리를 얻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붙잡을 것이며, 그리스도 없이 모든 것이 잘되는 것보다 차라리 그리스도를 모시고 잘못되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이 말이 마치 도마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도마의 이 말을 풀어보자면 이런 것일 겁니다.

 

“모든 일이 자살 행위입니다. 아무 것도 좋게 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자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합니다. 예수님 운동은 이것이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최악의 상태에 직면해야 합니다. 예수가 잘못되시면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분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분이 실패하고 잘못되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그분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살이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삶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보이는 모든 환경과 돌아가는 일들이 절망적인데도 희망을 갖는 일입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조만간 우리는 “이것은 아니야! 너무 힘들어, 이젠 끝장이야!”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지점을 넘어서게 되면, 즉 바라던 희망이 성취되지 않게 되면, 그때는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도마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의 희망이 자기 안에서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도마는 기꺼이 예수님에 대한 절박한 신실함 가운데서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절망적인 마지막 순간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충성과 신의를 지키며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의심마저 포용하시는 분

 

오늘 본문에서 도마가 한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 말입니다. 도마는 부활주일을 건너뛰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부활주일에 교회에 오지 않은 것입니다. 부활절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그 자라에 없었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하자 도마가 말하기를,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였습니다. 일주 후, 즉 부활절후 그 다음 주일에 도마는 의심의 상태에 있었을 때,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도마를 빼놓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평강의 축복을 하실 때 의심하는 이도 포함시켰습니다. 즉 예수는 도마와 그의 의심들과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받아들이십니다. 여러분의 의심들과 여러분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십니다. 왜 이럴까 하는 마음, 고민하는 마음, 고통 하는 마음 모두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려운 질문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괴로운 질문을 하지 말라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여러분이 의심을 극복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도 아닙니다. 모든 의심을 해결하고 나오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정직한 의심은 신앙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솔직한 의심은 신앙을 정화시켜줍니다.

    ․ 정직한 의심은 신앙에 대한 논평입니다.

 

프래드릭 뷰크너가 이렇게 쓴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정직한 의심들이 없다면, “여러분은 스스로를 속이거나, 스스로에게 농담하거나 아니면 영혼의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들은 신앙의 바지 속에 있는 개미들입니다. 개미들은 여러분을 깨어있게 할 것이고, 이리저리 움직이게 할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의심들과 함께 숨바꼭질 놀이를 합니다. 잘 보이는 곳에 의심들을 두어야하는데, 우리는 종종 볼 수 없는 곳에 의심을 꼭꼭 숨겨두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마의 이야기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도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당신의 의심들을 표현하십시오. 그것도 큰소리로 하나님께 외쳐대십시오.”

 

여러분의 의심들을 표현하지 않으면, 의심을 억누르고 있으면,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여러분의 믿음보다 더 강한 진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진리는 없습니다.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믿음은 그런 진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 신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 신앙은 어떤 심연(深淵)이 우리 앞에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하더라도,

      깊은 구렁텅이 속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심연들 보다, 그 모든 구렁텅이들보다 더 깊으신

      분이라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도마를 부드럽게 대하시고 있다는 점은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의심하는 이들 각자에게 위안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앙대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제대로 믿음대로 살려고 애쓰는 여러분 앞에서 매몰차게 문을 세차게 닫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때때로 의심하고 갈등하는 여러분을 그분의 부활절 축복서원 속에 포함시키십니다. 여러분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의심하면서 믿습니다. 믿으면서 의심합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갑니다. 의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며, 믿으면서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긴장속의 건강한 신앙’입니다. 주님은 의심하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멘.

 

 

[무지개 교회 부활절후 2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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