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3월 하순경에 류호준 교수의 신간이 출간됩니다. 책 제목은『십자가의 복음: 로마서의 메시지』(킹덤북스, 2010)입니다. 아래 글은 책 가운데 제 1장을 발췌한 것입니다.

 

 

1

[로마서 신학]

 

“하나님의 구원 경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3-36)

 

 

로마서는 교리서도, 조직신학 논문도 아닙니다. 로마서는 구약 이스라엘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어떻게 구원 경륜의 역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 안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명쾌하게 노래하고 설교하는 책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은 크게 찬사를 받아야 할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자요 목회자입니다. 그렇지만 로마서는 히말라야 산맥과 같이 수많은 고봉(高峰)들로 가득합니다. 그러기에 등정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계절마다 그 색상과 위용이 다르게 느껴지며, 보는 각도와 고도에 따라서 그 맛과 웅대함, 멋과 장엄함, 빛과 현란함이 전혀 다르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많이 탐구되고 등정되고 연구되었지만, 아직도 어느 길이 정상에 이르는 정로(正路)인지 의견이 분분한 책이기도 합니다.

 

물론 학자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몇 가지 분명한 사실들은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일 세기 중반 대략 57년경에 고린도 지역에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참조, 롬 15:25-26; 고전 16:1-7) 그 때 그의 계획은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를 거쳐 최종적으로 스페인까지 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왜 로마서를 쓰게 되었는지, 무슨 이유 때문에 장문의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그리고 편지의 포괄적 주제, 핵심이 되는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다양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다시 말해 어떤 상황이 있었기에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 측면을 고찰함으로 어느 정도는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로마서의 내적 증거입니다. 편지 자체를 철저하게 읽고 조사해 보면,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이런 편지를 쓰게 하였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일명 ‘거울 독서’(mirror reading)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선 로마서 전체에 대한 개요를 살펴보면, 로마서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그 흐름과 동선(動線)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서의 끝 부분에 실린 로마서 개요(26장)를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와 함께 나는 로마서의 고봉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서너 가지 핵심적 가르침들을 요약적으로 진술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구원 경륜’, ‘근본적인 변화들’ 등과 같은 주제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로마서 전체를 통해 흐르는 주제 멜로디(main melody)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어느 부분이 연주되더라도 이 주제 멜로디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를 추적하는 두 번째 길은, 비록 제한적인 자료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로마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주후 49년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칙령을 내려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는데, 그 이유는 “크레스투스의 선동으로 야기된 지속적인 소란”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크레스투스’(Chrestus)는 ‘그리스도’(Christo)를 가리킵니다. “크레스투스 선동’’(impulsore Chresto)이란 예수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로마의 유대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진, 보수적 유대인들과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했던 초기 크리스천 그룹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갈등이 비화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로마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로 생각되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49년에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대거 추방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54년경에 일어났습니다. 54년에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네로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면서 유대인 추방령을 취소하게 됩니다. 로마에로 귀환을 허락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를 떠났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자리를 비운 지난 5년간 로마의 가정교회들은 대부분 이방 크리스천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보다 탈유대적 성격의 공동체로 변모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로마로 귀환하자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안식일과 할례법과 정결법과 같은 율법준수와 관련된 문제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일종의 지도권(헤게모니) 다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던 로마 교회를 향해 바울 사도는 ‘복음’을 설명함으로써, 신앙의 본질적인 것에서 하나가 된다면 비본질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서로 관용하라고 촉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경륜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서부터 출발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바 되었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칭의 선언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분명하게 알게 되면,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의 논리는 교리의 논리보다는 역사의 논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유대인의 위치가 무엇이었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리고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광대한 진술을 담고 있는 책이 로마서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서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한 아버지와 두 아들’(일명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의 관한 이야기를 구원 역사적 논리로 써 내려간 장문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아들 유대인과 작은아들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특별히 9-11장)

 

살펴본 바, 바울이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로마의 가정교회들을 향해 편지를 보내게 된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칭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물론 로마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강력하게 말씀합니다. 또한 로마서의 칭의 교리는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을 점화하는 도화선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가 칭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닙니다. 달리 말해, 로마서의 핵심적 내용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로마서를 쓰게 된 목적은 당시 갈라져 다투고 있던 로마의 유대인 크리스천 그룹과 이방인 크리스천 그룹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도 한몫하였습니다. 한 아버지의 두 아들이 서로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아버지의 집에 평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들을 위해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이 다시 찢겨져야 하겠느냐는 외침입니다.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의 나타나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 즉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을 때만 실행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에 전체에 흐르고 있는 중심적 가르침들을 요약적으로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의(義)”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 새로운 시대가 동트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義)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지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일까? 일반적인 관찰에 의하면, ‘의’, ‘정의’, ‘공의’, ‘의로우심’, ‘의롭다 하심’ 등과 같은 용어들이 무질서하게 때론 교체적으로 사용됩니다. 각각의 용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때론 ‘의’라는 단어가 법적인 용어 같기도 하고, 때론 도덕적인 덕목을 가리키는 용어 같기도 합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훈은 “의(義)에 죽고 의(義)에 살자”였습니다. 학교 설립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그는 ‘의’를 아주 좋은 덕목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의’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지냈던 사람으로서 학교를 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의란 ‘의로운 기상’을 의미했습니다. 의리가 있고 씩씩하고 기개가 넘치고 정의롭고 불의를 싫어하고 대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불사하겠다는, 그런 청년들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런 것일까? 글쎄올시다, 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런 도덕적인 기상이나 기개를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일까?

 

그렇다면 ‘의’는 법적인 용어일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는 분명히 법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합시다. 오랜 법률적 공방 끝에 재판장은 그에게 무죄를 선언하였습니다. 이럴 경우 정의가 시행된 것입니다. 그 무고한 양민에게 “당신은 죄가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뜻일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잘못이 없었지만, 우리는 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데도 없다고 말하는 것을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의 법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은 누누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입장입니다. ‘의’의 전가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라는 질문이 뒤따릅니다만, 여기서 다룰 만한 여유와 지면이 할애되지 않기 때문에 접어 두기로 하겠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의에 법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법적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선언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의’의 세 번째 의미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의’, 혹은 ‘의롭다 하다’는 용어는 근본적으로 ‘관계’, 혹은 ‘관계의 회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원래 구약성경에서 사용되는 ‘의’의 개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의’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는 구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의’는 상대방과의 관계가 올바른 상태, 즉 정상적인 관계에 있을 때를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의’는 언제나 두 사람 사이의 언약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언약관계가 정상적일 때, 의로운 관계, 올바른 관계, 곧은 관계, 좋은 관계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약 관계’라 함은 언약이 깨어진 후 다시 회복된 관계까지를 포함합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며느리 다말과 시아버지 유다 사이에 있었던 사건입니다.(창 38장)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 임신한 며느리 다말은 자신의 행동이 옳았음을 시아버지에게 말하려 하지만, 유다는 자기가 길거리의 창녀와 정을 통한 사실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입을 다뭅니다. 마침내 다말이 한 행동이 공동체의 언약에 따른 합법적인 것임을 알게 되자,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는 나보다 옳다.”(26절) 여기서 ‘옳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짜드카’(הקדצ)로 ‘의롭다’는 뜻입니다. “너는 의로운 여자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의’ 혹은 ‘의롭다’는 용어는 언약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달리 말해, 언약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의롭다’ 라고 하고, ‘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언약을 깨는 행동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의’는 올바른 관계를 말하고, ‘의롭게 하다’는 말은 원래의 관계로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이 용어가 하나님에게 사용될 경우 ‘의’는 ‘구원’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임박했다는 뜻도 됩니다.(예, 사 45:21; 46:13; 55:5,8; 61: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피조물과 맺고 있는 관계적 용어입니다. 이 관계가 인간의 반역과 죄로 인해 깨어졌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려고 이니셔티브를 잡고 사람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였던 다리가 파괴되자 복구 작업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모든 재료와 공정과 노력은 다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깨어지고 주저앉은 사이를 가로질러 놓인 다리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즉 “너희 죄인들아, 너희는 죽지 않게 되었다. 너희는 고립에서 벗어났어. 너희는 심판에서 벗어났어. 이제 너희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악트마이어가 명료하게 표현하듯이, “복음의 기쁜 소식은 바로 하나님이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로 한 결정을 그리스도가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고, 인간과 다시 그 관계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그 언약을 유지했기 때문이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의’는 심판과 구원의 양면으로 나타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심판으로, 우리에게는 구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또한 “죄의 삯은 죽음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제 정죄함이 없게 된 것입니다.”(롬 3:23; 6:23; 8:1) “하나님의 선물은 영원한 생명이며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먼저는 유대인들에게, 그 후에는 이방인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1:16; 3:22; 6:23) 언약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의’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의롭지 않다(정죄)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롬 8:1)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런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그분의 한량없는 은혜와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셨습니다.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불순종과 반역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맺은 언약에 대해, 하나님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신실하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인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저항하고 반발하였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해 신실하셨으며 또한 끝까지 신실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전개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서 논하면서도 그 마음에 고정된 별, 마치 북극성처럼 떠 있는 중심주제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거대한 아치처럼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걸쳐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보이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신약에 들어와서도 동일하게 모든 사람에게 -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실하심’은 자기의 언약에 대해 신실하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축약한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황금송아지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출애굽 후 한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 정상으로 불렀습니다. 그리하던 중 모세의 귀환이 늦어지자, 산 아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을 중심으로 황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자기들을 인도하는 신이라고 했습니다. 하산 길에 이 광경을 보았던 모세는 들고 있던 두 돌판을 그들 가운데로 던져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불렀습니다. 두 돌판을 깎아서 시내산 위로 올라오라는 명이었습니다. 시내산 정상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호와로다. 여호와로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성품을 명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따르면, 하나님의 속성(성품) 안에 있는 단어 두 쌍이 돋보입니다. ‘자비ㆍ은혜’(히, ‘레헴’과 ‘헨’), ‘인자ㆍ진실’(히, ‘헤세드’와 ‘에메트’)입니다. 이 용어에 대한 해설이 약간 필요할 듯합니다. ‘자비’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헴’은, 원래 애간장이 타는 듯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단장(斷腸)의 슬픔’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가 히브리어 ‘레헴’입니다. 일반적으로 ‘긍휼’로 번역됩니다. ‘인자’(仁慈)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세드’는, ‘변함이 없는 신실한 사랑’(NIV는 보통 ‘unfailing love’, ‘steadfast love’으로 번역하고, 한글성경은 ‘인애’, ‘사랑’, ‘자비’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합니다)을 뜻합니다. 한번 맺은 약속은 끝까지 지키겠다는 헌신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에메트’는, 일반적으로 ‘진리’(truth)로 잘못 번역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진실’(truthfulness) 혹은 ‘참됨’으로 옳게 번역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쌍의 단어군(‘은혜ㆍ긍휼’, ‘인자ㆍ진실’)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맺은 두 가지 종류의 언약 전승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약속적 언약’(promissory covenant)이고, 다른 하나는 ‘의무적 언약’(obligatory covenant)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은혜로 맺은 언약으로,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이 이런 부류에 속한 언약들입니다. 한편 후자는 언약의 당사자에게 일정한 의무를 짊어지우는 언약으로 모세 언약(시내산 언약)이 여기에 속합니다. 신의와 충성과 신실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한다는 의미에서 ‘의무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약속적 언약’을 담고 있는 용어가 ‘은혜’(히, ‘헨’)와 ‘긍휼’(히, ‘레헴’)입니다. 이 언약적 전승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부담을 지는 언약입니다. 은혜와 긍휼은 상대방의 도덕적 위치나 질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쏟아 붓는 자비로운 행위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의무적 언약’의 경우,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진실’(히, ‘에메트’)과 ‘성실’(히, ‘헤세드’)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반응하도록 요구되었습니다. 물론 진실과 성실은 하나님의 언약적 속성들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려는 바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진실과 성실로 언약을 지켜야 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언약 전승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믿는 모든 자들에게 -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 -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대해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2:11)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모두 한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어느 자식 하나도 배 아파 낳지 않은 자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은 큰 위로가 되는 동시에 커다란 도전이 됩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도 큰 사랑이어서 “우리가 아직도 죄인들이었고”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원수들이어서” 도무지 우리 자신들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었을 그 때에(5:8,10),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더욱이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그저 우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과 나라들과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근본적 변화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람들, 즉 다른 백성들과 민족들과의 관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제일 먼저 바뀌는 것은 개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입니다. 세상이 보여 주는 가치관에 대해 이제부터는 적극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용기가 생깁니다. 이 세상의 패턴에 따라 살던 습관이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을 즐거워하는 습관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개인적 변화를 넘어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창조적 에이전트가 됩니다.(12:2) 달리 말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로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이전된 의로움,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전가(轉嫁)된 의로움’은 엄청난 사회적 함의를 지니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대로,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것이 곧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이 회복이 또한 다른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시작되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회복하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집에 평화와 샬롬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집안에 있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소원했던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즉 종교, 민족, 인종, 종족, 성별 등의 장벽들을 깨어 부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따라, 하나님은 아무런 차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런 구원을 받은 우리들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차별 없이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사회성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 하나님의 집 안팎의 모든 것들도 새롭게 되었습니다. 회복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피조세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 즉 샬롬의 세계가 도래하기를 간절히 열망하면서, ‘썩어짐의 노예 노릇’에서 해방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8:21-22)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서곡이 울려 펴졌으나 ‘아직’ 그 피날레(finale)가 도래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조물들과 함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습니다. 뒤를 돌아 겟세마네의 갈보리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올 시온산의 영광을 ‘기대’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일 세기의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이런 장문의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어렴풋하게나마 커다란 윤곽이 드러나게 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경륜’(Economy of God's Salvation), 즉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큰 틀을 보여 주려 한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에 있던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그곳에 있었던 유대인 출신의 크리스천들을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그곳에 있었던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유대인 전통의 식생활과 거룩한 절기들에 관한 율법들을 준수해야만 한다는 심한 압박감을 느꼈습니다.(롬 14:1-6) 그런 유대인 크리스천들에 대해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좋지 못한 감정을 가졌으며 심지어 그들을 무시하고 배척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해 어떤 목적을 갖고 계신지에 대해 그들 모두에게 가르쳐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되면, 우리 자신들에 대해, 유대인들에 대해, 다른 인종과 민족에 대해, 온 피조세계에 대해, 그리고 인류 역사의 목적과 종말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지에 대한 삶의 방식이 자연스럽게 제자도로 이어져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이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즉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처럼 사는 제자도의 길을 걷게 할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이미 지금 여기에 와 있는 새 시대의 전령이신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삶입니다. 삶이 예전 같을 수는 없습니다!("Life will be never the same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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